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3)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과 ‘민주개혁’
  • (1) ‘탁치정국’을 전후한 좌우대립

(1) ‘탁치정국’을 전후한 좌우대립

 북한의 정치·행정이 사회주의자들 및 그들에게 우호적인 인물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그로부터 소외된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지향적인 인물들은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조직적으로 소련군정 및 조선공산당측에 저항하는 각종 행동을 표출하기에 이른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반공운동은 1945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사건’이다. 대지주 등 자산가들과 기독교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신의주에서는 반공적인 분위기가 초기부터 강하였다. 해방 직후인 9월 초에는 尹河英·한경직 목사 등이 보수적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한 바 있다. 11월 18일 龍岩浦 제일교회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주최의 시민대회에서 한 학생 대표가 공산당의 횡포를 비난하자 좌우익간에 충돌이 발생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11월 23일에는 신의주 시내의 중고등학생 3,500여 명이 보안서 등을 향하여 시위를 하였고,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져 사망자 23명, 부상자 700명이 발생하였다. 사건 직후 급파된 金日成은 시민들 앞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밝히면서도 신의주 지방의 공산당 간부들을 비판하고 학생들을 관대히 처분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전 민족이 총단결하여 민주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여 대중적 지지도를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750)함석헌,<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씨의 소리≫, 1971년 11월호).
와다 하루끼, 앞의 글, 276∼282쪽.

 그 후에도 기독교계에서는 ‘평양章臺峴敎會사건’(1946년 3월 1일), 일요선거 거부사건(1946년 11월 3일) 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김일성·강양욱 저격사건’(1946년 3월), ‘함흥학생사건’(1946년 3월 13일)을 비롯하여,751)사와 마사히코,<해방 이후 북한지역의 기독교>(≪해방후 북한교회사≫, 다산글방, 1992), 22∼45쪽. 천도교계의 ‘3·1재현운동사건’(1948년 2월) 등이 전개되었다.752)新人間社 편,≪南北分裂沮止鬪爭-3·1再顯運動誌≫(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69).
표영삼,<북한의 천도교>(상·중·하)(≪新人間≫375∼377, 1980년 3∼4월).
―――,<天道敎의 3·1재현운동과 金達鉉>(≪북한≫220, 1990년 4월호).

 북한에서 좌우익의 대립구도가 명확하게 되는 시점은 1946년 초 ‘탁치’문제를 둘러싸고 남한에서 좌우익이 분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한국에 전달되는 1945년 12월 28일 이후 북한에서는 급속히 사태가 전개되었다.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선독립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부조선총국 등 5개 단체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1월 3일에는 북조선 10행정국장 회의에서 3상회의 결정 지지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조선민주당의 지도자 조만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때문에 1946년 1월 5일 시점에는 북한 권력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1월 8일에는 민주청년동맹 지방 열성자협의회에서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자를 ‘반동분자’로 규정하였으며, 민주주의조선임시정부에 반민주주의적 제 정당, 사회단체를 절대로 참가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753)<해방 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 일지>(≪북한관계사료집≫7), 588쪽. 열흘 사이에 이미 북한에서는 정치 역학 관계의 근본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며, 앞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협의하게 될 제 정당, 사회단체의 범위에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조직은 참여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는 사태가 전개된다. 그리고 한달 뒤인 2월 5일 조선민주당 열성자협의회가 개최되어 당 조직이 전면 개편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성은 그 3일 뒤인 2월 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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