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초등학교 사회 6-1(7차)
  • 1. 우리 민족과 국가의 성립
  • (2) 민족을 다시 통일한 고려
  • [2] 역경을 이겨 내며 꽃피운 고려 문화
  • ●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알아보자.

●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알아보자.

일요일에 유미는 부모님과 함께 낙성대를 찾아가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이 곳에서 태어난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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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서울 특별시 관악구)
낙성대(서울 특별시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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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에 있는 3층 석탑
낙성대에 있는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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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는 외적의 침략이 많았나요?”

“그랬지. 특히, 북방 민족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단다. 고려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힘을 모아 이겨 냈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유미는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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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유미는 국사 연표에서 고려가 겪은 외침과 고려의 항쟁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 서희의 외교 담판

고려가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자 거란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거란 군대가 청천강까지 공격해 오자, 서희는 당당하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땅이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군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한 것으로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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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정당한 주장을 들은 소손녕은, 마침 식량이 떨어지기도 한 참이라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고려의 영토를 인정하고 대군을 돌려 물러갔습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

서희의 외교 담판이 있은 지 20여 년 후, 힘이 더욱 강해진 거란이 고려를 세 번째로 침입해 왔다

거란의 10만 대군을 막기 위해 압록강으로 출전한 강감찬 장군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조금씩 후퇴를 하였다.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계속 돌진해 왔다.

개경 가까이 온 거란군은 그제야 고려군의 작전을 눈치채고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거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후퇴하는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10만 명의 군사 중에 살아서 돌아간 거란의 군사는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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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민족 기록화)
귀주 대첩(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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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잘 막아 낸 고려는 여기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치⋅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 윤관의 여진 정벌

고려와 송나라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을 때, 여진족이 또 다시 고려를 괴롭혔다.

여진족은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들은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말이나 모피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옷감, 농기구 등으로 바꾸어 갔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자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였고, 결국 고려와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는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게 하였다. 윤관은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물리치고 그 곳에 9성을 쌓았다.

여진족을 무찌른 윤관(가상 대담)

기자 :  여진족을 이기게 된 큰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윤관 : 훈련받은 기병이 있어 기동력이 우수하였고, 우리 군사들이 모두 열심히 싸웠기 때문입니다.

기자 : 왜 기병을 훈련시킬 생각을 하셨나요?

윤관 : 여진족의 군대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중심이었으므로 기병 없이 는 고려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 9성을 쌓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윤관 : 여진족이 다시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 함경도 지역이 고려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자 : 그런데 왜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9성을 돌려주었나요?

윤관 : 살 곳을 잃은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돌려 달라고 간청하여 나라에서 돌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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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중국을 정복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유럽의 일부까지 지배했던 몽고가 고려를 침략해 왔다. 압록강을 건넌 몽고군은 귀주성이 무너지지 않자, 귀주성을 내버려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려의 군대와 백성들은 힘을 합쳐 몽고군에 맞서 싸웠다. 충주성이 몽고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 내자, 몽고군은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고려와 타협하고 물러갔다. 이 때, 고려는 계속 몽고와 싸우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몽고는 다시 쳐들어왔지만 처인성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갔으며, 세 번째 침략 때에도 죽주성에서 패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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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민족 기록화)
처인성 전투(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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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몽고는 계속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려는 이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고려는 약 40년간의 항쟁을 끝으로 몽고와 강화하였고, 이후 몽고의 간섭을 받았다.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고려는 자주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하여, 공민왕 때에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 고려가 북방 민족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까닭을 당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해 보자(사회과 탐구 36 쪽).

고려가 승리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 장군  
고려의 병사  
백성들  
적군(거란, 여진, 몽고)의 병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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