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2) 미술
  • (1) 해방공간과 미술단체

(1) 해방공간과 미술단체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면서 발빠르게 전체 문화예술인의 집결체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발족되었다. 그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조직되고 중앙위원장에 高羲東이 추대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미술인 조직으로 재정비하여 출발한 것이 조선미술협회였다. 조선미술협회의 출범에 불만을 품고 탈퇴한 좌익계 미술인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을 조직하였으니 해방 직후 난립한 정치·사회단체의 일면을 보는 느낌이다. 조국 해방의 감격과 새 시대 미술의 건설이라는 벅찬 과제를 앞에 두고도 정치색과 이해관계가 얽힌 단체의 이합집산 양상은 극심해져만 갔다. 1945년 10월 전체 미술인이 참여한 해방기념문화축전 미술전이 그나마 해방 이후 구체적인 미술인 활동으로 꼽힐 뿐 그 외는 단체의 조직과 해체, 재구성 등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반영하는 현상들로 이어지고 있다. 해방기념 미술전에 출품된 작품은 한결같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내용이나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이미 제작되었던 것의 출품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 결정이 알려지자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계열과 반대하는 민족진영의 대결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잇달아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가 결렬되면서 남한사회는 좌익과 미군정의 대립으로 사회적 불안이 일층 증대되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과 연이은 각종 파업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와 같은 사회적 갈등은 미술계의 이합집산 현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모체가 되어 출범한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부 회원이 일부 간부들의 정치적 노선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여기서 이탈한 40여 명의 미술가들이 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의 일부 미술가들과 결탁하여 조직한 것이 조선미술가동맹이었다. 그런가하면 조선미술가협회 결성에서 탈락한 일부 미술가들이 무소속의 미술가들과 회동하여 출범시킨 것이 조선조형예술동맹이었으며, 또 다른 조선미술가협회 제외 미술가들이 만든 것이 독립미술가협회였다. 이로써 미술단체의 출범은 조형이념에 의한 결속체이기보다 정치색이 짙은 것이거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 12월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이 합동전을 가지면서 통합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조선조형미술동맹이었다. 이로써 좌우를 대표하는 조선미술협회와 조선조형미술동맹의 대립구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 미술가가 털어놓은 다음과 같은 비탄 어린 언급은 당시 미술계 사정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치성과 사상을 통하여 예술창작의 의욕이 어떤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생명으로 삼을 예술가들이 협회·연맹·동맹 등의 파당을 형성하고 중상·분열·모략을 일삼으며 자파의 입장과 공격을 예술행동보다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조선 예술가의 타락과 몰락을 가져올지언정 진보는 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상아탑적 예술지상주의를 찬미하는 자도 아니며 그와 동시에 창작의욕을 정치성이나 사상성·당파성으로 짓밟아 버려 앞날에 올 새로운 예술의 싹을 무찔러 버리는 예술의 정치적 선전 도구성에도 만족하는 자가 아니다. 천언만구의 이론보다 한 장의 스케치로써 그 화가의 예술의욕은 가장 뚜렷이 증명될 것이다(송정훈,<예술창작의 의욕-앙데팡당미전을 열면서>,≪경향신문≫, 1947년 8월 17일).

 미술계의 분파에 환멸을 느낀 일부 미술가들이 순수한 창작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외치면서 발족시킨 것이 미술문화협회와 제작양화협회였다. 미술문화협회는 당시 대표적인 중견작가들의 모임이라는 데서 그 활동이 주목을 받았으나 1회전을 갖고는 해체되었다. 여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각광을 받았던 작가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金仁承·李仁星·孫應星·南寬·李揆祥·李鳳商·趙炳悳·朴泳善 등이 그들이다.

 이외에도 순수한 창작활동을 표방하고 나온 그룹으로 동양화의 檀丘美術院과 서양화의 新寫實派를 들 수 있다. 단구미술원은 일제 강점기를 통해 가장 오염이 심한 영역인 동양화에서의 왜색을 탈피하고 새로운 동양화를 정립하자는 취지를 내걸고 의욕적으로 출발하여 1946년과 47년 두 차례에 걸친 전시를 가졌다. 왕성한 창작욕을 보이고 있었던 중견작가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회화의 재정비와 정체성 추구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모았다. 참가 작가는 金永基·張遇聖·裵濂·李應魯·李惟台·趙重顯·張德이었다.

 1947년에 출범한 신사실파는 金煥基·劉永國·李揆祥의 세 사람으로 구성된 동인체였으나 이들이 해방 전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에 걸쳐 일본의 自由展에 출품한 모더니즘 제1세대라는 점에서 특기되고 있다. 여타의 그룹이 정치색이 짙지 않으면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던 점에 비추어 가장 순수한 조형이념의 결속체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해방 전에는 순수한 추상을 지향했던 이들은 해방과 더불어 다소의 개인적 경향차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데, 김환기·유영국이 자연적 이미지를 추상의 패턴에 굴절시키고 있음이 그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환기는 자연과 조선조 백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적 정서가 강한 모티브의 탐닉으로 기울었으며, 유영국은 산·바다와 같은 구체적인 자연의 명제를 빌리면서도 더욱 견고한 기하학적 형태로 진전되어 나갔다. 1948년 2회전에는 張旭鎭이 새로 가담하였으며 50년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53년 피난지 부산에서 3회전을 열고는 해체되었다.

 순수 창작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결의로 모인 미술문화협회나 제작양화협회도 한 두 차례 전시를 가졌을 뿐 지속되지 못했다. 여기에 참여하였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다시 결속한 것이 1950년의 미술협회였으나 이 역시 동란으로 인해 자동해체되고 말았다.

 특정 장르의 미술인 단체로는 1945년 조선산업미술협회(李完錫·李奉先·劉允相·嚴道晩·趙炳悳·趙龍植·韓弘澤 등)와 46년의 조선공예가협회(金在奭·姜菖園·白泰元 등), 그리고 46년의 조선상업미술가협회가 있다.

 해방공간에 기록되는 개인전으로는 남관展·金世湧展(1947년)·金斗煥展·李用雨展·白榮洙展(1948년)·김영기展·이응로展·千鏡子展(1949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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