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3) 연석회의와 남북협상

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두봉의 사회로 연석회의예비회의가 남과 북의 좌익 및 중도좌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의에 김일성은 ①미제의 앞잡이인 유엔조선위원단을 몰아내고 유엔총회 및 소총회의 결의를 무효로 돌릴 것, ②단선단정을 반대할 것, ③미·소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를 실현시킬 것, ④양군 철수 후 선거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 4개항을 회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이날 본회의는 오후 6시에 46개 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주석단 등을 선출하고, 정치정세 및 남의 단선단정 반대투쟁 대책을 회의 안건으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김구 일행의 북행 소식을 듣고 김일성의 제의로 20일은 휴회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구는 4월 20일 김두봉의 내방을 받고 그의 안내로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있는 김일성을 예방하였다. 이 회동에서 김일성은 김구의 연석회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연석회의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밝히고, 계획대로 회의를 하되 자신은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하고 싶다고 역설하였다. 김구는 북의 헌법이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다음 날에도 김구가 연석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34)<레베데프비망록>21(≪매일신문≫, 1995년 2월 21일).

 4월 21일 朱寧河가 연석회의 대표자 자격심사위원회 보고를 한 뒤, 김일성이<북조선 정치정세>를,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白南雲이<남조선의 현정치정세>를,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이<남조선 정치정세>를 보고하였다. 모두다 단선단정을 철저히 파탄시키고 외군을 즉시 동시 철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투쟁의 결의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김구는 4월 21일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평양 신문기자단 회견에서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피력하고, 우리의 갈 길은 민족자결정신에 의하여 독립문제를 완성하자는 것뿐이며, 전 민족의 운명을 걸고 평양모임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435)≪조선일보≫, 1948년 4월 22일(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821∼822쪽).

 4월 22일 연석회의는 백남운의 사회로 토론에 들어갔다. 상오 12시 45분에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김구·조소앙·조완구 등이 참석하였다. 김일성의 제의로 김구·조소앙·조완구·홍명희 등 4명이 주석단에 보선되었고, 김구와 조소앙·홍명희가 축사를 하였다. 김구는 약 5분간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大計를 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자고 호소하였다.436)白凡思想硏究所編,≪白凡語錄≫(思想社, 1973), 263∼264쪽. 김구가 말한 단선단정 반대는 북의 그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으로, 崔成福특파원이 연석회의가 협동적·평등적으로 되지 않은 점을 묻자 “나도 그 점이 우려되오. 아무튼 나는 남조선 단정단선도 반대려니와, 북조선의 그것도 반대이고, 한 번에 안 되면 몇 번이고 이야기해 볼 작정이오”라고 말한 것에서437)최성복,<평양 남북협상의 인상>(≪新天地≫, 1948년 4월호), 67쪽. 확인할 수 있다. 김구 등의 축사·토론과 혁명유가족학생들의 축하가 있은 후 홍명희·嚴恒燮을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하였고, 이어서 또 토론이 있었다. 토론에서는 내정된 대표들이 대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규식은 22일 오전 11시경 김일성·김두봉의 예방을 받았다. 김두봉은 연희전문학교에서 김규식한테서 배웠다. 김규식은 미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항의하고 소회의(요인회담 등을 가리킴-필자)를 시작하자고 제의하였다.438)<레베데프비망록>22(≪매일신문≫, 1995년 2월 13일). 김규식은 칭병을 하고 연석회의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

 4월 23일은 金元鳳의 사회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여성대표들의 축하가 있은 뒤, 결정서 기초위원을 대표하여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가<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를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민련의 이극로는<전 조선동포들에게 격함>을 읽었고, 그와 함께<사회주의 쏘베트연방공화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에 보내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의 요청서>도 채택되었다.

 북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56개 정당·사회단체가 서명한<전 조선동포들에게 격함>에서는 미국을 또다시 식민지노예로 얽어매려는 국가로 규정하면서, ‘미제국주의자’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격렬히 비난하고, “남북을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열하는 어떠한 단독정부의 수립도 단연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439)≪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報告文及決定書≫, 41∼46쪽(金南植·李庭植·韓洪九 편,≪한국현대사자료총서≫13, 돌베개, 1986, 299∼301쪽). 미·소 두 나라 정부에 보낸<요청서>에서는 “유엔조선위원단의 非法的이며 강압적인 부당한 선거술책을 즉시 정지시키고 급히 물러가게 할 것을 요구”하고, “조선 내에서 외국군대를 철거하고 조선인민에게 자기 손으로 자기 국내 문제를 해결할 권리를 주자는 소련정부의 제의를 실천”하는 길만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요청서>에 서명한 정당 관계자가 당대표와 다른 경우를 볼 수 있어 관심을 끈다. 곧 북조선노동당(대표 김두봉)은 주영하가, 남조선노동당(대표 허헌)은 박헌영이, 한국독립당(대표 김구)은 엄항섭이, 민족자주연맹(대표 김규식)은 송남헌이 서명을 한 것이다.440)도진순, 앞의 책, 270쪽.<요청서>에 서명한 정당·사회단체 이름은 이 책의 388∼389쪽 참조.

 연석회의의 결산으로 나온 문서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명의로 나온<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이다. 이 문서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의 음흉한 背族亡國的 시도를 반대하며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기만적 단선 희극을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조선 인민들의 反抗을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米제국주의자들에게 예속시키는 것을 容許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들은 자기의 전 역량을 총집결하여 단독선거배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조선인민이 자기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報告文及決定書≫, 38∼39쪽;金南植·李庭植·韓洪九 편,≪한국현대사자료총서≫13, 돌베개, 1986, 297∼298쪽).

 23일로 연석회의를 마치고, 25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경축 군중대회를 가졌다. 오후에는 북조선인민회의회의실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을 위한 김일성 인민위원회위원장의 초대연이 있었다. 26일에는<전 조선동포들에게 격함>에 쓰여 있는 대로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위원장 허헌)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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