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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Ⅳ장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문화
  • 1. 신라의 통일과 민족의 형성

1. 신라의 통일과 민족의 형성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500~514) 때에 국호를 신라(新羅)라 하며, 국내 산업을 권장하고, 중국 제도를 좇아 율령(律令)을 펴고,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고, 불교의 수용(受容) 국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어 법흥왕⋅진흥왕 대에 이르러 신라 발전의 터를 닦아 놓게 되었다. 진흥왕 때는 반도의 중추부를 차지하며, 남해와 서해 방면으로 나아가 활동할 길을 열고 중국과의 왕래를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이 때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정돈한 수(隋)가 일어나면서,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더니, 고구려의 사자(使者)가 돌궐(突厥) 왕정(王廷)에 왕래함을 본 수에서는, 영양왕 9년(598) 고구려의 군대가 요서(遼西) 지방을 들이침에 수륙(水陸)의 대군대로 쳐들어왔으나 고구려에 대항하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다. 더욱 수군은 살수(薩水, 淸川江)에서 대패하였다(612). 수의 양제(煬帝)는 화를 내고 대군대를 다시 보냈으나, 오는대로 패하여 돌아갔으며, 이로서 나라를 당에게 빼앗기었다.

이 사이 백제는 수에 통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백제를 들이치며, 신라에게 빼앗긴 북한산성(北漢山城) 일대를 공략(攻略)하였으나, 신라는 싸워 막았다. 백제는 의자왕(義慈王)자신이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城)과 대야성(大耶城, 慶尙道 陜川=합천, 신라의 要塞)을 빼앗고, 고구려와 합하여 당항성(黨項城, 京畿 南陽)을 들이치자, 신라는 당에 통하여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 침략을 멈추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 태종도 대군을 보내 요동으로 침입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한 신라는 친당책(親唐策)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애써 당의 후원을 얻게 되었다.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게 되자, 장군 김유신은 황산벌(黃山原, 忠南 連山平野)에서 백제군을 무찌르고, 당나라 군사는 웅진강(熊津江, 錦江) 어구의 싸움에서 이기자 웅진성과 사자성을 함락시킴에, 백제는 건국 678년 만에 망하였다. 백제의 왕족 복신(福信)은 왕자 풍장(豊璋)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고, 부흥 운동에 힘썼음에, 나당 연합군이 다시 백제를 공격할 새, 복신은 풍장에게 살해 당하고, 주류성(周留城, 忠南 扶餘?)에 있던 풍장의 세력은 깨지어 백제의 흔적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당에서는 백제 멸망 후에는 계속 고구려를 들이쳤으나, 연개소문은 쉽사리 당을 물리쳤다. 그가 죽은 뒤 아들 남생(男生)이 국정(國政)을 맡아보매, 아우 남건(男建)⋅남산(男産)과 다투자, 남생은 국내성(國內城)으로 피하여 당에 항복하고(666), 연개소문의 아우도 신라를 치게 하였으므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이 기회를 보고 당의 출병(出兵)을 청하자, 당은 다시 요동으로 쳐들어왔으나, 압록강을 못 건느더니, 보장왕(寶藏王) 28년(668) 강안의 방위군을 무찌르고 평양성에 몰려옴에, 문무왕도 친히 군대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케 됨에, 705년의 사직의 운명은 끝마치었다. 그러나, 백제의 옛 땅에는 당의 웅주도독부(熊州都督府)가 있고, 고구려의 고지(故地)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둠에 문무왕은 백제의 땅에서 당의 세력을 내몰기 시작하여, 당나라 군대와 싸워 문무왕 16년(676) 후에는 백제의 옛터와 고구려 영토의 남부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성덕왕(聖德王) 34년(735)에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신라는 삼국의 통일에서 세 나라 영토 안에 있는 같은 민족을 규합하여 민족적인 단일(單一)국가를 형성하며, 당나라의 세력을 조선 민족의 강토 안에서 내몰기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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