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일본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장악해 가는 가운데,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인민위원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조직되는 이들 지방조직들은 그 지역에서 꾸준히 민족운동·사회운동을 주도해 온 인물들에 의해 연합전선적인 형태로 건설되었다. 각 지역마다 주도세력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기독교·민족주의세력이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평안남·북도지역에서는 민족·자본주의 계열이 주도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등을 결성하였다. 그 반면 혁명적 농민조합·노동조합운동의 전통이 강한 함경남·북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황해도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자본주의 계열 어느 쪽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가운데 두 세력이 경쟁하는 양상을 보였다.

 해방 후 북한지역의 정치적 중심지는 平壤이었다. 일제하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북도지역은 민족자본가층이 두텁게 존재하였으며 민족주의운동, 특히 기독교 민족주의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해방 직후 이 지역에서 건국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이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그 지도자는 曺晩植이었다. 조만식이 주도하여 출범한 ‘平安南道建國準備委員會’의 간부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曺晩植, 부위원장 吳胤善, 총무부장 李周淵, 치안부장 崔能鎭, 선전부장 韓載德, 교육부장 洪箕疇, 산업부장 洪貞模, 재정부장 朴承煥, 생활부장 李宗鉉, 지방부장 李允榮, 외교부장 鄭基秀

무임소위원 金炳淵, 韓根祖(법조계), 金翼鎭, 金主敎(종교계), 池昌奎(유림), 朴賢淑(여성계), 金秉瑞(의료계), 金洸鎭 등(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35∼36쪽;김용복,<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203쪽).

 평남건준은 조만식 등 평남지역의 기독교도와 민족주의자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李周淵과 한재덕·김광진 등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들도 이 조직에 동참하였다. 조만식을 비롯하여 김병연·한근조·지창규는 민족협동전선조직 新幹會의 平壤支會를 주도한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서,697)이균영,≪신간회연구≫(역사비평사, 1993), 306쪽. 신간회 평양지회에서 조만식 계열과 마찰을 빚었던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은 평남건준에 참여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신간회 경험이 건국준비위원회의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간회 활동가들 전체가 해방 후 다시 손을 잡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도 부분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총무부장을 맡은 이주연 또한 신간회 본부에서 중앙집행위원직을 수행하였던 咸南 端川 출신의 사회주의 농민운동가였다.698)이균영, 위의 책, 483쪽. 이같은 민족진영의 움직임과 별도로 평양에서는 玄俊赫·金鎔範·朴正愛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8월 17일에 결성되었으나 소련군의 진주 전에는 그 세력이 미약하였다.699)와다 하루끼,<소련의 對北韓政策 1945∼1946>(≪분단전후의 現代史≫, 일월서각, 1983), 249쪽.

 평안북도에서는 8월 16일에 민족주의자 李裕弼을 중심으로 신의주치안유지회가 결성되었다. 8월 26일에는 평안북도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위원장에 이유필, 부위원장에 좌익계열인 白容龜가 선출되었다. 보안부장에는 공산주의자 韓雄, 문교부장에는 咸錫憲이 선출되었다.700)김용복,<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204쪽.

 해방 직후 함경남도에서 한국인들은 친일경력자·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의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활발한 쪽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8월 16일에 咸興刑務所에서 약 2백 명의 정치범·경제범이 석방되었다. 석방된 정치범 宋成寬·金在奎·朴庚得·文會彪·崔浩敏·朱致旭 등은 韓祉福·朱璋淳·朱啓燮·金淸哲·朱文禎 등과 회동하여 그날 밤, ‘咸鏡南道人民委員會左翼’을 결성하였다.701)森田芳夫,≪朝鮮終戰の記錄≫(嚴南堂書店, 1964), 165쪽. 이 조직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 독립의 조건들이 구비되었다는 취지의 선전 삐라를 각처에 뿌리면서 급거 과거의 … 동지를 통합하여 … 함남 각지에 조직운동가를 파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결과 2∼3일 만에 이미 함흥에서만 1백 명에 가까운 동지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고 따라서 함경남도인민위원회좌익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咸鏡南道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였다. 이와 별도로 都容浩·崔明鶴 등을 중심으로 함경남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702)磯谷季次,≪朝鮮終戰記≫(未來社, 1980), 121∼122쪽.
와다 하루끼, 앞의 글, 250∼251쪽에서 재인용.
도용호는 좌익 민족주의자였다.

 황해도에서는 좌우익 세력간에 팽팽한 대립관계가 형성된 가운데, 金德永을 위원장으로 한 공산당 황해도지구위원회와 金應珣을 위원장으로 한 건준황해도지부 등이 상호 충돌하고 있었다.703)森田芳夫, 앞의 책, 177∼181쪽.

 소련군은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조직 결성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제2차 대전시기에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은 다음의 추상적인 기본방침만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일본 및 다른 국가들이 한반도를 또다시 소련 침략의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한반도 문제를 소련 단독으로 처리하기는 불가능하므로 미국 등 연합국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주면서 합의점을 도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45년 8월, 미국이 공식적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분할점령을 제의해 옴에 따라, 한반도에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북한지역에 소련군을 주둔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을 뿐이었다.704)김성보,<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1945∼1946>(≪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61∼62쪽.

 8월 15일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짜코프 대장이 발표한 호소문에는 소련군이 조선 인민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 실현은 조선 인민 자신의 몫이라는 점, 소련군은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정상적 작업을 원조한다는 ‘해방자’로서의 선언적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705)<해방된 조선 인민에게 보내는 소련극동군 제1전선 제25군 사령관 호소문>(≪蘇聯과 北韓과의 關係-1945∼1980≫, 국토통일원, 1987), 31∼32쪽. 구체적인 소련의 정책은 밝히고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구체적인 정책이 아직 제25군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다.

 뚜렷한 정치 행동지침을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반도를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현상 유지를 위해 조선총독부 기구와 관리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택한 미국과 달리, 한반도를 ‘해방’하고 그 주민에게 권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선언을 한 소련군으로서는, 일본 식민지 지배기구와 거리를 둔 한국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서 건국 준비를 위해 자생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각종 자치기구들에 주목하였다. 소련군은 이들 자치조직들을 주둔정책의 협력자로서 인정하였다. 다만 여기에는 단서가 붙었다. 자치조직에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동등한 비율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방침은 먼저 함경도지역에서 취해졌으며, 평양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결과 함경도지역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급진성이 통제되었으며, 평안남·북도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사회주의자들이 자치조직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대등하게 활동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8월 14일 나진에 진주한 후 대표를 자처하는 한국인들이 소련군을 환영하러 나왔을 때, 사령관은 “자치단체의 지도자들은 시민들 자신이 선출”하여야 한다고 못박았다. 정치부와 위수사령관들은 보다 검토되고 민주적인 길을 선택하라고 권고하였다. 즉, 집회에서 훌륭한 활동적인 애국자들을 선출하고 시자치기관에서 노동자와 주민 여러 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도록 그들에게 전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진에서는 이 원칙에 입각하여 이홍덕이라는 醫師에게 시자치기관의 지도권이 위임되었다. 청진과 웅기에서도 시자치기관이 구성되었다.706)A. M. 와시리예프스키 외,≪레닌그라드에서 평양까지≫(함성, 1989), 193∼194쪽.

 함경북도인민위원회는 9월 말 청진에서 결성되었는데, 초대 위원장은 李昌仁(도회의원, 나진 실업가)이었다.707)森田芳夫, 앞의 책, 163쪽. 함남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미리 조직되어 있던 咸鏡南道共産主義者協議會와 함경남도건국준비위원회가 연합하여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라는 하나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간부진은 두 조직의 대표 각각 11명씩 총 22명으로 구성되었다.708)김용복, 앞의 글, 208쪽. 8월 25일에는 함경남도공산주의자협의회의 宋成寬·崔基模·林忠錫·金仁學과 건국준비위원회 함경남도지부의 都容浩·崔明鶴이 高昌一·金禮鏞과 함께 치스짜코프(Чистяков И.М.) 대장을 소련군사령부로 방문하여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결성하였음을 알리고, 일본측의 행정권과 기타 일체 특권을 이 위원회에 이양하도록 교섭하였다. 소련군사령부는 이를 승인하였다.709)森田芳夫, 앞의 책, 169쪽. 8월 30일,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는 ‘함경남도인민위원회’로 개칭하고, 아래와 같이 간부진을 편성하였다.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다.

위원장 都容浩, 부위원장 崔明鶴, 교육국장 文錫九, 재무국장 李鳳洙, 행정국장 金濟鳳, 교통체신국장 宋成寬, 농림국장 張會建, 사법국장 趙松波, 인민보호국장 張海友, 보건국장 崔明鶴, 함흥시인민위원회 위원장 朴鍾煥(森田芳夫,≪朝鮮終戰の記錄≫, 嚴南堂書店, 1964, 172쪽).

 함경남도에서 정치활동가들은 주민들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선거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한 자료에 의하면, “24일에는 각 郡·面 대표들로서 道內 주민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도인민위원회를 선거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함경남도인민위원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 전신인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를 가리키는지는 불확실하다.710)金哲,<北朝鮮人民會議는 朝鮮 實情에 가장 適切한 進步的民主主義 最高人民政權形態>(≪인민≫, 2권 4호, 1947년 5월호;≪북한관계사료집≫13, 국사편찬위원회, 1992, 447쪽).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은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건준측과 공산측 위원 각 16명 씩으로 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토록 유도하였다. 위원장은 조만식이 유임되었으며, 부위원장으로는 건준측의 오윤선 외에 공산측의 현준혁이 선출되었다.711)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국민사상지도원, 1952), 116∼117쪽.

 평안북도에는 8월 27일 소련군 선발대가 진주하였으며, 30일에 치스짜코프 일행이 신의주에 입성하였다. 31일에 치스짜코프는 행정을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에 이양함을 선언하였다. 이 위원회는 평북자치위원회가 단지 이름만을 바꾼 것이었다. 조직 개편은 없었던 것 같다.712)김용복, 앞의 글, 212쪽.

 지방인민위원회들은 산하에 총무부·산업부·농림부·교육부·보안부·교통부 등 여러 부서들을 두었다.713)≪조선전사≫23(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08쪽. 건준지부, 또는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조직되는 지방자치기구들은 어떤 뚜렷한 정치이념·노선·세력을 기반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지역적 기반을 가진 활동가들이 널리 연계망을 형성하여 조직한 것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에 기반을 두고 각종 현안을 처리하였다. 인민위원회들은 친일세력의 숙청(인민재판), 소작료 3·7제 실시, 철수한 일본인 재산·기업·농지의 운영, 식량문제 해결 등 현안들을 처리하였다. 1945년 11월 20일에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38도선 이북에 인민위원회는 7개 도(경기도 포함), 9개 시, 70군, 28읍, 564개 면에 조직되었다.714)<全國人民委員會代表者大會議事錄>(≪한국현대사자료총서≫12, 돌베개, 1986),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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