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1. 대한민국의 수립
  • 1) 단정노선의 확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
  •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과 남한단선 결정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과 남한단선 결정

 1947년 11월 14일자 유엔총회 결의안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창단되고, 회원 각국 대표들이 1948년 1월 8일 호주·인도·시리아대표를 필두로 1월 말까지 서울에 입경하게 된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당초의 9개국 중에서, 소련의 입장에 동조하여 위원단 참여를 거부한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8개국 대표로 구성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입경한 직후 3개의 분과위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1분과위원회는 선거를 위한 자유분위기 확보, 제2분과위원회는 선거에 대한 한국인들의 견해 청취, 제3분과위원회는 선거법 검토가 각각 그 임무였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초기 활동의 최대 관심사는 위원단의 활동이 전 한반도에 미치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위원단은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소련은 1월 22일 유엔 소련대표 그로미코를 통해 협조 거부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으로서는 1월 말에 이르러 남북한에 걸친 전국적 총선의 감시라는 당초의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졌음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사실상 소련의 거부는 유엔결의안 통과시점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자체를 반대했었고, 미국이 유엔에 제안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은 소련이 항상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왔던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유엔총회 결의안에 대해서 그것이 가결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힌 바 있었다. 이에 반해 유엔총회의 결의안이란 구속력이 없는 권고안에 불과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를 막기 위해 한국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니라 총회에 상정하였지만, 총회의 기능은 조사·토의 및 권고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걸린 주요 강대국의 협력을 받지 못할 때 총회 결의안의 실질적인 수행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이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지역에서 총회의 권고를 무력으로써 실행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음도 분명했다.619)구드리치, 위의 글, 384∼385쪽.
차상철, 앞의 책, 157쪽.

 따라서 유엔 감시하의 전국총선거란 사실상 남한 單選案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유엔총회가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전에 이미 소련이 유엔의 결정을 거부할 경우 남한에서만 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으며, 유엔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는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방문을 불허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38도선 이남의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다.620)FRUS, 1947, Vol. VI, p.853;FRUS, 1948, Vol. VI, pp.1082·1083·1087, 1099.
차상철, 위의 책, 177·181쪽.

 그러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만의 단선을 참관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까지는 국내 정치세력은 물론 유엔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내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야기되었다. 1948년 1월 말에 이르러 소련의 비협조로 북한 입국이 불가능하게 되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총회의 계획을 남한지역에서만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둘러싸고 ①위원단이 접근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단독의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입장과, ②그러한 조치는 한국의 분단을 영구화시킬 것이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그 위임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소총회에 알리고 앞으로의 지시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양분되었다. 전자는 미국의 對韓政策에 우호적인 중국·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대표들의 입장이었고, 후자는 시리아대표를 비롯하여 소위 영국블럭에 속한 호주·캐나다·인도대표들의 입장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는 남한내의 정치지도자들 역시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李承晩과 韓民黨세력은 적극적으로 남한단선을 주장하였지만, 金奎植 등의 중도파는 물론 金九 역시 유엔의 협조 아래 南北要人會談을 통해 전국총선거를 성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방안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내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당시 국민들로부터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621)2월 16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메논 의장은 유엔소총회에 문의할 내용으로 ①남한지역 선거와 정부수립, ②남한지역 선거와 협의 대상이 될 대표 선출, ③남북 조선의 지도자회담, ④유엔임시위원단의 철수 등을 제시했는데, 당시 한 신문 여론조사에 의하면 4가지 방안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단선·단정 11.5%, 단선 5%, 남북회담 71%, 위원단 철수 12.5% 등이었다.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211쪽.
이러한 분위기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결국 2월 6일, 찬성 4표, 반대 3표, 기권 1표로 한국문제를 소총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하였다.622)송선희,<유엔한국임시위원단:그 활동의 개요와 관계문서에 대한 해설>(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사자료집 2:유엔한국임시위원단관계문서Ⅱ≫, 1988), 5쪽.

 한국문제는 2월 19일부터 유엔소총회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K. P. S. Menon)은 한국내의 여론을 반영하여, 한국문제 해결의 방안으로서 ①남한지역 선거와 정부수립, ②위원단이 협의할 대표 선출을 위한 제한된 목적의 선거 실시, ③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조선의 지도자회담 등 3가지를 제시하였다. 캐나다와 호주대표가 계속 남한단선을 반대하자 미국은 모든 외교적 수단을 통해 다른 회원국의 입장을 미국안을 지지하도록 돌렸다. 미국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 유엔소총회는 2월 26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11월 14일 총회결의안에서 설정된 계획을 이행하는 것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부과된 의무”라는 결의안을 찬성 31표, 반대 2표, 기권 11표로 통과시켰다. 이는 남북총선을 통한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총회결의안의 내용을 남한단선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변화시킨, 결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소련과 그 지지국가들은 소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국인 호주와 캐나다는 끝까지 반대하였고, 중남미 3개국, 중동 5개국,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기권하였다. 한편 유엔소총회는, 남한이 경찰국가라는 비판 등을 고려하여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참관할 선거는 언론·출판, 그리고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자유분위기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조건을 부과하였다.623)구드리치, 앞의 글, 389∼392쪽.
송선희, 위의 글, 6쪽.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2월 28일 비공식 회의에서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내에서 선거를 참관하기로 결정하였고, 3월 1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는 5월 9일을 선거일로 발표하였다. 캐나다·호주 대표가 28일 회의의 합법성과 하지의 선거일 결정의 위법성을 지적하면서 반발하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다시 3월 12일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선거가 언론·출판 및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자유분위기에서 행해질 것이라는 조건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이 1948년 5월 9일에 실시될 것으로 발표한 선거를 참관한다”는 결의안을 찬성 4표(중국·엘살바도르·인도·필리핀), 반대 2표(호주·캐나다), 기권 2표(프랑스·시리아)로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624)송선희, 위의 글, 6쪽.

 한편 3월 1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선거 참관의 전제 조건이었던 선거의 자유분위기 확보방안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제출하였고, 이것이 충족되었다는 판단하에 4월 28일 “남한 현지 관찰의 결과 합당한 정도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인정되고 있는 것에 만족하므로 선거를 참관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결정하여 선거 참관을 최종적으로 확정 짓게 된다.625)송선희, 위의 글,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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