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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Ⅲ장 삼국 시대 문화
  • 3. 삼국의 학술과 사상

3. 삼국의 학술과 사상

고구려

국내에서 원래부터 지녀온 문화에 중국의 진(晋)⋅송(宋, 六朝時代)과의 왕래에 따라, 외국 문화를 수입함에 먼저 한학(漢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의 학문으로 오경(五經, 易⋅詩⋅書⋅春秋⋅禮記)과 삼사(三史, 史記⋅漢書⋅後漢書)를 즐겨 읽었으며, 사전으로 옥편(玉篇)을 이용하고, 더욱 문선(文選)을 즐겨 읽었다. 또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는 대학(大學)을 두었으니, 대학은 관리 양성의 교육 기관으로서, 여기서는 한학을 가르치었으니, 귀족적 지식층에 중국 사상이 퍼져 들어오게 되었다. 더욱 영양왕(嬰陽王) 11년(600)에는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전부터 전해오던 역사책 유기(留記) 100권을 추리어 다시 신집(新集) 5권으로 개편(改編)하였으나, 이 책은 후세에 전하지 못하여 내용을 알 길이 없다. 한학과 함께 또한 소수림왕 2년에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부도(浮屠)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곧 절을 지어 초문사(肖門寺 또는 省門寺)에 순도를 있게 하고, 이불란사(伊佛蘭寺)에는 아도(阿道)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불교의 시초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 8년(391)에는 나라에서 불교를 권장(勸獎)하였고, 이어 고구려에서는 중국으로 유학가는 승려와 학생들도 생기어 불교 사상이 흘러 들어왔다. 또 고구려의 승려 담시(曇始)는 중국에 가서 불법(佛法)을 받아왔으며, 이에 따라, 중국에서 전개되던 불교의 여러 종파(宗派)의 법과 학리(學理)가 전하게 되었다. 낭대사(朗大師) 등의 삼론종(三論宗), 또 중국에 유학한 지광(智光)의 소승(小乘), 보덕(普德)의 열반(涅槃), 파약(波若)의 천태(天台) 등 각 종파가 전하여졌다.

사상적인 학문이 전해짐과 같이 실용적인 과학 지식과 기술도 받아들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일(日)⋅월(月)⋅성신(星辰)과 천체(天體) 방위(方位)를 표시하는 사신(四神, 靑龍-東, 白虎-西, 朱雀-南, 玄武-北), 십이지 신상(十二支神像) 등에서 고구려 사람들의 하늘에 대한 소박한 경험을 알게 한다. 또 천문도(天文圖)의 석각(石刻)과 관직에 일관(日官)이란 것이 있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일식(日蝕)⋅기상(氣象)⋅지진(地震)의 기록은 종교적인데서 과학적인 관측으로 발달하였으며, 영류왕(榮留王) 7년(624)에는 당에서 인덕력(麟德曆)을 얻어 왔다. 또 중국 의학(醫學)의 지식을 얻은 고구려는 다시 자신들의 과학으로 공부하여, 의사 덕래(德來)는 일본에 가서 의학을 전해 주었으며, 더욱 중국과는 약재(藥材)의 거래도 있어, 고구려의 것이 그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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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리 대묘 현무(遇賢里 大墓 玄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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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회의 발전과 함께, 인접한 고구려와 바다 건너 중국과의 왕래에서 또한 한족 문화의 섭취에 부지런하여, 백제 사람들도 오경(五經)⋅자(子, 경서 외의 여러 학자들의 문집)⋅사(史)를 읽었고, 글짓기와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모두 중국의 것을 본받았다. 그리하여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375)에는 박사 고흥(高興)이 백제서기(百濟書記)란 역사 책을 편찬하였다. 이어 또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침류왕(枕流王) 즉위하던 해(384)에는 호승(胡僧, 인도?) 마라난다(摩羅難陀, Mharananda)가 처음 불법을 전하여, 전파에 따라 사자성(泗泚城) 왕흥사(王興寺)는 채색 호화로운 모습을 강물에 비치며, 국왕은 배를 타고 절에 들어 불공을 올리게까지 번성하여졌다. 또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규모라든지, 석탑의 위엄있게 선 모습은 그 시절의 불교가 왕성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성왕(聖王) 때(523~554) 고승(高僧) 겸익(謙益)이 중인도(中印度)에 가서 계률(戒律)을 배워오고, 혜현(惠現)⋅관륵(觀勒)은 삼론(三論)을, 도장(道藏)은 성실(成實) 등의 새로운 종파(宗派)를 전하였고, 이것은 다시 혜총(惠聰)이 계률을, 관륵이 삼론을 일본으로 전하게 되며, 도장은 일본에 가서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남기었으며, 이 승려들은 다 일본에 있어 각 종파의 조종(祖宗, 시작한 사람)이 되었다.

또 정신 문화와 함께 실제의 과학⋅기술도 중국에서 많이 받아들이어서, 내 것으로 융화시키어 쓰기에 힘썼다. 백제에도 일관부(日官部)라는 관청이 있었고, 세시(歲時, 계절)를 중국에서와 같이 기록하였다. 즉 중국의 음양(陰陽)⋅오행(五行)의 지식을 이용하며, 송(宋, 중국 육조 시대)의 원가력(元嘉曆)을 수입하여서 쓰게 되었으며, 고구려와 같이 천체 기상 관측을 하게 되었었다.

의학도 약부(藥部)라는 관청이 있었고, 의박사(醫博士)와 채약사(採藥師)가 있어, 의술(醫術)과 약재(藥材)를 각각 맡아 보았으며, 약방(藥方)도 차츰 백제 중심의 것을 만들었으니, 백제 신집방(百濟新集方)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온전한 책은 없고, 일본의 의심방(醫心方)이란 책에 백제신집방의 약방이 인용(引用)되어 있음으로 알게 되었다. 또 중국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서는 백제의 인삼(人蔘)이 귀하다 하였으니 백제에서는 의약이 발전하였으며, 외국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신라

삼국 중 뒤진 신라도 중국의 한학을 받아 이용하면서, 한자를 빌어서 이두(吏讀)에 써서 향찰문(鄕札文) 기록에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여 내었다. 이두는 설총(薛聰, 7세기 중엽)이 만들어 썼다고 하나, 이보다 앞서 진흥왕(540~575)의 순수비(巡狩碑)에 나타나 있다. 또 진흥왕 6년(545)에는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國史, 신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또 눌지왕(訥祗王) 때에 묵호자(墨胡子)와 5세기 말엽 소지왕(炤智王) 때에 아도(阿道)가 고구려를 거쳐 일선군(一善郡, 慶北 善山)에 와서 비밀히 불교를 전하더니,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선포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은 국토를 넓히며, 불교를 신봉하여, 불교의 학문적인 전개와 신앙으로의 발전에 자리를 잡게 하였다. 이에 사회의 정돈에 따라, 불교는 교리(敎理) 연구에서부터 발전을 하였다. 원효는 해동종(海東宗, 元曉宗)의 조(祖)로서, 중국의 화엄종(華嚴宗)과는 아무 관계없는 독특한 화엄 교학(敎學)을 분황사(芬皇寺)에서 강(講)하였다. 그의 대화엄경소(大華嚴經疏)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당에까지 전하여, 효공소(曉公疏) 또는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그들의 주목한 바다. 의상은 입당(入唐)하여 지엄(智儼)에게 배워 화엄종을 전하며, 부석사(浮石寺) 등 10대 사찰에서 화엄의 설법을 하여, 신라화엄의 시조가 되었다. 자장은 율(律)을 전하며, 황룡사(皇龍寺) 탑을 세우고, 통도사(通度寺)를 창건(創建)하였다. 원측(圓測)은 당의 서명사(西明寺)에서 유식론(唯識論)의 대종(大宗)이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신라 사람의 과학도 다른 두 나라에 지지 않게 발달하였으니, 통일에 앞서서 천문 관측에서도 자기들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통일국가를 이루고,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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