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2) 북의 연석회의 제안

(2) 북의 연석회의 제안

 평양방송은 3월 25일 밤, 이날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가 유엔소총회 결의와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 것을 결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북민전은 북로당 등 9개 정당·사회단체 명의로 연석회의에 참가할 남의 정당·사회단체 17개를 거명하고, “기타 모든 단체를 초청한다”라고 덧붙였다. 17개 정당·사회단체에는 한독당 등 우익계나 근민당 등 중도파 정당 5개도 들어가 있지만, 11개가 좌파로 분류될 수 있었다. 또한 3월 27일 겉봉에 ‘김구·김규식 兩位先生 共鑑’이라고 쓰여 있는 서한이 김규식에게 도착하였다.424)송남헌, 앞의 글, 209쪽. 김일성·김두봉이 연서한 이 서한은 25일로 되어 있는데,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시키었습니다”라고 김구·김규식을 질책하는 등 여러 군데서 두 사람을 비난한 것이 눈에 띈다. 이 서한에서는 4월 초에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소집할 것을 제안하고, 그 회의에 참여할 명단과 토의할 내용을 기술하였다. 명단에는 남쪽 인사 15명, 북쪽 인사 5명이 들어있는데, 김구·김규식·조소앙·홍명희·金朋濬·이극로를 제외하면 모두 좌익계인 것이 특색이다. 이 서한은 자신들의 제안에 동의할 때에는 3월 말일까지 통지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425)김일성·김두봉 서한 전문은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서울대 출판부, 1997), 367∼369쪽에 수록되어 있다.

 북은 왜 3월 25일에야 반응을 보인 것일까. 최근에 나온 북의 한 저서에는 김일성이 1947년 10월 3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서 남북조선의 애국세력의 단결로 미제국주의의 민족분열책동을 파탄시키고 통일적인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북조선정당·대중단체 대표가 한 자리에 모일 것을 제안하였고, 1948년 초부터 남북연석회의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고 쓰여 있다.426)金昌鎬·姜根照,≪朝鮮通史≫하(평양:外國文出版社, 1996), 46∼47쪽.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새로운 자료가 나와야 할 것이다. 김구 등의 초청문제를 1948년 1월이나 또는 그 이전에 논의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은 ‘진지한’ 수준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3월 중순에도 김일성은 김구 초청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북에서 소련의 정책을 수행하는데, 쉬티코프 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레베데프(Лебедев Н. Г.)소장은 3월 10일자 비망록에서 김구·김규식의 서한과 관련하여 김일성한테 “김구에게 답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묻자 김일성이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아무런 수확이 없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것으로 기술하였다.427)<레베데프비망록>17(≪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 3월 12일자<레베데프비망록>에는 이날 김두봉이 김일성에게 전화하여 김구에게 확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자 김일성은 “국가적 사업은 한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라고 답변한 것으로 쓰여 있다. 남북지도자회의에 성의를 가진 것은 김두봉이었다. 그는 이날 김일성에게 무엇 때문에 항상 김구를 욕하느냐고 말하고, 김구가 단독선거에 찬성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빨리 만나야 된다고 강조하였다.428)<레베데프비망록>17(≪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 김두봉은 김구·김규식이 평양에 왔을 때도 남북요인회담 등에 적극적이어서 소련당국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레베데프비망록>에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3월 17일부터 검토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이 비망록 3월 24일자에는 연석회의 대회일정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429)<레베데프비망록>17·18(≪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14일).

 북이 연석회의 소집을 결정한 것은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의해 남한선거가 정해지고, 미군정에 의해 선거일정이 구체적으로 잡혀졌기 때문이었다. 북에서는 1947년 12월 작성된 임시헌법초안이 1948년 2월 6·7일에 열린 인민회의에 제출되어, 2월 11일부터 4월 25일까지 전인민토의에 부쳐졌다. 또한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다. 북과 소련은<레베데프비망록>1월 14일자 기록에 쓰여 있는대로, 당분간 헌법시행을 보류하고 미국측의 분단계획을 폭로하며, 신헌법에 의한 선거는 남보다 늦게 실시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430)尹慶燮,<1948년 북한헌법의 제정 배경과 그 성립>(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96), 84쪽. 그런데 3월 17일 미군정이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하여 선거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자 이것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연석회의가 3월 25일 제안된 것이다. 북은 처음에는 연석회의를 남의 단선단정 반대에만 연결시켜 열려고 하였으나, 점차로 그것이 북의 정부수립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남쪽의 김구·김규식 등 남북협상세력은 북의 제의에 대하여 크게 고민하였다. 김구·김규식한테 보낸 서한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북이 일방적으로 장소와 일시를 잡았고, 참가단체나 인물도 좌익이 많아서 통일 방안을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향으로 합의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북의 연석회의 제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도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북이 통지해줄 것을 요구한 날짜인 3월 31일 김구와 김규식은<感想>이라고 하여 제목이 대단히 시니컬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두 김은 북의 제의가 미리 다 준비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자신들이 남북회담을 요구한 이상 여하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회의에 참가할 범위를 넓힐 것을 요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상의하기 위하여 연락원을 보내겠다고 통고하였다.

 한편 북의 제의 이전에 통일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모종의 조직을 추진하였던 민련·한독당·독립노동당 간부들은 3월 26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회를 갖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4월 3일 한독당·민독당 등 백여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하여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대회를 열고, 강령으로 ①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집결을 기함, ②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圖함, ③민족 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 등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 대회에서 김규식은 전례없는 열변으로 조국의 위기를 통탄하며 비장한 소신을 피력하여 주목을 받았다.431)≪조선일보≫·≪경향신문≫, 1948년 4월 6일(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713∼715쪽).

 김구·김규식은 安重根의 4촌인 安敬根과 민련 비서인 權泰陽을 북에 보냈다. 두 사람은 4월 7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밤 김일성·김두봉을 만나 ①4·14회담을 연기할 것, ②참가인원을 광범위하게 할 것, ③이번 회담에서는 북의 제안을 백지로 환원하여 남북통일문제에 한해서만 협의할 것 등을 제안하였던 바, 북의 두 김은 이 제안을 전적으로 수락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4월 13일 京橋莊회의에서 김구는 북행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김규식은 행동을 보류하고 추후로 떠나겠다고 표명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김규식은 무조건 북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북에 이용당해서도 안되지만, 남북지도자회의는 구체적인 통일의 원칙이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남북회의 참여조건으로 평양회담을 예비회담으로 하고 본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북에서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남의 200명의 대표와 회합할 것 등 6개항을 마련하였다.432)도진순,≪1945∼48년 우익의 동향과 민족통일정부수립운동≫(서울대 박사논문, 1993), 213∼214쪽. 4월 14일 민련은 정치·상무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6개항을 ①독재정치 배격, ②독점자본주의를 배격하되 사유재산제도 인정, ③전국적 총선거로 통일중앙정부 수립, ④외국에 군사기지 제공하지 말 것, ⑤외군 조속 철퇴에 관하여 철퇴 조건·방법·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등의 5개항으로 수정하였다. 김규식의 6개항은 북에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5개항은 해석이 문제도 되지만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날 문화인 108명이<남북협상을 성원함>이란 글을 발표하여 남북협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데 김규식은 북에 보낼 ‘특사’를 5개항에 합의한 14일이나, 민련에서 북에 보낼 대표로 김규식 등 18명을 선출한 15일에 보내지 않고 18일이 되어서야 파견하였다. 그것은 명백히 19일부터 열릴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무시하려는 조치였다. 김구는 이미 4월 15일 기자들과 함께 만찬회를 갖고 북행을 앞둔 심경을 토로한 바가 있었고, 이날 신문은 김구·홍명희 일행의 출발 준비가 완료되어 늦어도 연석회의 개최 전날인 18일까지는 북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하였는데, 김구가 19일에야 떠난 것은 김규식의 의중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김구와 일부 한독당 인사들은 경교장을 에워싼 극우청년·학생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경교장 뒷문을 통해 북으로 갔다. 홍명희도 이날 북행하였다. 다음 날 조소앙 등 한독당 인사와 일부 민련 인사가 북으로 떠났다. 김규식은 4월 19일 밤 10시 평양방송으로 김일성이 5개항을 수락하였다는 의미의 메시지를 받았으나, 21일에 남북정치지도자회의에 5개 원칙을 제시하겠다고 천명하고 그것을 공개하였다. 그는 이날에야 민련의 주력부대와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이날 정오를 기해 남북지도자회의 참가자들의 북위 38도선 월경이 금지되었다.433)≪동아일보≫, 1948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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