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1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Ⅲ장 삼국 시대 문화
  • 2. 삼국의 정치와 사회 경제

2. 삼국의 정치와 사회 경제

고구려

부족국가를 이루었을 때 그들의 전통적인 제도는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5?) 때 집정한 왕자(次大王)가 정비하였으며, 그후 다소의 변동은 있었으나, 대체로 중심되는 제도로 지니어 왔다. 통일국가로 발전할 때는 국왕을 중심으로 그 밑에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삼장관(三長官)을 두며, 전부터의 5부는 중앙이 신가(相加)에게 속하며, 외의 4부는 라살(耨薩)이란 대관을 한 명씩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국왕은 세습이었지만 신가는 국왕 라살과 중요한 관원들의 회의에서 선임(選任)하며, 3년에 한 번씩 개선하고, 라살은 세습이었다. 또 5부에는 각각 삼상(三相)과 오관(五官)을 두었다. 이러한 정치를 하던 그들의 현실 생활은 농경을 기본 생산으로 오곡 경작을 하고, 경작력(耕作力)은 이미 사람의 힘에다 가축의 힘을 합하여 이용하였으며, 일찍부터 관명(官名)에 육축(六畜)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들이 소⋅말⋅개⋅돗 등을 길러서 먹고, 그 힘을 이용한 것이다. 옷감으로도 모피와 가죽을 쓰며, 면포⋅마포⋅비단 등을 쓰며, 귀족들의 옷은 금⋅은⋅주옥으로 장식하여 사치를 하였다. 산업발달에 따라 그들의 부(富)가 형성되며, 점차 늘어나서 이식(利殖) 경제의 발전을 꾀하였다. 산업 발전에 따라 여러 가지 기술부문에 신분(身分)을 제한한 공장(工匠)은 하호(下戶, 奴隷?)로써 여러 가지 수공업(手工業)에 종사케 하였으며, 또 궁정(宮廷)을 중심한 과학 기술을 담당하고 노역(勞役)하는 일군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강력히 발전할 때에 있어서는 중앙 집권제로 국가를 통제하며, 밖으로는 육로로 중국에 왕래하여 제5세기 말엽 장수왕 때에는 배로 남제(南齊, 建元年間 ; 479~483)에 왕래한 일도 있어 내륙(內陸) 하천(河川)의 선박을 해양 선박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백제

통일국가 형성에 따라 중앙집권적 제도 밑에 각 관서(官署)를 두고 통치함에 관제에 16품(品)을 정하고, 중국식의 각 부 관리를 배치하였다. 국방에는 국도를 오부(五部)로 나누어, 각 부에 방령(方領) 한 사람씩을 두고, 700~1200명의 군대로 책임을 지게 하였다. 방령은 일품직(一品職)인 달솔(達率)이 되었다. 이 외의 각 성(城)은 주민들 각자가 방어의 책임을 분담하였다.

삼국 중 가장 기후 온화하고 비옥한 평야를 차지하여, 일찍부터 농사 경작이 발달되었다. 다루왕(多婁王) 6년(33 A.D.)에는 백제의 남방 여러 고을에 논(稻田)을 풀라는 명이 있었으니, 일찍부터 수전 경작으로 발전하게 되었었다.

더욱 구수왕(仇首王) 9년(222)에는 나라에서 명령으로 제방(堤防)을 수축(修築)시켰으며, 농사를 권하였다. 이때부터 이루어진 역사상 유명한 벽골제(碧骨堤, 全北 金堤郡 扶梁面 浦橋里)의 긴 제방은 백제의 농사가 크고 규모있게 발전되던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더욱 백제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살면서도 수리(水利) 개척에 힘써, 일본의 옛 책(古事記⋅日本書紀)에 백제지(百濟池)⋅한인지(韓人池)라는 기록을 남기었으니 이것도 농사를 위한 저수지(貯水池)를 말하는 것이었다. 또 공예 기술의 발달에 따라 철제 무기를 당 나라에 수출함은 물론, 기술자들이 일본에 가서 기술을 전하며, 국내에서도 일용 금속품의 제작을 하였었다. 도공(陶工)도 한 나라 것보다 정묘하고, 섬려한 수법으로 제작하며, 직조술(織造術)도 발달하여, 주부(綢部)라는 관서가 있어, 방직⋅염색을 맡았다. 기록에 나타난데 좇더라도 백제 사람들의 의복은 깨끗하였으며, 색깔로는 자주(紫)⋅검정(皂)⋅빨강(赤)⋅파랑(靑)⋅노랑(黃) 등을 이용하였다. 생활의 향상에 따라 의복이 정결하고 곱게 발달하며, 금⋅은⋅수(繡)로 장식하며, 비단(絹) 삼(麻)도 쓰게 되었다. 안의 생활의 향상과 함께 밖으로도 멀리 진출하여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란 책에도 적혀 있거니와 백제는 한때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 會稽)에 이르렀으니, 이곳 수천 리의 땅을 백제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았다.

확대보기
백제 토기(百濟土器)
백제 토기(百濟土器)
팝업창 닫기

신라

사로국이 부족을 통합하여, 왕위에 있었으나 대체로 신성(神聖)을 위주하면서도 공화적(共和的)이어서 혈통(血統)을 중히 여기어 중신(重臣)들의 추거(推擧, 선거)에 따랐고, 통일기에 와서는 계승제(繼承制)로 변하게 되었다. 또 국왕에게는 절대한 권한이 없고, 나라의 모든 큰 일은 협의하여 결정하였으니, 이것이 화백(和白, hebe-만주말, khebe-몽골말) 제도로, 모이어 의논한다는 뜻이었다. 관제는 중앙 집권제로 상하 17등의 계급이 있었다. 군제는 시위부장군(侍衛府將軍)을 비롯한 조직을 두며, 군대 조직으로는 구서동(九誓幢)⋅십정(十停)이 있어 왕도(王都)와 지방에 분치되었다. 정은 또 삼천동(三千幢)이라고 하였으며, 신라 시대의 이런 군호(軍號)는 23이나 있었다. 또 군대를 의미하는 육탁평(六啄評)이란 것도 있었다.

승직(僧職)은 중앙에 국통(國統)이 있고, 지방에는 각 주에 한 사람의 주통(州統)을 두었다. 진흥왕 때 지방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가 있었고, 뒤에 총관(總管)이라 하였다가, 도독(都督)으로 변하였다. 이 지방 장관 밑에 주조(州助, 行政)⋅장사(長史, 軍事) 등이 있었고, 군(郡)에 태수(太守), 현(縣)에 현령이 있어 중앙과 지방의 연락을 하며, 행정을 맡아 보았다. 신라의 군현제(郡縣制)는 일찍부터 되었으나, 한편 지방의 자치적(自治的)인 세력은 상당히 뿌리 깊었으니, 이것은 그 이후까지도 조선 정치제도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중앙 집권이면서도 자치적인 형태를 갖추고 온 것은, 우리 나라 역사의 특색의 하나이다.

특히 사회⋅경제 생활의 기초가 되는 신분 관계는 곧 관제와 관계가 깊었으니, 왕은 성골(聖骨) 또는 진골(眞骨)이었고, 17등 관위에서도 제1위에서 제5위까지는 진골에 한하였다. 이런 규정에 따라 색복(色服, 빛옷)⋅차기(車騎)⋅기용(器用, 일상 쓰는 제구)⋅옥사(屋舍, 집)에 걸쳐 생활의 일용 물자까지 계급적으로 제한하였다. 이어 이러한 신분제에 따라 경제 조직인 결부제(結負制)는 신라 때에 시작하여 이후 통일기에 와서는 여러 번 제도를 고치어 보았으나, 우리 재래 사회의 전통이 되었다.

가야(伽倻)의 변천

삼국의 사이에 있어 변천하여온 가야는 또는 가라(加羅)⋅가락(駕洛)으로도 기록한다. 가야는 변한(弁韓)의 땅에서 일어나, 부족국가로 육부로 분립해 있었다. 아라가야(阿羅伽倻, 咸安)⋅대가야(大伽倻, 高靈)⋅성산가야(星山伽倻, 또는 碧珍伽倻, 星州)⋅고령가야(古寧伽倻, 尙州)⋅소가야(小伽倻, 固城) 등으로, 그 중의 하나인 금관(金官)가야가 김해(金海)를 중심하고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서 세습적인 군주제를 갖고 한때 부족적인 통일 국가를 지니기에 애썼었다. 그들도 북에서 남으로 옮겨 살게 됨에 조선의 고문화의 전통을 지니며,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망하여, 신라의 금관현(金官縣)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신라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