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5) 헌법 제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2) 북한에서의 분단정부 수립

(2) 북한에서의 분단정부 수립

 북한은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였다. 정부수립 이전에 조선인민군을 창건한 것은 미국·소련 양국군 철수를 대비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북한은 유엔소총회가 1948년 2월 26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공화국 수립을 서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48년 3월 9일에 열린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5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외국군대가 철거하는 조건 아래 전 조선적으로 최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민주주의적 인민정부를 수립하자는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제안하였다. 3월 25일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남북한 정당·사회단체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뒤이어 3월 27∼30일 동안 열린 북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도 이러한 주장들이 다시 확인되었다.

 제2차 당대회가 끝난 뒤 4월부터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 소속 단체들은 이에 호응하였고, 남북 지도자들간의 정치협상을 주장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 우익 및 중도계 민족주의자들도 北行을 결정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본회의가 남북의 46개 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사회로 조선 정치정세 및 남한단선과 단정반대투쟁 대책을 회의 안건으로 채택하였다. 4월 20일, 김구와 홍명희 등이 평양에 도착하자,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를 예방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대표자연석회의 주석단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김일성과 단독회담을 요구하였다. 4월 21일에 본회의가 속개되었지만 김구를 비롯한 남한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김구는 북한이 대표자연석회의를 북한정권 수립에 활용하지 않는가 의심하였다.795)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 출판부, 1997), 263∼267쪽. 남한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대개 불참한 가운데 회의에서는 단선단정 반대, 소·미 양국군대의 철병, 외세의 간섭없는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의 수립 등이 논의되었고, 단선을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 결성이 결정되었다.

 남한 민족주의자들은 대표자연석회의보다 ‘남북요인회담’에 기대를 걸었다. 4월 26일과 30일에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4인의 이른바 ‘4김회담’이 열렸으며, 그와 별도로 남북지도자 15인으로 구성된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30일에 지도자협의회는 ①미·소 양군 철수, ②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③전국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④남한의 단선단정 반대를 요지로 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796)도진순, 위의 책, 271∼281쪽.

 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여러 가지 역사적 한계를 지니지만, 민족분단의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여 외세에 의한 분단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성을 추구했다는 점,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단결을 시도하였다는 점, 분단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797)도진순, 위의 책, 289쪽.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와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를 결정하였다.798)≪조선중앙년감≫(1949), 43쪽. 정부수립에 앞서 남·북조선노동당은 총선거 및 정부수립을 효율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8월 2일 연합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북한에서의 선거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공동추천한 후보자를 직접 선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8월 25일 실시된 선거에서 유권자의 99.7%가 참가하고 98.4%가 찬성함으로써 2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반면 남한에서의 선거는 지하선거를 통한 간접선거 방식이 채택되었다. 8월 20일까지 지하선거를 통해 인민대표를 선출한 다음, 월북한 이들이 8월 21∼25일 사이에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간접선거로 뽑힌 1,080명의 인민대표들은 월북하여 해주에서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남북한에서 선거로 뽑힌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572명) 중 항일운동으로 체포·감금 경력자는 248명으로 전체의 43.3%였으며, 이들을 포함하여 항일운동 경력이 있는 자는 총 287명으로 전체의 50.2%에 달하였다.799)≪北韓最高人民會議資料集≫1(국토통일원, 1988), 100쪽.

 최고인민회의는 9월 2∼10일 제1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9월 8일에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이 헌법을 ‘전 조선지역에 실시한다’고 선언하였다.800)국토통일원 편,≪북한최고인민회의 자료집≫1(1988), 34∼35쪽. 같은 날 홍명희의 제안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9일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조직되었다. 내각의 명단은 다음<표 2>와 같다.

직 위 성 명 소 속 당 직 위 성 명 소 속 당
수상 김일성 북로당 교통상 주영하 북로당
부수상 박헌영 남로당 재정상 최창익 북로당
홍명희 민주독립당 교육상 백남운 前근로인민당
김 책 북로당 체신상 김정주 청우당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정준택 북로당 사법상 이승엽 남로당
민족보위상 최용건 민주당 문화선전상 허정숙 북로당
국가검열상 김원봉 인민공화당 로동상 허성택 남로당
내무상 박일우 북로당 보건상 李炳南 남로당
외무상(겸임) 박헌영 남로당 도시경영상 이 용 신한민족당
산업상(겸임) 김 책 북로당 무임소상 이극로 어학회장
농림상 박문규 남로당 최고재판소장 金翊善 북로당
상업상 장시우 북로당 최고검사총장 장해우 북로당

<표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명단

≪조선중앙년감≫(1949), 13쪽.

 내각에는 남북의 인사들이 약 반씩 참여한 가운데 남·북조선노동당이 전체의 70%를 차지하였다. 남북조선노동당 외에는 민주독립당·인민공화당·근로인민당·신한민족당·조선민주당·천도교청우당 등 친사회주의적인 중도파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노동당 우위하에 人民民主主義的 성격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창건이 선포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남한에서 大韓民國이,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1945년 8월 해방 이후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적 노력은 좌절되었다. 일제강점하에서 자본주의적 국가건설의 흐름과 사회주의적 국가건설의 흐름으로 양분되었던 한국사회는 해방 후에 그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의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이념을 달리하는 미국·소련 두 강대국의 군사분할 점령정책 속에서 이념적 대립은 오히려 더욱 격화하였으며, 그 결과 1945년 8월의 해방 시점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두 개의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金聖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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