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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사회 6-1(2차)
  • 1. 우리 나라의 발달
  • (5) 대한 민국의 발달
  • 〈6⋅25 사변과 그 후의 부흥〉

〈6⋅25 사변과 그 후의 부흥〉

남한의 국민은 민주주의 정치 아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북한 동포들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독재로 자유를 찾지 못한 채 강제 노동으로 괴로움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북한의 동포를 독재 정치로 억눌렀을 뿐 아니라, 자유스러운 대한 민국까지도 무력으로 넘어뜨리려고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괴뢰군은 갑자기 38도선을 넘어 전면적으로 남침을 시작해 왔다.

이 때, 우리 국군은 공산군을 맞이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소련제 탱크와 대포로 무장한 괴뢰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유우엔은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 민국을 수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국군은 유우엔군의 협력을 받아 반격전을 개시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우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서 국토를 통일하려고 북한으로 진격하였다. 국군과 유우엔군은, 이르는 곳마다 북한 동포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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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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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뜻밖에도 중공군이 불법적으로 공격해 와서, 국군과 유우엔군은 다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국군과 유우엔군은 재차 반격을 가하여 38도선 부근까지 쳐 올라갔다.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공산군은 새로운 침략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휴전을 제의해 왔다. 이에 대하여 온 국민은 방방곡곡에서 북진 통일을 부르짖으며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1953년 7월에 판문점에서 유우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어 3년간에 걸친 전란이 일단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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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 조인
휴전 협정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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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변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컸다. 거의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약 66만 호나 되는 집이 불타 버렸으며, 주요한 공장이 거의 파괴되었다.

휴전이 성립된 이후, 우리 국민은 사변에 의하여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유우엔의 우방 여러 나라도 우리를 도와 주었다. 교통 기관, 문화 시설, 학교 등을 다시 일으키고, 공장을 세워 물품을 만들어 냈으며, 많은 집을 지어서 전재민들을 구제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활발히 부흥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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