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초등학교 사회 6-1(7차)
  • 2. 근대 사회로 가는 길
  • (1) 새로운 사회로의 움직임
  • [1] 사회 변화를 위한 서민들의 노력
  • ● 조선 후기의 농업과 상업의 변화 모습을 알아보자.

● 조선 후기의 농업과 상업의 변화 모습을 알아보자.

확대보기
모내기
모내기
팝업창 닫기

조선은 서민의 대다수가 농민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였다. 위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킨 농사법인 모내기법을 나타낸 것이다.

모내기법이 발달하면서 농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모내기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왜란과 호란,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백성들의 생활 터전인 농촌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다. 나라와 백성들은 농촌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라에서는 농토를 늘리고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를 만들었고, 농민들은 개량된 여러 가지 농사법을 실천해 보는 등 좁은 땅에서 다양한 작물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자 개량에도 힘써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들이 새로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 모내기법과 골뿌림법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까닭은 무엇인지 조사해 보자(사회과 탐구 66쪽).

확대보기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모내기
모내기
팝업창 닫기

▶ 다음 자료들을 통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농사 모습을 살펴보자.

1770년대 말 5월, 이병모가 말하였다. “‘직파법’으로 불과 10두락의 농사를 짓던 사람이 ‘모내기법’으로 하면 족히 40두락의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같은 힘으로 많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넓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경작할 토지조차 얻기 어려워 근심하고 있습니다.”

안정복의 ‘일성록’ 중에서

⋅ 윗글은 어떤 농사법을 나타내고 있는지 말해 보자.

⋅ 윗글에 나타난 농사법에서 어떤 문제점이 생겼는지 찾아보자.

두락이란, ‘마지기’라고도 하며, 한 말의 씨앗을 뿌려 농사짓는 땅을 말합니다.

서울 부근과 각 지방 대도시 주변의 파밭, 마늘밭, 오이밭에서는 10무(4두락)의 땅으로 수백 냥을 번다. 서북 지방의 담배밭, 관북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은 논농사가 가장 잘 되었을 때의 벌이와 비교하더라도 그 이익이 열 배나 된다. 요즈음은 인삼도 모두 밭에서 재배하는데, 이익이 수십만 냥이나 된다고 하니 토지의 질이 문제가 아니다. 약재 재배도 이익이 매우 많다. 목화벌이만이 쌀농사에 비해 이익이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 중애서

⋅ 윗글에서 당시에 재배한 농작물들을 찾아보자.

⋅ 윗글은 어떤 농사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 말하여 보자.

조선 후기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공업자들이 관청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생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들 수공업자로부터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 제품을 사들인 후 나라에 팔아 이익을 얻거나,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도매업을 하는 등 커다란 규모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커다란 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청⋅일본과도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무역상 중에서는 ‘송상’이라 불린 개성 상인들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상업의 발달로 전국적으로 시장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물건을 교환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금속 화폐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확대보기
상평통보
상평통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시장의 모습
시장의 모습
팝업창 닫기

▶ 금속 화폐의 발달은 당시 서민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토의해 보자.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