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1. 대한민국의 수립
  • 2) 5·10선거와 대한민국의 수립
  • (2) 단선에 대한 국내 정치세력의 대응

(2) 단선에 대한 국내 정치세력의 대응

 5·10선거의 한 특징은, 국내 정치세력 중 상당수가 선거를 거부 또는 불참한 가운데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3년 동안 남한의 정치사회에는 극좌·중도좌·중도·우파민족주의·극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이념적·계급적 이슈뿐 아니라, 친일파 처리나 분단의 수용 등 민족적 이슈를 둘러싸고 다양하게 분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의 중요한 정치·경제적 균열과 이를 둘러싼 여러 사회계층의 이해나 입장을 각각 대표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점에서 이들 중 어느 한 세력이 배타적인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정치집단의 참여와 타협 속에서 신생국가의 수립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에서부터 5·10선거에 이르는 과정은, 정치세력들이 통합과 타협이 아니라 점점 더 분열하고 배제되면서 결국 소수의 정치세력만이 정치공간에 남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미국이 의도한 반공체제 구축과정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분단이라는 민족문제에 대한 대응의 차이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신탁통치 이슈를 둘러싸고 좌·우·중도로 분립되어 있던 국내 정치세력은, 남과 북에 이념을 달리 하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 속에서 또 다시 근본적인 재편성의 계기를 맞게 된다. 분단정부 수립과정은 각 정치세력에게 남북 양 체제 중 어느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이념의 문제와 함께, 분단을 수용할 수 있느냐라는 민족주의적 문제를 함께 부과하였고, 이를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은 다시 분립을 겪게 된다.

 먼저 좌파세력부터 살펴보자. 좌파세력은 일관되게 ‘모스크바 3상협정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해 왔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스크바협정의 폐기를 의미하는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방침 자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대신 소련이 제의한 ‘양군 동시철병 후 한국인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안’을 적극 지지하였다. 좌파세력은 11월 14일 유엔 감시하 한국총선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되자 이를 단정수립 기도로 규정하면서, 무력으로 이를 저지한다는 강경노선을 정하게 된다.

 남한 좌파측의 단선저지투쟁은 북한에서 사회주의정권을 수립하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남로당측은 단선 저지를 위한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치중하는 반면, 北勞黨측은 주로 남한측 중도진영이나 우파측과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南北連席會議를 추진한다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637)정해구, 앞의 책, 117∼8쪽. 1월 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이 소련측에 의해 정식으로 거부됨으로써 남한만의 단선이 분명해지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추방을 위한 비합법적 대중투쟁의 실행 결정이 내려지고 이에 따라 남로당은 단선·단정 저지를 위한 직접적인 실력 행사에 들어가게 된다. ‘2·7구국투쟁’ 이후 약 3개월 동안 전개된 ‘단선·단정 저지투쟁’은 740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낳으면서 격렬하게 전개되었지만 5·10선거를 저지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남한의 좌파세력은 ‘지하선거’ 및 ‘해주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등을 통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638)7월 15일부터 8월 10일까지의 소위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 1,002명의 좌파 및 중도 좌파세력은 월북하여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다시 선출된 360명이 최고인민회의 남한지역 대의원으로서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면 중도파세력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중도파세력은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주의와 민족통일을 강조하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한 좌우합작과 계급연합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1차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국내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해 좌우합작을 전개하였고, 따라서 2차공동위원회 재개를 계기로 상당한 활기를 얻게 된다. 중도 우파세력과 중도 좌파세력은 각각 공동위원회대책협의회 및 5당 캄파 등으로 정치세력 통합을 이루고 1947년 12월에는 중간 좌·우파의 결집체로 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이관과 소련의 미·소양군 철퇴안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파세력은 점차 좌우 양 진영으로 분열되었으며, 또한 남한단선 수용을 둘러싸고 또다시 분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먼저 勤勞人民黨과 5당 캄파계열의 중간 좌파세력은, 유엔 이관 방침에 처음부터 명백히 반대하면서, 소련이 제시한 ‘양군철수 이후 남북총선안’을 지지하였다. 폭력투쟁을 배제할 뿐 정치노선은 좌익과 사실상 동일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자체를 반대하였고, 이후 남한단선을 거부하면서 남북협상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나아가 5·10선거 이후에는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함으로써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중간 우파진영은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들은 중간좌파와 달리, ‘유엔 감시하 전국총선 방침’을 단일정부 수립안으로서 수용하면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였지만 이들은 유엔의 역할에 기대를 걸면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의 협력하에 남북지도자회담을 통해 전국총선거를 성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1948년 2월 남한단선이 유엔에서 결정되자, 이들은 단선 참여를 둘러싼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때 중간우파의 한 축을 이루었던 洪命熹의 民族獨立黨세력은 남한단선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이들은 유엔 감시하 선거 방침이 더 이상 통일정부 수립노선이 아님이 분명해지자 북한이 추진하는 또 다른 ‘통일정부 수립노선’ 즉, 1948년 4월 북한이 추진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는 길을 택하였고, 이를 위해 월북한 이후 평양에 남아 북한정권에 참여하게 된다.

 중간우파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룬 金奎植에게 있어 남한단선 불참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규식은 유엔 감시하 전국총선 방침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소련의 반대로 결국 남한단선으로 귀결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고, 그럴 경우 단선에 참여하는 것도 신중히 고려하였었다. 그러나 김규식 등 중간 우파세력으로서는, 조직과 자금의 열세는 고사하더라도 극우세력이 장악한 경찰개혁 등이 이루어져 공정한 선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선거 참여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639)도진순, 앞의 책, 196쪽. 결국 김규식은 군정당국의 단선 참여 종용을 뿌리치고 남북협상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도 김규식은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및 또 다른 분단정권인 북한정권 수립과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협상 실패 이후 북한에 잔류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김규식의 단선 불참은 남한 체제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극우파 중심의 정부수립에 대한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단선으로 가는 과정에서 金九의 대응 역시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2차공동위원회 결렬시점까지 김구는 李承晩·韓民黨과 함께 “탁치반대, 모스크바협정 폐기, 중간파 및 좌우합작 반대”의 노선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이후 김구의 韓獨黨은 중도파와 우파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김구는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이후 한독당 내 진보파인 趙素昻을 통해 중도파와의 연합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실패로 귀결되자 11월 말부터 이승만 진영과의 합작을 다시 추진하면서 차후 단선을 수용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640)1947년 11월 30일 김구는 이승만과의 회동 이후, “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라도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일.
≪조선일보≫, 1947년 12월 2일.
11월 14일 유엔결의안 통과로 사실상 남과 북의 양자택일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김구가 가진 통일국가 수립을 향한 민족주의적 지향과 반소·반공의 강한 이념적 지향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단 김구는 후자를 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진영의 합작은 결국 실패로 귀결된다. 한민당 정치부장 張德秀 암살사건을 빌미로 한 김구에 대한 경찰의 탄압, 한민당의 적극적 반대, 이에 대한 미군정 및 이승만의 호응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641)도진순, 앞의 책, 158∼166쪽. 한민당과 이승만으로서는 신생정부를 둘러싼 강력한 경쟁자인 김구를 배제 또는 약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며, 미국으로서도 반외세 민족주의로 무장한 김구가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정으로 볼 때 김구의 단선 불참은, 민족주의적 입장에 근거한 자신의 선택과 이승만·한민당·미군정에 의한 배제의 두 측면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분명해진 1월 말 김구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정리하여 발표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미·소양군 철수 후 유엔 감시하 남북지도자들간의 합의에 의한 전국총선”으로 요약된다.642)1948년 1월 28일 김구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하는<미·소양군 철수 및 남북한인 지도자회의 소집 의견서>를 발표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9일.
이제까지 원칙적으로는 남북총선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선 참여 가능성에 대해 다소 여지를 남겨두었던 김구는, 이제 단선 반대의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고 지금까지의 파트너였던 우파진영과 결별한 뒤 김규식 등 중도파와 함께 남북한 총선의 실현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의 협조 아래 남북회담을 통해 유엔 감시하 전국총선을 실현시키고자 했으며, 또한 좌파들과는 달리 유엔을 미·소양군 철수 이후 진공상태를 감독할 수 있는 중요한 관리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유엔에 대한 김구의 기대는 유엔소총회의 단선 결정으로 무산되었다.

 남한단선 방침이 결정되자 미국 당국자들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요인들은 김구·김규식에게 단선 참여를 적극 권유하면서 남북회담을 만류하였다. 이들의 참여는 남한단선을 정당화하는 데에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는 중도파와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였다. 남북회담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태도는, 중간좌파나 일부 중간우파와는 달리, 미·소에 대한 평등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남북의 단독정부를 모두 반대하는 것이었고,643)도진순, 앞의 책, 237쪽. 따라서 이들과 달리 북에 잔류하지도 않았다. 김구의 이념적 지향에서 볼 때 북한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김구의 민족주의적 지향에서 볼 때 남한단선 역시 수용할 수 없었고, 결국 5·10선거 불참을 선택하게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좌파에서 중도, 우파 민족주의세력인 김구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광범한 정치집단들이 남한단선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소극적으로 불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파의 한민당과 이승만계 및 월남세력을 대표하는 朝鮮民主黨계 등은 적극적으로 단선을 추진하였다. 1차공동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단정수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던 이승만은 1947년 6월 27일 과도입법의원에서<입법의원선거법>이 통과되고 또한 7월에 들어 2차공동위원회의 사실상 결렬이 확인되자, 과도입법의원에서 작성한 선거법에 의한 남한총선거 실현을 위해 적극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승만 주도 아래 7월 4일 우익 88개 단체는 입법의원선거법에 의한 총선을 결의하고, 7월 10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구로서 ‘한국민족대표자회의’를 결성하였다. 한민당 역시 “통일정부 수립 전이라도<보통선거법>을 실시하여 조선인 자주의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고, 조선민주당 역시 남조선만의 단독선거라도 시행할 것을 촉구하였다.644)G-2, W/S, no.96.
≪동아일보≫, 1947년 8월 30일, 9월 13일.
≪서울신문≫, 1947년 8월 30일.
≪조선일보≫, 1947년 9월 13일.
이후 유엔 감시하 남북총선 방침이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1947년 말까지 계속하여 “과도입법의원 선거법하에서 연내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미군정당국과 상당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948년 1월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서 이승만과 한민당 등은 조속한 남한선거와 단정수립을 역설하였고,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시도를 맹렬히 비난하였다.645)한민당은 김구를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로 맹렬히 비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30일.
따라서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의 남한단선 결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이들이었다.

 이승만·한민당의 우파세력은 이와 같이 조속한 남한단선 실시를 촉구하는 한편 선거에 대비한 조직적 준비를 진행시켰다.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계는 1947년 7월 조직한 ‘민족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수립하고 1947년 말까지 그 하급조직을 남한 각지의 시·군·구에 이르기까지 완료하였다. 또한 1948년 2월에는 선거운동의 전위대로 이용하기 위해 4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한 ‘구국청년연맹’을 결성하는 한편, 국민회의 총선거 후원회 조직,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국청 조직의 강화 등을 통해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한민당 역시 1947년 11월 선거대책대강을 작성하면서 선거 준비태세에 돌입하였다. 특히 한민당원인 趙炳玉 경무부장과 張澤相 수도경찰청장의 지원과 막대한 선거자금, 동아일보를 이용한 선전 등이 이들의 자원이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단선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각 정치세력들의 대응을 정리하면<표 1>과 같다.

   정치세력

이슈
좌파진영 중도진영 우파진영
좌파 중간좌파(근로민
주당, 5당 캄파)
민독당
(홍명희)
중간우파
(김규식)
김구 이승만
한민당
유엔 감시하
전국총선
극력
반대
적극 반대 지지 지지 지지 지지
유엔 감시하
남한단선
극력
반대
적극 반대 반대 반대 반대 지지
남북협상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반대
양군 철수 즉시
철수
즉시 철수 철수(3∼6개
월 준비기간)
즉시철수
(유엔 치안)
주둔
5·10선거에
대한 대응
폭력
저지
적극 반대 적극
반대
불참 불참 참여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
참여 참여 참여 반대 반대 반대
체제선택 북한 남한

<표 1>정부수립 과정에서 각 정치세력들의 입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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