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2) 정당들의 조직과 활동
  • (4) 조선신민당

(4) 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의 또 다른 ‘友黨’은 華北朝鮮獨立同盟을 모태로 하는 조선신민당이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간부들과 조선의용군 선발대 1,500명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 안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정부없는 민족에 군대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소련군이 동원한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 산하 보안부대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당하고 국경 밖으로 퇴각하였다.744)민주주의민족전선 편,≪조선해방년보≫(문우인서관, 1946), 146쪽.
이승현,<북조선노동당의 형성과 그 의미>(≪북한현대사≫Ⅰ, 공동체, 1989), 91∼92쪽.
김두봉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 간부들은 부득이 1945년 12월 13일, 무장해제된 채 귀국하였다.745)≪해방후 10년일지≫, 46쪽.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2월 16일, 당 명칭을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하고 북조선공산당의 友黨으로서 활동하였다. 조선신민당의 간부진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主席 金枓奉, 副主席 崔昌益·韓斌, 조직부장 李維民, 선전부장 金民山, 비서처장 邊東潤, 총무처장 張徹(이상 본부).

위원장 白南雲, 부위원장 鄭魯湜, 조직부장 沈雲, 선전부장 高贊輔, 비서처장 具在洙(이상 남조선)(7월 12일).

 (≪조선해방년보≫, 149쪽. 이 명단은 1차 대표대회 이후 명단이다).

 조선신민당은<강령>에서 “친일분자, 팟쇼분자 및 전쟁범죄자 등 일체 반동세력을 철저히 소멸”할 것과 “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한 보편적 평등적 선거에 의한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건립론이었다.746)≪조선해방년보≫, 148∼149쪽. 이러한 주장은 해방 이전 조선독립동맹의 국가건설방략을 계승한 것이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해방 직전에 작성한 강령 초안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그를 통해 “자주독립 강성번영한 조선민주공화국을 건립”할 것을 제창한 바 있다. 이 반일민족통일전선 밑에는 “조국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는 각 계층, 각 당파, 각 개인의 모든 역량을 집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통일전선 안에 지주층까지도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747)崔昌益,<8·15以前 朝鮮獨立同盟綱領(草案)>(≪8·15 以前 朝鮮民族運動의 史的 考察≫), 61∼64쪽. 다양한 민족운동세력이 동등하게 참여하여 하나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세울 것을 모색한 것으로서, 계급운동을 민족운동에 종속시키는 논리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계열처럼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의 轉化 논리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통일전선의 결성에 의한 민족문제의 해결이 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강령 초안에서는 “今日 조선 민족은 식민지 조건하에서 異民族 통치에 대한 민족 모순이 민족내 각 계급간의 모순을 의연히 초과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748)崔昌益, 위의 글, 제2조.

 조선신민당은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북조선공산당에 가장 협조적인 ‘友黨’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에 수립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해방 후 각지에서 세워진 인민위원회들을 하부기반으로 하고 앞서 언급한 정당들을 상부기반으로 하여 건설된다. 그리고 각종 대중조직들이 그 활동을 뒷받침하게 된다. 1945년 11월에는 북조선직업총동맹과 북조선여성동맹이 결성되었다. 1946년 1월에는 공산청년동맹 등이 통합되어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1월 31일 북조선농민동맹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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