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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우리 민족의 해외 진출
  • [2] 신라방과 벽란도

[2] 신라방과 벽란도

신라와 고려인들의 해외 진출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 살림이 튼튼해지면서 나날이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특히 당나라로 많이 건너갔다. 공부를 하기 위한 유학생과 승려,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났으며, 사신들도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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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의 해상 무역로
통일 신라 시대의 해상 무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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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에는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사는 마을인 신라방이 생기게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신라방을 중심으로 당나라 사람들과 장사를 하기도 하고, 그 곳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인 마을이 이루어지자, 이들을 위한 절과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도 지어졌다. 또, 신라인들이 자치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행정 기관도 생겼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장사가 번창하자, 이들의 배를 노리는 해적들이 나타나 노략질을 하였다. 해적들은 심지어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힘과 재주가 뛰어나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장보고는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보고, 신라 사람을 괴롭히는 당나라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왔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할 계획을 왕에게 아뢰고, 청해(지금의 완도 일대)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여 강한 수군을 길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들을 소탕하자, 신라인들은 물론 일본, 당나라 상인들까지도 편안히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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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활동(민족 기록화)
장보고의 활동(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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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에 전라 남도 신안군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화려한 청자를 그물로 건져 올렸다. 바다 밑에 침몰한 배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이 지역을 조사하고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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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해저 유물(국립 광주 박물관 소장품)
신안 해저 유물(국립 광주 박물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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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많은 유물을 건져 냈는데, 거의 중국에서 만든 것이었고, 배는 중국과 일본을 오고 간 무역선으로 밝혀졌다.

고려 자기나 팔만 대장경판과 같은 훌륭한 문화재를 만든 고려는, 거란족이나 여진족보다는 문화를 숭상하는 송나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고려에서 육로로 송나라에 가는 도중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있어 왕래하기가 위험하였다. 그래서 주로 뱃길을 이용하였다.

송나라 상인들은 여름철에 고려에 찾아왔다가, 11월에 궁중에서 열리는 팔관회라는 불교 잔치에 참석해 예물을 바치고는 되돌아갔다.

고려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통하여 송나라 상인들과 교류하였다.

벽란도에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와 동남 아시아의 상인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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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해상 활동
고려의 해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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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금, 은, 구리, 인삼, 나전 칠기, 돗자리, 종이 등을 수출하였고, 송나라로부터 비단, 자기, 책,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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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출품
고려의 수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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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라비아 상인들은 수은, 향료와 같은 것을 가지고 벽란도에 드나들었다. 고려라는 이름은 이들에 의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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