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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삼국의 신앙과 화랑도

4. 삼국의 신앙과 화랑도

고구려

사회 발전에 따라, 민족신(民族神)을 숭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민족과 국가를 통일함에서 단일(單一)한 신앙의 대상으로 민족신을 두게 된 것이요, 불교를 받아들이며, 고국양왕은 국가적으로 불교 신앙을 권장하였다. 이에 숙명적(宿命的)인 새로운 세계관(世界觀)을 갖고, 저 세계를 동경하는 사찰(寺刹) 중심의 문화를 이루었다. 또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만주 즙안현(輯安縣) 통구(通溝) 평야를 비롯하여, 산성자(山城子)⋅유림자(楡林子) 지방과 반도 안으로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초산군(楚山郡) 등의 압록강 유역 지방과 평양 부근의 허다한 고분은, 그들의 죽은 뒤의 사람들의 생활을 생각하는 원시적 사후(死後)의 관념(觀念)에서 나온 문화적 산물이다. 특히 이런 고분의 벽화(壁畫)에 나타난 내외의 그림(夫婦圖, 平南 順川郡 北倉面의 天王地神墳, 龍岡郡 池雲面의 雙楹墳, 通溝의 三室墳)과 쌍영분의 말탄 사람의 그림(騎馬人物圖)도 있으며, 또 여러 고분의 벽화에는 일⋅월⋅성신과 사신상(四神像)⋅십이지 신상⋅가무 행렬 등이 보인다. 이런 것은 세상을 떠난 무덤 속의 주인공을 위하여 그의 생전의 생활하던 모습의 회고를 표시하며, 죽은 뒤의 영혼의 위안과 영생(永生)을 바라는 뜻을 그리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세관(來世觀)을 가진 고구려 사람들에게 불교가 들어오고, 또 제7세기 중엽에는 직접 당에서 보낸 도사(道士)에게 도덕경(道德經)의 강화를 듣게도 되었었다. 그러나 불교 신앙은 힘차게 널리 퍼지어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 생활을 지배하였으니, 도림(道琳)⋅혜량(惠亮)법사와 덕창화상(德昌和尙) 같은 승려들은 굳건한 무사 정신을 지니어 조국 방위에 힘써 공이 컸었다.

백제

백제 사람들도 통일 사회로 발전할 때는 역시 민족신을 숭배하며, 고구려와 같이 호화롭고 변화가 많은 고분의 벽화는 남긴 것이 없어도, 고분에 간직하는 고인(故人)을 생각하는 정(情)은 애틋하며, 부여(扶餘) 능산리(陵山里)의 고분의 현실(玄室)의 벽에는 사신상을 그리고, 천정에는 연화문(蓮華文)⋅비운문(飛雲文)을 곱고 연연하게 그리었으니, 고구려에서와 같이 죽은 이의 영혼을 보호하는 생각을 아름답게 표시한 것으로, 자연적인 내세관에 불교 사상을 받게 됨에 그 신앙 속에서 살아 왔다. 백제에는 미륵 신앙이 전파되고, 대체로는 남방에서 계률적(戒律的)인 것을 받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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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의 천정 벽화(陵山里 古墳)
능산리 고분의 천정 벽화(陵山里 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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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라의 종교 생활은 역시 사회가 발전하는데 따라 변천하였으니, 원래는 무(巫)의 신앙이 정치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조신화(始祖神話)에는 태양 숭배의 신앙이 나타나고 뒤에는 삼산(三山)⋅오악(五嶽)과 자연의 숭배에서, 한학이 전해오자 유교적 사상에서 조상(祖上)을 숭배 제사하게 되었다.

이어 불교 신앙은 이차돈의 순교에서부터 차츰 널리 퍼지며, 법흥왕과 진흥왕이 국왕으로 불교를 신봉함에 따라, 중국의 양(梁)⋅진(陳)의 승려들이 신라에 오며, 또 신라 승이 저곳에 유학하여 중국의 남북의 불교를 모두 신라로 받아옴에 일찍 합류하여, 초기에는 왕법적(王法的)인 사상에서 일어났으니, 원광(圓光)⋅자장(慈藏)⋅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은 문학에 있어서도 다 명승이며, 호국(護國) 사상이 강하였다.

이러한 호국 사상에 앞서 우리 나라 역사에 맥맥(脈脈)히 흐르는 아름다운 정신은 신라 때에 그 꽃이 피인 화랑(花郞)의 도(道)일 것이다.

성덕왕(聖德王, 제8세기 초엽) 때,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와 당나라 사람 고음(顧愔)의 신라국기(新羅國記) 등이, 화랑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였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이 책의 기록이 다른 곳에 단편(斷片)으로 전하여 화랑에 관하여 알게 한다. 일찌기 진흥왕(眞興王) 23년(562)에 가야(伽倻)를 정벌한 장수 이사부(異斯夫)를 따라 전공(戰功)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의 사실은 역사상 가장 오래인 것이며, 진평왕(眞平王) 때의 김유신(金庾信)도 화랑으로, 그에 복종한 무리들을 용화도(龍華徒)라 하였다. 김유신은 진평왕에서 문무왕까지 오대(五代) 간의 명장으로, 태종(太宗) 무렬왕(武烈王)의 반도 통일에 크게 활약한 영걸이었다. 또 화랑이었던 장군 흠순(欽純, 庾信의 아우)은 자기 아들 반굴(盤屈)에게 명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戰死)하게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게 하였다.

화랑은 나이 15세 쯤의 귀족 출신의 젊은 소년들로 아름답게 차리고, 몸을 닦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진충보국(盡忠報國)하는 용장(勇壯) 의열(義烈)의 정신을 갖고 활동한 무리였으며, 그 수효는 수백에서 천에 가까웠다.

또 그들은 국내의 명산(名山)과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서 놀았으니, 그들이 산 푸르고 물 맑은 곳을 찾아 놀았던 풍류(風流)는 정신을 가다듬고 기백을 기르던 것이었다. 화랑은 신라 사회 무사(武士)의 전형(典型)이고 정수(精粹)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신라 통일의 근간(根幹)이 되었다. 향가(鄕歌)에도 혜성가(彗星歌)⋅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월명 도솔가(月明兜率歌)⋅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등은 화랑을 노래한 것이다.

신라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화랑의 도를 현묘(玄妙)한 도라 하고, 그것은 삼교(三敎) 즉 유(儒)⋅불(佛)⋅도(道)의 정신을 합친 것으로, 안에서는 효(孝)를 하고 밖으로 나라에는 충성을 다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화랑의 정신이며, 통일기에는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이 정신이 전하였고, 불교는 화랑도의 국가사상과 함께 아울러 통일기의 사상을 이루었다. 특히 원광은 세속(世俗)적인 오계(五戒)로 충성(事君以忠)⋅효도(事親以孝)⋅신의(交友以信)⋅용감(臨戰無退)⋅자비(殺生有擇) 등을 말하였다. 이런 교도(敎導)를 받은 사람들은 발흥기의 신라가 백제와 싸우매 용감히 나아가 싸웠으며, 진흥왕이 창건한 실제사(實際寺)의 취도(驟徒)는 승려로서 국난에 법의(法衣)를 벗고 무장을 하고 종군하였다. 이리하여 승려들도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웠었다. 화랑은 또 국선(國仙)이라 하며, 그 도(道)를 풍류(風流) 또는 풍월도(風月道)라 하였다. 이런 정신은 고구려에도 있었고, 백제에도 있었으며, 신라를 이은 고려, 그후 조선에도 흘러내린 전통적인 정신이다. 원래는 조국(祖國)의 강토를 사랑하여, 각자 몸소 신명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보호하자는 것이니, 그들이 명승의 터를 찾아다닌 것은 풍류⋅풍월도라 할지라도 본질은 아름다운 내 강토를 지킬 마음을 가다듬는 수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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