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4) 연극·영화

4) 연극·영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땅에는 광복의 새날이 밝았다. 온 나라가 환희로 넘쳐 났지만 사회 전체는 혼돈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각종 정치·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속에 가장 빨리 간판을 내걸고 활동을 개시한 단체는 역시 문예단체였다. 즉 시인 林和가 주동이 된 조선문학건설본부가 해방 이튿날(8월 16일) 서울 한청빌딩에서 결성되었고, 뒤이어 연극건설본부·음악건설본부·미술건설본부·영화건설본부 등이 속속 간판을 내건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각 단체는 곧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약칭 文建)라는 연합체를 만들었고, 임화를 초대 서기장으로 삼아 조직 체계를 정비해갔다.

 일제시기에 활동했던 모든 연극단체들이 자동 와해된 후 처음 조직된 연극건설본부는 극작가 宋影을 중앙위원장으로 내세우고 실제적인 일은 金泰鎭·李曙鄕·咸世德·朴英鎬·金承久·羅雄·安英一 등 진보적 연극인들이 했으며 柳致眞·徐恒錫·金一影·金海松·尹富吉·朴九 등 연극계의 대표적 인물들을 본인의 허락 없이 포함시킨 것이 특징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연극건설본부가 식민지시기에 존재했던 조선연극문화협의회의 재판599)李海浪,<분열과 위축의 연극계>(≪民聲≫, 1949년 2월호).이었다는 비판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단체의 주동인물이 대부분 식민지시기에 프로극을 했던 연극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극작가 유치진 같은 경우는 일제 말엽에 어용극운동을 벌인 관계로 자숙하며 관망하고 있었다. 물론 해방 직후에는 좌우가 즉각 갈라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프롤레타리아극의 정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연극건설부의 조직으로 인해서 연극계가 조금씩 재편되어가기 시작했다. 가령 연극건설본부가 일제시기의 유산 청산을 내걸고 조직된 좌익성향의 인민극장·자유극장·청포도·一五劇場·둥지·혁명극장·서울예술극장·白花·조선예술극장 등 9개 극단을 산하에 두고 소위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펴 나간 것은 그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당초 이들이 지향했던 바는 종래의 저급한 대중극을 청산하고 민주주의 건설에 진력하는 것으로 국립극장·연극영화학교·연극연구소·잡지발간 등도 기획했었다.600)≪매일신보≫, 1948년 9월 19일. 그리고 부원들은 연합군 입성 환영공연 준비와 전재민 의연금 모금을 위하여 가두에 나서기도 했으며 새로운 연극건설에 장애가 되는 저질 상업극 견제를 위하여 각본 심의실 설치와 함께 연극 용어의 제정, 연극신문의 발간 등도 서두른 바 있다. 그러나 연극건설본부는 해방의 혼돈 속에서 급조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연극운동과 실천을 통해서 조직되지 못한 근본적 결함과 좌우익 연극인의 혼성으로 인한 동상이몽의 이질성 등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연극건설본부는 분열되어 유치진·徐恒錫 등은 칩거에 들어갔고 좌파 연극인들만 프로연극동맹 조직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좌파 연극인들도 프로연극동맹 조직론자와 조직무용론자, 그리고 인민연극론자 등으로 갈렸다. 조직론자들을 좌파라 했고 그 반대자들을 우파로 칭하면서 대립하기도 했다. 그런데 좌파의 주장은 하루빨리 조직체를 갖고 노동자·농민의 생활권 내에 침투하여 예술운동이 장차 남로당의 외곽단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우파는 오늘의 정세가 프로연극동맹을 조직하기에는 위험한 때인 만큼 속출하고 있는 극단들을 총망라해서 협의기관만 갖고 그 안에서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주장은 연극인들을 포섭하려면 중간단계로서 인민연극동맹으로 했다가 적당한 시기에 프로연극동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결국 좌파가 승리하여 9월 27일에 프로연극동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연출가 羅雄을 위원장으로 한 프로연극동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프로연극의 건설과 그 완성을 기한다. 둘째, 일제의 반연극과 싸운다. 셋째, 연극활동이 노동자·농민의 생활력과 투쟁력의 원천이 되기를 기한다는 것이었다.601)1기자,<프로예술진영의 재건>(≪건설≫제1권 제1호, 1947). 이들은 혁명극장 등 여러 극단을 산하로 끌어들여서 세를 확장하는 한편 남로당의 하수기관인 문화단체연맹의 산하로 들어갔다. 이들의 행동강령은 ①일본제국주의 잔재 소탕, ②봉건주의 잔재 소탕, ③국수주의 배격 등 정치색이 짙은 것이었다. 그만큼 정치선전극운동을 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주요 행동이 다름 아닌 찬탁운동이었다. 당초 연극인들은 1946년 1월 2일에 전국연극인대회(위원장 宋錫夏)를 열어서 신탁통치 철폐운동을 벌였었는데 이튿날 돌연 남로당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프로연극동맹도 찬탁으로 돌변, 우익 민족진영 연극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혁명극장 등 좌파단체들은 마르크스·레닌의 정치혁명극을 공연하면서 극장 내에서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공연 후에는 관객을 이끌고 가두시위까지 벌였다. 이러한 좌파연극이 해방 직후 연극계를 주도함으로써 우익 민족진영 연극을 압도해갔다.

 물론 우익진영의 연극인이나 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정치세력에 부화뇌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제로 이들이 연극공연을 하려고 해도 극장노동자들이 거의 다 좌익이었기 때문에 조직적 방해로 인해서 막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좌익극단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공연활동을 펴나갔다. 이들은 첫 번째 행사로서 1946년 3월에 제1회 3·1기념 연극공연대회를 개최했던 바 혁명극장 등 5개 단체가 朴英鎬 작<님>, 趙靈出 작<독립군>, 李雲芳 작<나라와 백성>, 金南天 작<3·1운동>, 朴露兒 작<3·1운동>등을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 즉 독립투쟁을 題材로 한 것이었다. 이들 좌익연극운동도 대체로 3단계를 거쳤다고 보는 견해(李載玄)가 있는데, 1945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7개월간이 제1기로서 민족극운동의 태동 발아기였다고 한다면, 1947년 8월까지의 1년 반 동안은 제2기로서 성장기였고, 1948년 8월까지의 1년 동안이 제3기로서 침체기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1947년 말부터는 공연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1947년 정월에 張澤相 경찰총감이 “예술을 빙자한 정치선전금지 조처”602)≪경향신문≫, 1947년 2월 3일.라는 것을 포고하여 정치선전에 열을 올리는 좌익연극인들에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좌파연극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그러자 당국은 3월 들어서 극렬 좌파연극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속에서도 그들은 함세덕 작<태박산맥>, 조영출 작<위대한 사랑>등을 갖고 예술극장 등 6개 단체가 합동공연을 가져서 1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남로당 계열의 사주를 받아서 조직적으로 동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작품들은 점차 대중을 잃어갔다. 대부분의 작품이 독립투쟁에서 벗어나 점차 유물변증법적 창작방식을 따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좌파 연극인들이 두 세 번에 걸쳐 월북한 바 있었고, 그로부터 좌익연극이 급속히 퇴락해 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프로연극동맹 산하에 있으면서도 좌파색채가 옅었던 자유극장만이 꾸준히 공연활동을 벌였을 뿐 대부분의 좌익극단들은 1947년 하반기에는 거의 소멸한 상태였다. 물론 자유극장 역시 1948년 8월 정부수립 직전에 해체되었다.

 이상과 같이 1945년 9월 27일에 결성된 좌익연극인들의 모임체인 프로연극동맹은 1947년 8월까지 만 2년여 동안 혁명극장·해방극장 등 10여 개의 좌파극단들을 앞세우고 때때로 남로당의 사주도 받아가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한 정치목적극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군정당국의 탄압까지 자초함으로써 결국 몰락의 길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좌파연극에 반대하는 우익진영 연극인들은 소극적으로 기회를 보고 있다가 1947년부터 본격적인 연극운동을 펴 나갔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극단 청춘극장이라든가 소극장운동을 모색한 극단전선 등이 있었지만 활동은 미미했다. 다만 당시 양대 상업극단이라 할 청춘극장(金春光 주도)과 황금좌(成光顯 주도)가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을 뿐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우익 민족진영 연극운동은 역시 1947년 초부터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47년 1월 말에 李海浪·金東園·李化三 등이 조선연극문화사라는 조직체를 출범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들은 유치진과 咸大勳을 고문으로, 자금을 댄 申鳳均을 회장, 李永健을 사장으로 해서 한국연예문화사로 이름을 바꿔 산하에 무용단과 극단 예술원을 두고 연극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첫 번째 활동은 프로연극동맹 주최의 제2회 3·1연극제에 유치진 작<조국>을 갖고 참가한 것이었다. 이 작품이 바로 극예술협회(약칭 劇協)창립공연으로 기록된다.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정신을 계승하고 좌익연극과 대항하여 민족극 수립을 표방, 동인제로 조직”된 극예술협회의 창립멤버는 이해랑·김동원·이화삼·朴商翊·金鮮英 등 5명이었고, 본격 리얼리즘극 창조가 기본 목표였다.

 극협은 연기진으로 金瀅植·趙百領·金英雲·趙美領·金福子·姜貞愛·韓聖女 등을 확보하고 제2회 공연으로 유치진 작<自鳴鼓>를 무대에 올려서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가 있었다. 극협은 1947년 한 해에만 앞의 두 작품 외에<麻衣太子>와<銀河水>등 4작품을 공연했는데 이들 역시 역사를 통해서 현실을 풍자하는 목적성의 주제를 골격으로 삼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익 민족진영 연극인들도 좌파 연극인들처럼 단합을 꾀해서 1947년 10월 29일에 전국연극예술협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나선 점이다. 민족진영 연극인들이 조직한 전국연극예술협회는 ①민주주의 원칙과 창조적 자유를 확보한다, ②일체의 사대사상을 배격한다, ③순수 연극문화를 수립한다, ④상업주의연극을 지양한다 등을 지향 목표로 내걸었다. 중견 극작가 유치진을 이사장으로 한 전국연극예술협회는 프로연극동맹에 대항하는 민족진영 연극인들의 결집체였으며 곧 한국무대예술원으로 개칭되어 극협을 비롯한 12개 극단을 산하에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연극발전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에 도전하고 저항해갔다.

 그 단적인 예가 정부의 세법 개정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48년 4월에는 산하 극단들로 총선거선전문화계몽대라는 것을 조직하고 전국에 파견하여, 5·10총선을 위한 연극 브나로드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선거유세반을 따라다니면서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선거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계몽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에는 외국의 한국정부 승인을 계기로 하여 전국무대예술인 궐기대회를 열고 민족정신 앙양과 침체된 무대예술 진흥을 꾀하기도 했다.

 이때 정부에 건의한 내용을 보면, 첫째 입장세 철폐, 둘째 외국영화의 무분별한 수입 문제, 셋째 문화행정과 공연수속 일원화, 넷째 무대예술의 질적 향상책, 다섯째 공연 資材획득에 관한 건, 여섯째 국립극장 조기 개설에 관한 건 등이었다.603)≪조선일보≫, 1949년 1월 29일.

 이러한 연극인들의 요구사항이 정부로부터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물론 국립극장 문제 등은 점진적으로 해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정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극단활동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대로 활기를 찾은 것은 저급한 상업극 단체들이라 할 수 있는 청춘극장과 황금좌, 그리고 KPK 등 십수 개의 악극단들뿐이었다.

 정통 리얼리즘을 목표로 하는 극협 등 신극단체들의 침체는 그들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령 극협만 하더라도 유치진의 시대극 일변도가 아니면 일제시기에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했던 번역극과 대중성 짙은 작품을 주로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특히 진지한 리얼리즘극을 회피한 것이 관중의 빈축을 산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신극 단체들이 본격 리얼리즘을 고의적으로 회피한 데는 프롤레타리아극 단체들의 어설픈 사회주의 리얼리즘 흉내에 대한 반발에 있었다. 이러한 리얼리즘 회피 행위는 우리나라 근대극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한국현대극의 발전을 더디게 하기도 했다.

 정통 신극단체들이 방황하는 동안 상업극단들은 저급한 작품들로 대중을 현혹했다. 동양극장의 레퍼토리나 劇術만도 못한 저질 작품들이 판을 쳤고 십수 개의 악극단들은 저질 공연을 더욱 부채질했다. 극단에 악단을 두고 가무로써 대중의 눈속임을 한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상업극단들은 대중의 정서 순화와는 정반대로 나아갔고 혼란한 사회를 외면케 하는 저질 오락물로써 대중의 호주머니만을 노렸던 것이다.

 한편 동양극장시기에 어느 정도 정립된 唱劇분야는 1940년대 초에 여러 단체들이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벌이다가 일제 말엽에는 거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상당수 단원들이 징용과 정신대 등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총독부의 통제가 역시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자마자 국악인들도 1945년 8월 19일 서울에 모두 모여 국악건설본부를 발족시킨 것이다. 국악건설본부는 10월 들어서 대한국악원을 창립시켰는데 초대원장은 咸和鎭이었다. 대한국악원에는 정악·속악 구별 없이 국악인 전체가 모였으므로 창극인만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악인들 상당수가 창극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서울에서 국악원이 창립되었다는 소식이 광주에 전해지면서 이들도 光州聲樂硏究會를 출범시켜서 1945년 10월 15일에 창극<대흥보전>(朴晃 각색)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서울로 올라와서 창극이 조금씩 활기를 찾게 되는 1946년에는 국악원 직속단체인 國劇社를 비롯하여 국극협회, 조선창극단, 金演洙창극단 등이 새로 조직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들 4개 창극단은 6월 초에 합동으로 국도극장에서<대춘향전>을 공연함으로써 해방 이후 창극활동의 방향성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창극단들의 활동도 의욕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체를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명창들은 우왕좌왕했고 국극협회같은 경우는 곧바로 해산됨으로써 젊은 단원이었던 朴厚星이 명창들을 이끌고 다시 광주로 내려가 國劇協團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에 있던 조선창극단은 일제시기 때 활동하던 멤버들이 이탈하고 새 멤버들이 가담하여 창작 창극<논개>·<왕자호동>등을 공연했고 김연수창극단은<장화홍련전>등을 무대에 올려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환희만큼 공연활동은 추진력이 없었다.

 그 결과 열성적인 여성 명창들이 각 창극단으로부터 이탈하여 1948년에 별도의 창극단체를 출범시켰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여성국악동호회였다. 명창 朴綠珠를 이사장으로 하여 金素姬·朴貴姬·林春鶯·鄭柳色·林柳鶯·金敬愛 등 중견 명창들과 신진 명창 등 30여 명이 모인 것이다. 이들은 곧바로 창립공연에 들어가서 10월에 시공관에서<옥중화>를 4일 동안 공연했으나 크게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이 제작 경험이 없었던 데다가 재정 역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류명창들의 여성국극의 탄생은 일본의 타라카츠카(寶塚)와 중국의 越劇과 함께 동아시아 3국의 독특한 여성극이 존재케 된 것이다.

 창립공연에서 낭패를 본 여성국악동호회는 재기를 위해서 이듬해(1949년) 2월 구정을 기해서 두 번째 공연으로<햇님달님>(金亞夫 각색)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크게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을 배경으로 애련한 아장의 가락에 맞춰진 무대는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극장은 연일 대만원이었고 온 장안이 여성국극으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햇님달님>은 창극사상 최고의 히트작이 될 정도로 특히 부녀층 관객을 동원했다. 이 작품이 크게 히트하자 지방도시에서 흥행사들이 몰려들어 너도나도 초청해갔다. 여성국악동호회의 충천하는 인기는 창극계의 기존 판도를 바꾸어 놓을 만큼 대단했다. 특히 여성국악동호회원들의 세련된 무용 솜씨까지 무대에 나타남으로써 일반 창극은 경쟁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여성국극은 단 1년여 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인기부상은 여성국악동호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즉 2년여 만에 분열되어 몇 개 여성국극단으로 다시 탄생된 것이다. 가령 여성국악동호회 햇님국극단이라든가, 몇몇 단체가 생길 즈음에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4월에 한국연극사상 처음으로 국립극장이 문을 연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극작가 유치진을 초대 극장장으로 삼아 개관된 국립극장은 총독부가 지은 부민관을 모체로 삼았고 극협을 중심으로 新協이라는 전속극단을 두기에 이르렀다. 극작가 이광래를 간사장으로 한 신협의 핵심멤버는 역시 이해랑·김동원·박상익·이화삼·김선영 등이었고 거기에 신인급 몇 명을 더 가담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국립극장이 개관 프로그램으로 유치진 작<元述郞>을 무대에 올리자 연일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제2회 공연<雷雨>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립극장의 개관기념공연 두 작품은 근대연극의 전기를 마련할 만큼 공전의 히트를 했고 일제의 탄압과 해방 직후의 혼란을 말끔히 씻어내고 당당하게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경우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은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해방과 함께 영화계도 소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인들의 움직임은 역시 1945년 8월 18일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이하 文建)에 한 발을 디디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문건을 시발점으로 해서 예술 각 장르의 건설본부가 생겨났는데 영화부문은 문건창립 하루 뒤에 李載明을 책임자로 해서 어설프나마 발족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건설본부는 특별한 활동 없이 한 달여를 지내다가 9월 24일 조선영화인총궐기대회를 치르면서 중진 문화인 尹白南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본격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604)김종원·정중헌,≪우리 영화 100년≫(현암사, 2001), 220쪽.

 이때의 주요 참여자들을 보면 대체로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촬영기사·녹음기사·제작자 등 상당수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곧 영화분야 역시 다른 분야처럼 좌우익으로 조금씩 갈리는 조짐을 보여주었다. 즉 그해 11월 초에 저명한 소설가 李箕永·韓雪野 등이 나서서 무산자의 계급적 해방을 목표로 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하 프로영맹)을 조직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영맹은 영화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주동자들이 영화인이 아닌 소설가들이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따라서 프로영맹은 곧바로 조선영화동맹(12월 16일)이 결성되면서 자동적으로 유야무야 되었다.

 조선영화동맹에는 전 영화인들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한국영화계의 결집체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安鍾和(위원장)·安夕影(부위원장) 등 영화계 인사들 대부분이 참여, 지방 조직까지 갖춘 바 있었다. 이들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서 영화대중화를 부르짖으면서 농어촌 순회상영의 영화반을 운영하는 한편 영화강좌도 개설했다. 그러나 그 활동은 미미했다. 다시 말해 영화제작 상영 등은 활발치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영화분야도 해방 직후 정치분위기에 휘말려서 다른 예술분야처럼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수준이었다. 당시 문화예술계에서 공통적으로 내건 구호는 ①일제잔재 청산, ②봉건주의 잔재 청산, ③국수주의 배격, ④진보적 민족영화의 건설, ⑤조선영화의 국제적 영화와의 제휴 등이었다.

 해방 직후의 영화계는 적어도 미군정청의<활동사진취제령>이 공포(1946년 4월 12일)되기 전까지 실제적 활동은 미약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일제 때 만든 법령이 유령처럼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군정청이 1946년 10월 8일에 영화상영 허가를 골자로 하는 군정청 법령 제115호를 공포함으로써 전 시대의 법적 잔재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金華가 그의 저서≪이야기 한국영화사≫에서 8·15해방의 영화사적 의미가 “전쟁 수행을 위한 일제 군국주의적 선전매체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오락을 표현하는 대중문화로서의 원래 기능을 되찾은 것”605)김화,≪이야기 한국영화사≫(하서출판사, 2001), 163쪽.이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사실 식민지시기의 영화 현실은 참담했었다. 영화는 다중을 상대로 하는 예술로서 대중성이 강하기 때문에 독재정치하에서는 통제를 많이 받게 되고 예술과는 정반대로 선전매체로써 악용되기 일쑤이다. 일제시기야말로 우리영화가 가장 굴절당한 경우였다. 따라서 영화인 일부는 체제에 영합했고 다른 일부는 영화계를 떠나 은둔했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모두 나와서 한국영화 발전을 도모케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기자재 부족이라든가 일인 소유였던 영화관 문제 같은 것이 앞에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져 상영되고 미국영화가 여러 편 들어와 상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극영화가 해방 직후에는 마치 연극이나 문학 등과 마찬가지로<安重根史記>(李龜永 감독)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항일독립투쟁을 묘사한 것이 주류였고 민주주의를 계몽하는 내용 그리고 밀수근절 등도 다뤘으며 애정물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8·15해방이란 것이 식민지시기에 대중선동과 교화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영화를 제 자리로 돌려놓고 그 기능과 위상을 회복하는 전환점도 된다.606)김종원·정중헌, 앞의 책, 223쪽. 따라서 해방 직후의 영화가 저항적인 주제를 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대표적인 영화가 다름 아닌 崔寅奎 감독의<자유만세>(全昌根 주연)라 말할 수 있다. 최인규 감독이<자유만세>로써 목적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래<죄없는 죄인>·<독립전야>라는 연속 3부작으로 해방 직후의 영화판도를 크게 그려놓기도 했다. 물론 최인규 감독 외에도 주목을 끌만한 독립투쟁기는 여러 편이 나왔다. 가령 尹逢春 감독의<윤봉길의사>및<3·1혁명기>라든가 全昌根 감독의<해방된 내 고향>등도 그런 계열 영화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멜로물도 적잖게 나왔는데 신파극본<검사와 여선생>(尹大龍 감독)을 비롯해서<그 얼굴>·<여인>등을 만든 전창근도 멜로물의 대가였다. 해방 직후에는 배우를 비롯한 신진 영화인들도 대거 등장했다. 趙美領·崔銀姬·黃貞順·朱曾女·崔芝愛 등 여류 신인들과 尹一逢·朱善泰·黃海·金雄 등 남성 배우들도 적지 않게 데뷔했다.

 그러나 역시 해방 직후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영화가 범람할 정도로 서양영화 일변도였다. 미군정 치하였기 때문에 미국영화를 주로 한 외국영화가 90%를 차지할 정도로 우리 영화계를 석권하다시피 한 것이다. 한국 영화계가 미국영화 중심의 외국영화판이 된 데는 미군정의 문화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우리 영화계의 기반 취약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기자재의 부실은 말할 것도 없고 취약한 자본과 함께 인재 부재가 더 큰 원인이었다. 일제시기에 羅雲奎와 같은 인재가 있었지만 그마저 요절했고 변변한 영화학교 하나 없었던 처지에서 인재가 양성될 리 만무했다. 더욱이 이 땅에서 영화가 시작되어 성장하기도 전에 모든 영화관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장악해서 착취했고 총독부는 탄압법을 만들어서 검열 등으로 우리 영화인들을 옥죄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영화에 재능있는 인재들이 나와서 우리 영화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은 우리 영화인들에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고, 영화인들은 의욕과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때에 또 미군정이 실시됨으로써 또다시 미국영화가 우리 영화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의 하나로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한국영화는 6·25전쟁을 겪고 나서야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柳敏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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