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 온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이 낸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주몽의 아들로서, 역시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처음에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를 정복하면서 점차 큰 나라로 성장해 갔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 때, 백제는 근초고왕 때, 그리고 신라는 진흥왕 때에 나라의 힘을 크게 떨쳤다.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와 건국 이야기를 조사해 보고, 이를 간단한 역할극으로 나타내어 보자.
■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서 일어난 나라였는데,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소수림왕 때에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길렀다.
국가로서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만주로 영토를 크게 넓혔고,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였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영토를 크게 넓혔지.
이처럼 강한 나라인 고구려는 계속된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침략을 살수(오늘날의 청천강)에서 물리친 것이나,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물리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백제의 성장과 발전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백제는 넓은 평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북쪽으로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을 모두 통합하여 그 영토를 남해안까지 넓혔으며,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도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경에 고구려의 힘에 밀려 세력이 약해졌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 넘겨주고 금강 유역의 웅진(오늘날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백제는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그 후에 도읍을 사비(오늘날의 부여)로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서울 특별시 석촌동의 돌무지무덤과 부근의 토성들은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지요. 또, 무령왕릉은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였음을 보여 주는 문화재입니다.
■ 신라의 성장과 발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달이 늦었고, 전성기도 삼국 중에 가장 늦게 맞이하였다.
법흥왕은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한 후, 불교를 내세워 왕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진흥왕은 인재 양성을 위해 화랑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신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였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이 한강 유역을 얻기 위해 계속 다툰 까닭은 무엇일까?
▶ 삼국의 각 전성기 때의 왕인 광개토 대왕, 근초고왕, 진흥왕과 각각 가상 대담을 해 보자(사회과 탐구 13, 16, 17쪽).
⋅ 나라의 발전을 위해 특히 힘을 기울인 일은 무엇입니까?
⋅ 기억에 남는 전쟁은 어떤 것입니까?
▶ 가야가 큰 나라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에 통합된 까닭에 대하여 알아보자(사회과 탐구 19쪽).
신라가 성장할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작은 나라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가야는 처음에 수로왕이 세운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뛰어난 철기 문화를 일으켰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힘을 잃은 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았으나,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신라에 정복되었다.
이처럼 가야는 큰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야 문화는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