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3) 공업생산의 소장과 귀속사업체 처리
  • (1) 공업생산의 소장

가. 위축실태와 그 원인

 미군정기 경제 혼란의 두드러진 양상으로 누구나 지적하는 것이 공업생산의 消長이다.<표 6>에서 보듯이 8·15 이후의 공업생산 위축률은 대략 40∼75%로 추정된다.511)미군정의 생산통계가 전체 공장을 포괄하지는 못하였고, 2차대전 말기에 이미 생산애로가 나타났으므로 미군정기 공업위축으로 표현되는 것은 실제보다는 과장되어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8·15 이후 공업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 자체가 부인될 수는 없다. 이러한 위축은 한국전쟁에 의한 막심한 피해로 더욱 가중되어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1930년대 후반의 광공업 생산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512)溝口敏行,≪台灣·朝鮮の經濟成長≫(岩波書店, 1975), 100쪽.

 그리하여 미군정기의 공업 위축은 귀환·월남동포의 대거유입과 더불어 실업자 홍수사태를 발생시키고 물자부족과 저임금을 초래하여 민중생활을 압박하였으며 정치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공업생산이 급격하게 위축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한편으로는 식민지 공업화의 모순 즉 일제하의 공업화가 자본·기술·시장면에서 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8·15 이후 우리 민족이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외세에 분단·점령당했다는 점이다.

  일제 말 미군정기 감소율
생산액¹(천圓) 533,194 136,984 75%
사업체²(개) 10,695 4,500 56%
노무자²(명) 225,393 133,970 41%

<표 6>미군정기 공업의 생산액·사업체·노무자 감소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Ⅰ부-102쪽;조선통신사,≪조선경제통계요람≫(1949), 75쪽.
 1. 생산액의 경우 일제 말은 1939년, 미군정기는 1946년의 수치로서 1939년 가격으로 환산한 것임.
 2. 사업체와 노무자의 경우 일제 말은 1943년 6월의 수치이며, 미군정기는 1947년 3월의 수치임.

 물론 2차대전 이후 생산 위축은 일본·이탈리아 등 많은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공업 위축에는 구체적으로는<표 7>에서 보듯이 우선 원자재 부족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고, 1948년 5월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이 중단된 이후엔 전력문제도 커다란 애로사항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요인들은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다시 정리해 볼 수 있다.

  원료부족 기계부족 자본부족 노무부족 기타 합계
휴업체수 272 36 20 1 61 390
비율(%) 70 9 5 - 16 100

<표 7>사업장 휴업 원인(1946년 11월)

남조선과도정부 중앙경제위원회,≪남조선산업노무력及임금조사≫(1948), 94쪽.
 총공장 5,249개를 대상으로 한 조사임.

 첫째로, 8·15 이후 원자재의 결핍, 기계설비의 대체 곤란, 자금의 부족은 일제하의 공업화가 내포하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조선의 공업화가 자생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일제 자본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경제관계가 단절되자 조선의 공업시설들은 당연히 제대로 가동될 수 없었다.

 일제하 기계제품 자급률은<표 8>에서 보듯이 현저하게 낮았으며, 조선경제의 수입의존도는 30%에 달할 만큼 높았다. 기술면에서도 전체 기술자 중 일본인 기술자가 약 80%나 되었으며 얼마 안 되는 조선인 기술자는 하급직이었다. 또한 식민지 공업화의 주요 부분은 군수공업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군수품 수요가 사라지자 이 공장들이 새로이 평화용으로 전환할 때까지는 공장가동이 곤란하였다.

품목 자급률(%)
汽罐 및 기관부속품
원동기
공작기계
제조가공용 기계
철도 기관차
시계·학술품·전신기
차량·선박·자동차 및 부속품
3.7
7.1
0
19.6
0
6.2
29.5

<표 8>주요 기계기구의 국내 자급률(1940년)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Ⅰ부-101쪽.

 둘째로, 남북한의 분단은 조선의 생산력을 둘로 쪼개었을 뿐 아니라 그 둘이 갖고 있던 다소간의 상호보완성마저 박탈함으로써 각각의 생산력을 크게 감퇴시켰다. 주로 북쪽에 주요 광물자원과 전력이 편중되어 있었으므로 분단은 남쪽의 공업화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셋째로, 미군정의 정책상 문제점도 미군정기의 공업 위축을 초래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정책은 ‘세계 자본주의의 유지와 재편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유지란 방어적인 차원의 정책으로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팽창과 제3세계 민족혁명의 발발을 저지하는 것이고, 세계 자본주의의 재편성이란 적극적으로 2차대전 이전에 존재했던 제국주의세력들의 블록경제를 타파하고 초강국 미국이 자국산업의 우월한 경쟁력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이었다.513)이에 대해선 J. Kolko & G. Kolko,<The Limits of Power>(≪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11쪽 참조.

 미군정은 미국의 이러한 세계 재편전략에 부응하여 한국에 자본주의질서를 재정비하고 급진적 세력을 억압하며 나아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한국경제의 재건이나 성장에는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 발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안정 유지나 약간의 경제개혁 실시에 머물렀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군정당국은 일본인이 기계시설이나 원료 재고를 멋대로 방매하는 것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으며,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켜 공장을 계속 가동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귀속공장의 운영에서도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을 부정하고 관리인을 임명하였는데 관리인의 부정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였고 공장재건보다는 그저 노동자 통제를 물리친 데만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상당량의 소비재 원조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정작 공업 재건에 필요한 원자재나 기계류의 제공에서는 인색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