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3)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과 ‘민주개혁’
  • (3) ‘민주개혁’

(3) ‘민주개혁’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을 출발점으로 하여 남녀평등권법령 공포, 주요 산업 국유화, 노동법령 공포, 사법재판기관 개혁 등 제반의 ‘민주개혁’을 통해 인민민주주의적 국가건설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갔다.

 그 중에서도 사회경제적 대변동을 초래한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1942년 시점에 북한지역에서 논과 밭의 소작지율은 각각 64.3%, 49.6%였다.768)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1948),Ⅰ-340쪽(황해도는 전부, 강원도는 半數를 북한지역으로 계산함). 그리고 1945년 시점의 통계에 의하면 북한지역의 총 농가 가운데 4%에 불과한 지주가 총 경지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농가호수의 56.7%에 달하는 빈농들은 총 경지면적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769)손전후,≪우리나라 토지개혁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71∼72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을 통해 이와 같은 불평등한 토지소유관계를 해체하고 지주제를 청산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농업경제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토지개혁의 구체적인 방법은 2월 말, 3월 초까지도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토지개혁 논의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자본주의 계열간에 하나의 방안으로 수렴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사회주의 계열 내부에서도 다양한 편차가 있었다. 1945년 10월 이후 조선공산당 내부에서 일정한 합의가 도출되지만, 그 또한 1946년초 ‘탁치정국’과 극심한 좌우대립의 상황 속에서 재론의 필요성이 주어지고 있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 것은 북한지역에 주둔한 소련측 내부에서도 이견이 존재하였던 점이다. 소련외무성의 방안은 토지를 무상몰수하되 중소지주에게는 일정량의 토지를 그대로 소유하도록 하며 농민에게는 토지소유권을 유상분배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동유럽에서 시행되는 토지개혁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 반면 연해주군관구측은 모든 소작지를 무상몰수, 국유화한 다음 농민에게는 경작권만을 제공하는 급진적인 방안을 주장하였다. 연해주군관구의 방안은 조선공산당측의 방안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토지개혁 논의는 1946년 2월 말에 개최된 ‘북조선농민대표대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농민들은 모든 소작지를 지주에게서 무상몰수한 다음 소유권 자체를 농민에게 분여하는 방안을 채택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제출하였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농민대표대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침에 입각한 토지개혁 법령을 통과시켰다.770)김성보,≪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북한 농업체제의 형성을 중심으로≫(역사비평사, 2000), 135∼144쪽.

 소작을 주는 모든 토지가 개혁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작 경영하는 지주는 ‘지주계급’으로 간주되어 토지는 물론 가축·주택 등까지 몰수되었으며 다른 郡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몰수한 토지는 고용 농민, 토지가 없는 농민 및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가족별 노동력 점수에 따라 분배하였으며, 이주한 지주에게는 自耕을 원하는 경우 토지를 분배하였다.

 토지개혁은 리(동) 단위로 조직된 농촌위원회들이 담당하였다. 먼저 농민대회를 소집하여 빈농·고농 중심으로 농촌위원들을 선출한 다음, 이들로 구성된 농촌위원회가 도-군-면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토지몰수와 분배를 하였다. 북한 전체 경지면적(과수원, 대지 포함) 182만 98정보 가운데 55.4%에 해당하는 1백만 8,178정보가 몰수되었다. 이 가운데 95만 5,731정보가 78만 8,249호에 분배되었다. 토지개혁으로 농촌에서 지주층은 소멸하였으며, 농촌 계층구성은 부농 2∼3%, 중농 62∼63%, 빈농 25% 내외로 재편되었다.771)김성보, 위의 책, 183∼184쪽.

 토지개혁 후 농민은 국가에 생산물의 25∼27%에 해당하는 양곡을 농업현물세로서 납부하게 되었으며, 농업 생산에서 유통까지 국가가 세밀하게 관리하는 국가관리 소농체계가 농촌에 만들어 졌다.772)김성보,<토지개혁 후 북한에서의 國家管理 小農體系 형성>(≪韓國 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金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3)≫, 지식산업사, 1997).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농민, 특히 빈농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세력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토지개혁 당시에는 농민동맹원 수가 108만 3,985명이었으나, 개혁 후에는 144만 2,149명으로 증가하였다.773)≪조선전사≫23권(과학백과사전출판사, 1881), 170∼171쪽. 1945년 12월 4,530명(농민이 34%)에 불과했던 북한의 조선공산당원 숫자는 1946년 4월에는 2만 6천여 명으로, 1946년 8월에는 36만 6천여 명으로 격증하였다.774)손전후, 앞의 책, 257쪽. 북한 토지개혁은 단지 지주제의 몰락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천주교계의 재정기반을 약화시키고 평안남·북도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기독교적 민족·자본주의진영 전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775)김성보, 앞의 책, 162쪽.

 한편 1946년 8월 10일에는<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일본국가와 일본 법인 및 私人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족반역자의 소유”로 되어 있는 모든 기업소·광산·발전소·철도운수·체신·은행·상업 및 문화기관 등이 무상몰수 대상이 되었다. 법령에 따라 국유화한 공장, 기업소는 북한 전체 산업의 90% 이상에 달하는 1,034개이다.

 그 외에도 남녀평등권법령, 노동법령 등이 공포되었으며, 문화·교육의 급속한 발전, 사법재판기관 개혁 등 이른바 ‘민주개혁’이 실시되어,776)金策,<北朝鮮人民委員會 新發足에 際하여>(≪人民≫2-4호, 1947). 인민민주주의적 국가건설을 위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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