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2) 농지개혁과 식량공출
  • (2) 식량공출

가. 해방 직후의 식량 사정과 미곡 자유시장정책

 해방 직후 남한의 식량 사정은 해외동포의 귀환과 월남동포의 증대 및 일제하에서 억제되었던 소비수요의 폭발이라는 수요측 요인과 생산부진과 같은 공급측 요인으로 인해 크게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초기에 미곡의 자유거래를 용인하였으나, 그 부작용 때문에 다시 식량공출제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표 4>에서 보듯이 남한 인구는 해방 전에 비해 대략 230만 명 즉 13% 이상이 증대하였다. 또한 0.77석까지 증대되었던 1인당 미곡소비량이 2차대전 말기에는 0.558석으로 하락하였는데,508)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Ⅰ부-238쪽. 이렇게 강제로 위축되었던 미곡소비가 해방을 맞이하여 다시 회복됨으로써 수급 사정을 악화시킨 것이다.

국 적 1942년 12월 1944년 5월 1946년 8월
조선인 16,876,745명 16,565,317명 19,369,270명
일본인 490,204명 462,507명 미상
기타 외국인 14,274명 12,648명 미상

<표 4>남한 인구의 추이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Ⅰ부-3쪽.

 그런데 미곡생산은 1942∼1944년 평균이 1,372만 석이었는데 반해 1945년엔 1,284만 석, 1946년엔 1,205만 석으로 크게 부진하였다. 하곡생산도 해방전 3년간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부진 실태는 해방 후의 통계 미비로 인한 착오 탓도 있을 수 있으나, 비료 부족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량 부족을 메우기 위해 미군정은 1946년 5월부터 밀가루 등의 구호양곡을 도입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진주 초기에 한국의 식량수급구조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여 커다란 혼선을 빚었다. 즉 미군정은 일제하의 식량공출에 시달려 온 농민을 배려하고 시장메커니즘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1945년 10월 5일 소작료 3·1제를 공포함과 더불어 미곡의 자유거래를 제한하던 일체의 법령을 폐지하였다. 다만 갑작스런 米價 폭락을 방지하기 위해 최저가격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미가는 계속 폭등하고 시장질서는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최저가격제는 무용지물이 되고 미군정은 식량자유화 이후 2주 만에 식량통제의 실시를 거론하였고, 12월에 들어서 미곡의 최고가격을 지정하였다. 하지만 최고가격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오히려 미곡의 시장출하가 부진해지고 매점매석이 성행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도시 소시민 등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물자부족 상황과 지주-소작인의 전근대적 관계가 시장원리의 작동을 저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여 이와 같은 미군정의 정책오류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마침내 1946년 1월<미곡수집령>을 공포하여 미곡자유시장을 폐지하고, 1945년산 식량에 대한 수집과 배급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력 발동을 위해 1946년 5월에<경제통제령>을 제정하였다. 이 식량공출제는 그 내용상의 부분적 변경은 있었으나 1950년 5월의<양곡관리법>제정까지는 어쨌든 지속된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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