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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Ⅱ장 부족 사회의 문화
  • 5. 한 문화의 영향

5. 한 문화의 영향

고조선을 들이치고 일어선 위만은 국도를 왕검성(王儉城)에 두니, 이것을 위만 조선이라 한다. 이 왕검성은 지금 흔히 우리 나라 평안남도 평양(平壤)이라 하나, 실상은 만주 개평(蓋平) 동북 지방이었다.

이 때 우리 나라의 여러 부족들의 자리 차지한 것을 보면, 남으로 온 준왕은 곧 망하고, 삼한 중의 말한의 땅에는 백제(百濟) 사회가 형성되어 갔고, 북으로 평양(평안남도)을 중심한 낙랑국(樂浪國)은 최씨(崔氏)의 통솔 아래 있더니,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낙랑국을 합치며, 그 세력을 동부여까지 내뻗게 되자, 동부여에서는 요동의 위씨와 통하여 고구려의 내리누르는 힘을 피하려 하였다. 이때 위씨의 힘이 약하여졌으므로 나아가 한과 통하려 할 새, 마침 한 무제(武帝)는 동으로 손을 내밀려는 욕심이 있을 때라, 곧 연⋅제(齊)의 군대를 풀어 동부여 낙랑국을 구하려 하여, 고구려와 여러 해를 싸웠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또 무제는 위씨에게 길을 빌려 동부여와 통하여 고구려를 들이칠 흉계를 갖고, 위씨에게 사자 섭하(涉何)를 보내어 국경 통과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무제는 또 군대를 보내어 요동의 위씨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위씨의 왕실(王室)을 교란케 하여 그틈을 타서 들이침에 위씨는 망하고, 무제는 이 땅을 나누어 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菟)⋅낙랑(樂浪)의 4군(郡)을 두게 되었다 한다.

지금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이 한 4군(漢四郡)의 설치와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되지 못했다. 대개 오늘날 대동강 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고 있으나, 현대 일부의 학자들은 한의 4군이 조선 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 지대에 머물렀던 것이라 한다. 즉 만주 개원(開原)의 이북에는 북부여, 흥경(興京) 이동에는 고구려, 압록강 이남에는 낙랑국이 있었고, 함경도와 강원도에는 동부여가 있었으니, 만주와 조선에서는 어디에 한의 군현(郡縣)이 있을 수 있었는지, 있었다면 위씨가 자리 잡고 있던 요동을 빼고는 찾을 곳이 없다. 중국의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4군에 대한 사실이 퍽 명확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연대
군명
원봉 3년
108 B.C.
시원 5년 이후
82 B.C.-漢書地理志
건무 6년 이후
30 A.D.-後漢書郡國志
현도군
玄菟郡
현수
이름
〉 불명 현수효 3
이름 기록
현수효 6
현이름 기록
낙랑군
樂浪郡
위와 같음 현수효 25
이름 없음
현수효 18
현이름 기록
임둔군
臨屯郡
위와 같음 | |
진번군
眞番郡
위와 같음 | |
대방군
帶方郡
위와 같음 | |

무제가 처음 둘 때의 각 군⋅현의 수와 현명조차 분명치 못하고,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비로소 현도⋅낙랑 두 군의 이름만이 밝히어진다. 지금 또한 이 현명을 어느 곳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있다. 대개 요동 일대의 지명이다. 중국 기록에 나타난대로 보면, 조선의 위씨가 망한 후 무제 원봉(元封) 3년(108 B.C.)에서 진(晋) 건흥(建興) 원 년까지 421년 간 요동에 근거를 두었던 한족 세력은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때, 이곳에서 아주 몰려나가고 말았다.

이른바 한의 4군이 조선 반도 안에 자리를 잡았느냐? 또는 요동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일정치 않으나, 문화로는 한대 문물이 우리 나라에 끼친 것이 적지않다. 더욱 지금 낙랑 문화라고 알려진 것은 조선 고대 문화에 있어 빛나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요동을 거쳐, 우리 반도 안으로 중국 문화가 전해지기는, 중국의 전국 시대 끝머리에서부터로, 요동에서 반도에 걸쳐 중국의 금속 화폐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즉 중국 전국 시대 끝머리에 중국의 하북(河北)⋅하남(河南)⋅산동(山東) 등에서 쓰던 명도전(明刀錢)은 만주와 평안 남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고, 왕망(王莽) 때에 쓰던 것은 남쪽 김해의 조개묻이에서 발견된 것도 있으며, 제주도(濟州道) 산지항(山地港)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한대 문화가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무제가 위씨의 터를 침범한 뒤부터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기 시대에서 석금병용기에 걸쳐 한 민족의 금속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남쪽에 있던 삼한 사회에 비겨, 북에 있던 고구려 사회는 먼저 한의 금속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렇게 밖에서 오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다음과 같이 시간적인 계단을 밟아 왔었다. 즉 전국 시대 말기에서부터 화북(華北)지대 한족 문화의 초기의 것이 흘러 들어 왔고, 보다 앞서 북방민족에 따라 서방 아시아식 금속 문화인 스키토⋅시베리아(Scyto-Siberia) 게통의 것이 전해졌다. 여기서 북방계 문화와 한족의 동기(銅器) 문화가 서로 합쳐서 이루어진 특수한 금속 문화가 들어 왔고, 요동에 요동군 또는 무제 이후 4군이 설치되면서 순 한식(漢式) 금속문화가 흘러 들어 왔다.

지금 평양 부근의 낙랑군 치지(治址)라는 대동군(大同郡) 대동강면(大同江面) 토성(土城)을 중심으로 산재하는 천여 개의 고분(古墳)과 용강군(龍岡郡, 平南) 어을동(於乙洞) 고성(古城) 부근의 고분, 또 대방군의 치지라고 하는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당토성 부근의 수십 개의 고분들은 그 형태가 방대(方臺, 밑이 네모난 대로 된 것) 형인 것이 한대 고분의 것과 같다고 한다. 이 고분은 관(棺)을 넣는 현실(玄室)이 있으니, 나무로 만든 것을 목곽(木槨), 벽돌로 만든 것을 전곽(塼槨)이라 한다. 곽(현실) 속에는 관과 같이 부장(副葬, 같이 매장하는 것)되어 있는 공예품을 가지고 그때의 문화가 대개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덤 속에서 파낸 것을 보면, 동기는 형태가 고르고 수법이 정미(精美)하다. 박산로(博山爐)와 함께 한대의 여러 가지 동경(銅鏡)은 문양(文樣)을 새긴 것이 곱고, 아른거린다. 도기(陶器)에는 큰 항아리에서 식기(食器) 또는 일상 쓰는 그릇이 있는데, 대개는 주칠(朱漆)을 하였으나, 특히 녹유(綠紬) 또는 황갈유(黃褐紬)도 있다. 더욱 평양 부근에서 출토된 한대의 것으로는 칠기(漆器)이다. 안(案)⋅반(盤)⋅잔(杯)⋅함(函⋅상자) 등으로 흔히는 흑칠(黑漆) 또는 주칠인데, 어떤 것은 채칠(彩漆)로 사람⋅짐승⋅이상한 구름무늬(怪雲文) 등을 그리었다. 또 흑칠을 한 위에다 무늬(文樣)를 새기고 주칠로 메운 것이나, 쟁반과 그릇 가를 금(金)으로 도금도 하고, 양편에 금고리로 손잡이를 달기도 하였으며, 칠기에다 금속 장식을 붙이며, 바탕에 동물을 그리고, 구슬을 박아서 비쳐 보이게 한 것도 있으니, 그 화려한 솜씨는 오늘의 진보된 기술도 따르기 어렵다. 또 순금(純金) 장식품의 정교한 기술은 놀랄 만하다.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고, 귀⋅코를 막는다든지, 등에다 놓는 옥으로 만든 것도 있으며, 그것에 새긴 무늬도 섬려(纖麗)함이 비해보기 어려울 만하다. 금속 무기(武器)⋅마구(馬具)⋅고운 비단 또 직물의 조각(布片)도 나와 당시의 기술을 잘 알려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술품의 화려한 양식(樣式)과 솜씨는 한대 또는 그 뒤의 것이니, 이것은 조선에 옮겨와서 살던 한민족이 이곳에 전하고 간 것이며, 이것이 이후의 우리 나라 문화에 끼친바 적지 아니하여, 우리 부족 사회의 문화는 이러한 자극에 따라 발전 전개되게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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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로(博山爐)
박산로(博山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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