•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1)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의

(1)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의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되고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헌신해 온 呂運亨이 백주에 암살당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한국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남과 북에 분단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은 마샬플랜(Marshall Plan)을 위시한 대소포위정책을 전개하여 냉전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그해 8월 29일 미국 국무장관 대리 러베트(Robert A. Lovett)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V. M. Molotov)에게 미·소·영·중이 한국문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였다고 발표한 것은 그러한 분단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밟기였다. 예상대로 소련은 러베트 제안을 거부하였고, 그러자 국제연합(UN) 총회가 열린 다음 날인 9월 17일 미국 국무장관 마샬(George C. Marshall)은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다루어 줄 것을 제안하였다. 소련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총회는 한국문제 유엔총회상정안을 41 대 6으로 가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쉬티코프(Штыков Т. Ф.)는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와 함께 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인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발언하여야 한다고 역습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을 43 대 0(기권 6)으로 가결하였다. 불과 며칠 안 된 11월 18·19일 북에서는 북조선인민회의가 열려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문제가 미국에 의해 유엔에서 논의되자 남과 북의 정치세력은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李承晩과 韓民黨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더욱 다그쳐 벌이면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金九는 이승만과 단결·협력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추대 명분을 살려가고자 하였으나, 韓獨黨에서는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남과 북의 南勞黨·北勞黨은 한국문제가 유엔에 의해서 처리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미·소 양군 철퇴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을 지지하였다.

 좌우·남북합작과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에 협력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해 온 좌우합작운동세력은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다루어짐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새로이 모색하였다. 중도우파를 중심으로 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진영을 정비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일, 14개 정당과 5개 단체대표 및 개인이 참여하여 民族自主聯盟(이하 민련) 결성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준비위원회위원장 金奎植). 그리고 민련을 이끌어갈 핵심정당으로 10월 19·20일에 民主獨立黨(이하 민독당)이 결성되었다(위원장 洪命熹).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김구·한독당에서는 10월에 남북지도자회의가 소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처음 열릴 때부터 남북요인회담을 주장하였다고 말하고, 남·북에 있는 책임자들이 공사간 아무 형식을 취해서라도 곧 회담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반드시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김구·李始榮·呂運弘 등도 남북요인회담에 찬동하였다.419)≪새한민보≫, 1947년 10월 하순호, 9쪽. 남북지도자회의는 이전부터 여운형 등이 주장하였던 것으로, 민족문제 해결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 최후의 방안으로 제기되게끔 되어 있었다.

 10월 15·16일간에 열린 한독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남북대표회의를 조직하여 남북통일선거문제 등을 논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18일에는 勤勞人民黨·社會民主黨·民主韓獨黨·民衆同盟·新進黨 등 5당에서 남북대표의 왕래를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단이 서울을 떠난 21일 민련 선전국장 李克魯는 남북요인회의 개최를 주장하였다. 11월 2일부터는 한독당 초청으로 민독당·근민당 등이 모여 각 정당협의회를 구성하여 남북정당대표회의 구성 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각 정당협의회는 11월 19일 김구의 요청에 의해 한독당에서 이 모임의 활동 보류를 결정함으로써 좌초되고 말았다. 김구가 이승만과 타협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2월 1일 김구는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2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를 선언하였다. 5일 후인 20·21일에 15개 정당, 25개 사회단체, 개인 등이 참여하여 민련을 결성하였다. 주석에는 김규식이 추대되었다. 민련은 특정 계급이나 종파의 영도성을 떠난 진정한 민족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을 다짐하고,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남북정치단체대표자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420)≪정당 사회단체 등록철≫, 1950년 9월,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문화선전부(1989년 吳制道 영인), 772∼773쪽. 이로써 남북지도자회의 추진체가 조직되었다.

 1948년 1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은 불참)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일행이 한국에 옴으로써 남북지도자회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잭슨(S. H. Jackson)을 대표로 한 임시위원단 제2분과에서는 1월 26일에 이승만과 김구를, 27일에 김규식 등을 만났다. 김규식은 임시위원단이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임무를 맡았고 단정수립의 임무를 맡지 않았음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1월 26일 위원단을 만난 뒤 김구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는 이날 기자들에게 미·소 양군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28일 김구는 유엔에 보내는 의견서에서 ①신속한 총선거에 의한 한국의 통일된 완전 자주적 정부만의 수립을 요구하고, 그와 함께 ②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의사에 의하여 실시되어야 하며, ③북에서 소련이 入境을 거절하였다는 구실로 유엔이 그 임무를 태만히 해서는 안되고, ④曺晩植을 포함하여 남북의 일체 정치범을 석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⑤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되, 치안은 유엔이 맡을 것, ⑥남북한인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김구의 주장은 김규식·민련의 통일방안과 비슷한 것이었다. 김구가 이와 같이 방향전환을 한 것은 張德秀 암살사건으로 이승만·한민당과 더 이상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 그리고 유엔임시위원단이 입국하였기 때문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추대 문제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와 함께 임시위원단의 통일국가 수립에 대한 호의도 영향을 미쳤다. 임시위원단 임시의장 메논(K. P. S. Menon)은 1월 21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하여 한국은 결코 분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 바 있었다. 김구가 통일정부 수립에 적극 나선 것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해 온 민족주의자로서 조국이 분단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독당 상무위원회는 1947년 9월에 남북통일국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김구가 남북요인회담을 주장하자 한민당 등으로 구성된 韓國獨立政府對策協議會(이하 한협)에서는 “소련은 조선의 김구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라 하면서, “금후에는 김구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라고 매도하였다.421)≪동아일보≫, 1948년 1월 30일(국사편찬위원회 편,≪자료 대한민국사≫6, 1973, 184∼185쪽). 자신들이 領袖로 모셔왔는데, 입장이 달라졌다고 소련의 앞잡이로 몰아세운 것이다.

 1948년 2월 4일 民族自主聯盟(이하 민련) 정치위원 상무위원 연석회의에서는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북의 金日成·金枓奉에게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이 서한은 김규식 한 사람보다 김구와 공동명의로 발송하는 것이 효과가 클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바, 김구는 이에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민련의 申基彦이,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한은 한독당의 嚴恒燮이 기초하여 2월 16일부로 발송하였다. 이의 발송에는 유엔임시위원단도 협력하였다.422)宋南憲,<김구·김규식은 왜 38선을 넘었나>(≪新東亞≫, 1983년 9월호), 205∼206쪽.

 김규식과 김구는 유엔소총회에서 한국문제를 결의하기 이전에 북과 소련이 요인회담 제의에 반응해 줄 것을 바랐다. 이 시기에 요인회담 문제가 크게 쟁점이 되면 유엔소총회에서는 일방적으로 한국문제를 다룰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북과 소련이 요인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왔더라면,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었다. 북과 소련의 호응은 분단정부 수립을 막거나 연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북과 소련이 김구·김규식의 서한을 늦게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남북요인회담을 김구 등이 제안하였다는 것은 이미 1월 말경에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끝내 북과 소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월 19일 유엔소총회가 열렸다. 이날 메논은 한국문제 해결방안 4가지 중 1안 남한총선거안과 3안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해서 비중을 두고 연설을 하였다. 그는 김규식이 두 개의 단독정부가 한국분단을 영구화하였다는 책임을 유엔임시위원단에서도 지게될 것임을 지적하였다고 말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 수립방안은 성공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한번 해 볼 가치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이 회의에서 오스트레일리아대표 잭슨은 남한선거는 불법적이라고 주장하였고, 캐나다 대표 패터슨(George S. Patterson)은 총회 결의는 분명히 한국전역의 총선거 실시를 명시하였으며, 그와 다른 과정을 택하는 것은 소총회의 권한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26일 소총회에서는 미국의 남한총선거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하였다. 3월 1일 주한미국육군사령관 하지(J. R. Hodge)는 5월 9일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선거는 기독교도들이 5월 9일은 일요일이라고 반대하여 5월 10일로 바뀌었다. 3월 1일 이승만 등 단정운동세력은 3·1기념행사에 뒤이어 정부수립결정안 축하국민대회를 열었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대하여 김구와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다. 김구는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는 것은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에 선고함이나 다름없다고 토로하고, 자신은 남의 단선도, 북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3·1독립선언기념 별개 행사에서 남의 선거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김규식은 침통한 표정으로 남의 선거에는 불참하겠지만, 반대는 하지 않겠다고 하여 ‘불참가 불반대’를 표명하였다. 현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선거 참여의 길을 터놓은 것이었다.

 김규식은 ‘불참가 불반대’를 표명하였지만, 통일운동은 계속 벌일 각오임을 밝혔다. 선거 참여와 통일운동을 대립적으로만 보지 않은 것에서 유연성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선거 참여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고, 국회의원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갖는 이점을 알고 있었다. 비록 단결의 필요성과 명분론에 눌려 5·10선거에 민련 관계자들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1950년의 5·30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며,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김규식의 ‘불참가 불반대’ 표명이 있은 다음 날 언론은 그가 새로운 단계의 국민운동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하였다.423)≪서울신문≫, 1948년 2월 29일.
≪조선일보≫, 1948년 2월 29일(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422쪽).
김규식은 3·1운동기념사에서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것을 역설하였다. 3월 2일 김구·김규식·홍명희는 회동하여 행동통일문제를 숙의하였다. 3월 11일 남북협상으로 가는 또 하나의 다리가 놓여졌다. 김구·김규식·金昌淑·趙素昻·曺成煥·趙琬九·홍명희 등의 ‘7거두성명’이 나온 것이다. 7인의 원로는 이 성명에서 남의 총선과 북의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을 강경히 반대하였다. 특히 이 성명에서는 두 정부로의 분립은 반드시 동족상잔의 민족적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누누이 지적하였다.

 7거두성명은 통일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구·김규식·홍명희의 걸음이 바빠졌다. 민련과 한독당은 통일운동전선체의 결성을 위한 작업을 벌여나갔다. 3월 23일 민련에서 단선단정과 외국군 주둔을 반대하면서 애국세력의 총집결운동을 강력히 추진하고, 남북정치협상공작의 추진에 노력하겠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한 것은 통일운동전선체 구성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런데 이틀 후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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