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5) 헌법 제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헌법 제정

(1) 헌법 제정

 1947년 11월 14일 유엔에서 미국의 제안에 따라 한국임시위원단의 조직을 결정하자, 그 나흘 뒤인 18∼19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는 헌법 제정 논의를 공론화하였다.787)尹慶燮,<1948년 北韓憲法의 制定背景과 그 成立>(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95), 40쪽.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북한의 사법관계자들은 소련의 스딸린 헌법을 국역하고, 동구라파 인민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연구서를 번역하는 등 기본적인 준비를 해 온 바 있다. 이 회의에서 31명의 임시헌법제정위원이 선임되어 헌법 제정을 위임받았다.788)임시헌법제정위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金枓奉, 金日成, 崔庸健, 洪箕疇, 朴允吉, 崔璟德, 金頊鎭, 姜鎭乾, 朴正愛, 李箕永, 康良煜, 金廷柱, 李周淵, 鄭達憲, 文泰和, 金英洙, 金應基, 崔鳳秀, 韓冕壽, 崔金福, 康仁奎, 金始煥, 安信浩, 李鍾權, 金澤泳, 金潤東, 李淸源, 金周經, 閔丙均, 鄭斗鉉, 太成洙(北朝鮮人民會議 常任議員會,≪北朝鮮人民會議 第3次會議 會議錄≫, 1948, 117∼120쪽).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제1차 회의는 인민회의 3차 회의가 끝난 다음 날인 20일 인민회의 상임의원회 의장실에서 개회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전부장인 김택영, 역사가 이청원, 북조선최고재판소 판사 김윤동 등 3인을 임시헌법초안 작성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임시헌법제정위원회 상임서기장에는 김택영이 피선되었다. 김택영은 법률학 석사 출신의 소련계 한인이었다.789)尹慶燮, 앞의 글, 46쪽. 당시 사법국장이던 崔容達은 임시헌법제정위원회에서 제외되었다.790)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출신으로 보성전문 법학교수를 역임하였고,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직 수행 이래 북한 법조계를 주도한 그가 제외된 것은 북조선노동당 지도부와의 마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제2차대회에서 허가이로부터 사법기관에 친일경력자를 다수 등용한 점을 비판받은 후 결정적으로 힘을 잃게 된다. 다만 최용달의 헌법관련 논설이 북조선노동당 기관지인≪근로자≫에 실리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어느 정도로든 북한헌법 형성과정에 기여하였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최용달,<조선인민은 이러한 헌법을 요구한다>,≪근로자≫, 1948년 1호).

 북한헌법 초안 작성과정에 소련은 어느 정도 개입하였을까. 주북한소련민정국 사법·검찰부의 쉐찌닌(Щетинин Б.В.)은 자신의 회상기에서 “헌법 초안 작성에 즈음하여 조선의 동지들은 나에게 자주 법률가로서의 자문을 구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조선의 동지들에게 헌법에 관한 레닌적 강령과 소련 및 여타 사회주의제국에서의 헌법제정의 구체적 경험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부르주아 헌법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791)쉐찌닌,≪조선인민과의 우정을 위하여:회상과 논문≫(모스크바, 1965), 141·142쪽.

 1947년 12월 작성된 임시헌법 초안은 1948년 2월 6∼7일 개최된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회의의 개최와 관련하여 1948년 1월 말 소련공산당에서 채택된 다음과 같은 결정 내용이 주목된다. 1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인민회의 4차 회의를 개최할 것을 허가하면서 “(이 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심의하지 않고 … 헌법 초안에 대해 조선인민의 완전한 의사표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전 인민 토의에 부칠 것과 북조선인민위원회 대회를 1948년 3월에 소집하여 임시헌법 초안을 토의 비준한다고 결정할 것”을 제기했다. 이 결정은 인민회의에서 그대로 관철되었다.792)尹慶燮, 앞의 글, 66쪽.

 ‘전인민 토의’ 기간 동안 임시헌법제정위원회에 제출된 헌법 초안 지지결정서는 5만 8천통에 달하였고, 초안에 대한 수정안과 첨가안은 2,236통에 달하였다. 임시헌법제정위원회는 이 수정안 및 첨가안을 중심으로 헌법 초안을 수정해 나아갔다.793)金澤榮,≪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의 근본원칙≫, 8쪽.

 인민 토의 기간은 2개월간이나 진행되었다. 본래 3월에 개최 예정이었던 임시헌법 채택을 위한 인민회의가 4월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북한만의 헌법 논의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794)정해구,≪남북한 분단정권 수립 과정 연구≫(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5), 174쪽.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종료된 뒤인 1948년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헌법 초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연석회의를 뒤이어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채택된 헌법 초안은 인민위원회를 국가권력의 기초로 하는 인민적 국가형태와 인민주권 형식을 담고 있으며, 특히 경제구성에서 국가소유, 협동단체의 소유, 개인소유를 모두 인정하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북한헌법 초안은 소련 헌법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를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일반화하고 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건설의 틀에서 수용한 것이며, 남북 분단의 상황 등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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