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1) 문학
  • (2) 해방공간의 시

(2) 해방공간의 시

 해방공간은 해방의 벅찬 환희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밝은 목소리가 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이어 해방과 함께 부여된 세 과제, 곧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의 수립, 친일잔재의 청산, 토지개혁을 둘러싼 정치투쟁에 휩쓸려 그 같은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디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석정,<꽃덤풀>,≪신문학≫, 1946년 3월, 128∼129쪽).

 목가적 공간 속에 유토피아를 향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내던, 그 점에서 근본주의자였던 辛夕汀의<꽃덤풀>이다. 이 작품은 ‘조선문학자전국대회’(1946. 2. 8∼9)에서 낭송되었다. 아직 완전한 해방은 오지 않았다는 현실 인식 위에 서서 투쟁을 선동하는 이 강력한 정치성의 시 한 편에 해방공간 시문학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꿈과 의지의 문학정신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며 어기차게 앞길을 열어나가는 동력을 내부에 지니고 있으니, 당대인들은 그것을 혁명적 로맨티시즘이라 불러 기렸다. 李庸岳·兪鎭午·배인철·吳章煥·林和 등이 여기에 속하는 시인들이다.

 해방공간의 급박한 역사 전개와 함께 혁명적 정치성의 시가 늠실대며 흐르는 이 정치의 시절에도 자연의 순환과 호흡을 함께 하는 서정이 꽃피어 거센 세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무하였다.≪文章≫지를 통해 해방 전에 등단한 趙芝薰·朴斗鎭·朴木月 세 사람의 합동시집≪靑鹿集≫(1946)이 대표적이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靑노루>,≪청록집≫, 1946년 6월).

 ‘느릅나무 속잎 피는’이라는 시구 속에 담긴 신생의 기운은 이제 곧,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 천지를 가득 채울 것이다. 무릇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피 속으로 맥박 속으로도 스며들어 그것들을 새로운 존재로 서게 할 것이다. 이 시구에는 그런 기운의 움직임도 이미 들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듯하지만 안으로 생동하는 생명의 약동을 감지하고 드러내었다. ‘靜中動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갈등과 대립의 핏빛 하늘 아래 청청하게 빛났다.

 해방은 신석정이<꽃덤풀>에서 노래했던 ‘영영 잃어버린 벗’들을 되살려내기도 하였다.<洛東江>(1927)을 마지막으로 소련 망명의 길에 올라 소련의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해 복무했으나, 스탈린의 소수 민족 이주정책에 맞섰다가 처형당한 趙明熙의 작품집≪낙동강≫(1946)이 출간되었으며, 후쿠오카 감옥에서 원통하게 죽은 尹東柱의 순결한 고뇌를 담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간행되었다. 철저한 자기반성의 정신, 주체적 삶에 대한 다짐의 태도, 식민본국에서 공부하는 식민지 청년의 고뇌, 사랑하는 존재들을 향하는 안타까운 그리움 등을 담고 있는 윤동주의 유고시집은 식민 압제의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新生의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혼탁한 해방공간을 맑게 정화시키는 힘을 지닌 것이었다.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감옥에서 순사한 李陸史의≪陸史 詩集≫(1946)도 간행되었고, 요절한 李相和의≪相和 詩集≫(1946)도 빛을 보게 되었다. 의열단원으로서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던 육사의 웅장하고 단호한 실천적 목소리와,≪白潮≫시절의 감상적 낭만주의의 늪을 지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세계로 나아갔던 이상화의 열정적 목소리는 새로운 출발선에 선 우리 시의 지표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시기에 徐廷柱의≪歸蜀途≫(1948)가 발간되었다.<自畵像>·<逆旅>등에서 자신만의 길을 자신의 힘으로 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던 서정주의 젊은 패기와 열정이 이후 어떻게 굽이치며 스스로를 열어 갔던가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근대적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단계로 나온 당대 한국사회에서 서정주의 전근대주의적 정신은 자못 이채로웠는데, 그가 마찬가지로 전근대주의자인 김동리와 나란히 한동안 문단을 이끌게 되는 것은 이 점에서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멀리 북만주로 떠났던(1940) 柳致環도 돌아와 절망과 자학의 만주 시절을 담은 작품들과 해방 후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작품들을 묶은≪生命의 書≫(1947)를 펴냈다. 장년 유치환의 깊은 자기 응시의 세계는 청년 윤동주의 치열한 자기 응시의 세계와 나란히, 오로지 외부를 향한 정신의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던 해방공간의 시단을 반성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鄭豪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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