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초등학교 사회 6-1(7차)
  • 2. 근대 사회로 가는 길
  • (1) 새로운 사회로의 움직임
  • [3] 복을 빌고, 평등한 세상을 바라고
  • ● 천주교와 동학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까닭을 알아보자.

● 천주교와 동학이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까닭을 알아보자.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퍼졌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서양 학문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조 때에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신앙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신앙 활동이 상민이나 부녀자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상민이 양반과 함께 한 교회 안에서 평등한 지위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다.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수가 빠르게 늘어나, 철종 때에는 2만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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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성당(서울 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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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까닭은 무엇인지 토의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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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전파
천주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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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순조 때에는 나라에서 법으로 천주교를 금하였다. 천주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내려진 후, 천주교를 믿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가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 다음 그림을 보고,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한 까닭이 무엇인지 토의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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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경상도 어느 고을의 한 농가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농민이 대부분이었지만 양반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양반과 농민들이 서로 높임말을 쓰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 집에 모인 사람들은 책을 읽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모임은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집회였다.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져 교도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집안이 기울어진 양반도 있었지만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동학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에서는 동학을 금하고, 동학 교주인 최제우와 제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이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노력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여러 도인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세상은 너무 혼란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있습니다. 인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 속의 한울님을 섬기십시오. 서학(천주교)도 하늘의 뜻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동학을 믿어야 합니다.

〈동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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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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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하고 천함을 나누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모든 차별을 없애고 스승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최시형의 법설〉

역사 신문

동학 교주 최제우 체포되다!

1863년 11월, 경상도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2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속인 죄가 적용될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서는 ‘인내천’과 ‘후천 개벽’ 사상을 내세우는 등 사실상 신분제를 부정하고 나라에 도전하는 측면이 있어서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어 체포했다고 한다. 현재, 동학은 교도의 수가 날로 늘어 각 지방에 13개의 접소를 두고 3천여 신도를 거느린 큰 종교 조직으로 성장해 있다.

‘후천 개벽’이란, 지금의 세상은 운이 다해서 끝나고, 백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뜻입니다. 후천 개벽 사상은 현세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 많은 사람이 동학을 믿은 까닭과 동학을 믿은 사람들 중에 농민이 많았던 까닭은 무엇인지 이야기하여 보자(사회과 탐구 83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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