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1) 소련군의 북한 진주

(1) 소련군의 북한 진주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對日戰 참가의 조건으로 사할린 및 부속 島嶼의 반환, 旅順 항구의 조차권 등 옛 러시아제국이 극동지역에서 누렸던 이권들을 재확보한다는 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은 바 있었다.685)合同通信社調査部 譯編,≪얄타비밀협정-美國務省發表全文≫(合同通信社, 1956), 445쪽. 그 효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686)가브리엘 콜코,<국제정치적 역학관계와 戰後 처리문제>(≪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60쪽. 독일 패망 후 3개월 후인 8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687)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戰後 처리 문제에서 소련보다 우위를 확보하게 되며, 한반도의 분할·점령 등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

 소련은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1 極東戰線, 제2 극동전선 및 자바이칼 전선(Забайкалский Фронт) 등 3개 전선을 조직하였다. 극동전선 1군(사령관 메레쯔코프 Мерецков К.А. 원수)은 연해주지역에서 만주로 진격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한국도 작전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인 바실례프스키(Василевский А.М.) 원수가 작전을 총지휘하였다.

 전투 개시 후 일본의 관동군·만주국군은 급속히 패퇴하였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담당한 부대는 치스짜코프(Чистяков И.М.)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이었다. 제25군은 태평양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에서 20일까지 웅기·나진·청진과 나남을 점령하였다. 8월 21일 상륙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8월 24일과 25일 소련 공수부대들은 산업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제25군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9월 초에는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점령안에 해당하는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688)유리 바닌,<한국의 해방:러시아의 시각>(≪현대북한연구≫3권 2호, 2000), 274∼282쪽.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였다. 8월 26일 평양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데 이어,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의 명령에 따라 6개 도, 85개 군, 7개 시(평양·진남포·청진·함흥·신의주·해주·원산)에 경무사령부를 각각 설치하였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기를 접수하였으며, 행정기관·경찰서·법원은 물론 일본인 소유 대기업·철도·통신수단·은행 등을 관리하였다.689)鄭聖姙,≪소련의 對북한 점령정책에 대한 연구-1945. 8∼1948≫(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9), 39∼40쪽.
기광서,<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역사와 현실≫28, 1998), 277쪽.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에는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東北抗日聯軍敎導旅(일명 88여단) 소속이었다. 대일전쟁 종결 시점인 1945년 8월 25일 현재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의 부대 전체 인원은 1,354명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103명이었다.690)103명은 東北抗日聯軍 출신 88명과 소련계 한인 15명을 합친 수이다(기광서, 위의 글, 280쪽). 전쟁이 종결된 시점에서 韓·中 대원들은 만주와 북한의 연고지역으로 투입되어 소련군의 점령정책을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군 경무사령부 활동지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주민 사이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나 고문, 지역방위 담당 등으로 배치되었다. 103명의 한국인들 가운데 47명은 각 지역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15명은 통역요원으로, 37명은 지역방위 및 그 외의 기관으로 배속되었다. 간부급들은 모두 각 경무사령부로 배속하게 되어 있었다. 金日成은 평양에 부임하도록 하고, 金策-함흥, 安吉-청진, 金一-신의주, 崔賢-강계, 徐哲-원산, 金京石(金庚石)-진남포, 崔勇進-정주, 林春秋-사리원으로 각각 부임하도록 하였다.691)기광서, 위의 글, 281∼284쪽.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김일성 동행 그룹은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692)와다 하루끼(이종석 옮김),≪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비평사, 1992), 290쪽. 김일성의 귀국시 소련군 지도부로부터 받은 직책은 평양주둔 경무사령부 부사령관(고문에 해당)이었다.693)기광서, 앞의 글, 287쪽.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소속 한인들은 단지 소련군의 군사활동을 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방 후 건국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사전에 독자적인 조직을 마련하였다. 1945년 7월, 이 조직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인들은 중국인들과 별도로 ‘朝鮮工作團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의 서기는 崔庸健이었으며, 김일성·김책·안길·서철·최현 등이 위원이었다. 김일성은 이 위원회에서 정치군사 부문의 책임자였다. 조선공작단위원회는 8·15 이후 북한에서 동북항일연군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토대가 된다.694)신주백,≪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민족주의운동 및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대립과 연대를 중심으로≫(아세아문화사, 1999), 489∼493쪽. 김일성을 비롯한 이들 유격대원들 다수는 1936년에 조직된 ‘동북항일연군’과 ‘(在滿韓人)祖國光復會’ 등에서 활동한 인물들로서, 그 역사적 경험 위에서 해방 후 건국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695)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대한 엄밀한 실증적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와다 하루끼(이종석 옮김), 앞의 책.
신주백, 위의 책.
이종석,<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한편 소련군사령부는 북한에서 민정업무를 수행하는 전담기구를 설치하게 된다. 1945년 11월 말 소련군사령관 예하에 50명의 장교단을 통솔하는 민정담당 부사령관 직제가 도입되었다. 민정담당 부사령관에는 35군 군사평의회 의원을 역임한 로마넨꼬(Романенко П.Р.) 소장이 임명되었다. 로마넨꼬 밑에는 정치행정부·산업부·재정부·상업조달부·농림부·보건부·사법검찰부·경찰통제지도부가 조직되었다. 민정담당 부사령관 기구는 1947년 5월까지 존속했으며, 그후 소련국방상의 명령에 따라 ‘주북한소련민정국’으로 개편되었다. 민정국은 13개 부, 총원 78명으로 구성되었다.696)전현수,<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韓國獨立運動史硏究≫9, 1995), 358∼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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