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1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Ⅳ장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문화
  • 2. 정치와 경제

2. 정치와 경제

신라에서는 당의 군사력(軍事力)을 이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자, 곧 그 세력을 밖으로 내모는데 성공하여, 대동강(大同江, 浿江)과 덕원(德源) 부근의 니하(泥河)를 연결하는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차지하게 되었다. 모든 정치제도는 역시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었다. 국정의 전체적 관할은 집정성(執政省)에서 하며, 최고의 자리에 시중(侍中)을 두었고, 인사(人事)는 위화부(位和府), 조세는 창부(倉府), 예악⋅교육은 예부(禮部), 군사는 병부(兵部), 율령(律令)은 좌우 이방부(左右理方部), 공작(工作)⋅공장(工匠)은 예작부(例作府), 관리의 감시⋅처벌은 사정부(司正府)에서 맡았고, 지방에는 주⋅군⋅현을 두었으며, 그 분할은 신라의 본국 경내에 3주, 백제 땅에 3주, 고구려의 옛터 남부에 3주를 두어, 모두 9주로 분치하였으며, 각 주의 소경(小京)은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왕도를 중심한 도시(都市)도 발전하며, 통일 시대에 있어서의 경제 시설로 동시전(東市典)⋅서시전(西市典)⋅남시전(南市典)의 시장(市場)이 있었고, 교통 관계는 왕도를 중심하고, 경도역(京都驛)⋅고역전(尻驛典) 등의 우역(郵驛)제도가 확립되었다.

전성기의 경주는 18만에 가까운 호수에 1,300여의 방(坊)으로, 넓이 55리었다. 그 중에 35의 금입댁(金入宅), 즉 부호의 큰 저택이 있었으니, 지금도 택장(宅墻)이라 할만한 장벽(墻壁)의 기단(基壇)이 발견된다. 궁전 건축은 호화로웠고, 민가 또한 기와집이었고, 초가는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전되던 신라의 경제도 농업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에서는 개간⋅관개(灌漑)⋅농구의 개량과 천후(天候)에 따른 재해(災害) 등에 관하여 애써 권농(勸農) 정책을 세웠으며, 한편 토지의 관리에 주력하였다.

토지제도는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내외의 관료들에게 주든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매년 조(租)를 받게 하더니, 경덕왕(景德王) 6년(757)에 다시 녹읍을 주었으니, 녹읍에 따른 공전제(公田制)가 있었고, 녹읍제가 폐지됐을 때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주었고, 당의 제도를 따른 반전제(班田制)도 실시된 것 같다. 그러나, 토지의 사유(私有)도 발전되어 왔다. 즉 앞서 사전(賜田)제가 있었으니, 법흥왕이 금관국(金官國)을 통합할 때(532), 그 국주(國主)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던 것이다. 사회의 변천에 따라, 국가 진호(鎭護)의 사상에서 대사(大寺)는 대개 국가 보호를 받아 번영하여, 관제에도 감은사 성전(感恩寺成典)이라 하는 것이 있어, 사원 건축 수영(修營)을 담당하였고, 이것은 봉덕사(奉德寺)⋅영묘사(靈廟寺)⋅영흥사(永興寺) 등에도 있었다. 또 군소 사찰 중에는 개인의 장전(莊田)이나 사제(私第)를 던지어 절이 되었으니, 감산사(甘山寺)는 감산의 장전을 절로 만든 것이고, 유덕사(有德寺)는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의 집이요, 민장사(敏藏寺)는 민장(敏藏) 각간의 집이었다. 이것은 곧 토지제도를 문란케 한다 하여, 문무왕 4년(664)에는 이것을 금지하였으나, 왕실에서 많은 토지를 절에 내놓았으니, 효소왕(孝昭王) 2년(693)에는 백률사(栢栗寺)에 전(田) 일만경(一萬頃)을 바치고, 혜공왕(惠恭王) 15년(779)에는 추선사(鷲仙寺)에 공덕(功德) 보전(寶田) 30결(結)을 바치었다. 토지제도와 함께 조세제도도 대개 중국과 같이 조(租)⋅용(庸)⋅조(調)의 제도를 밟았을 것이요, 따라 수공업의 발전은 직물에 면(綿)⋅마(麻)⋅저(苧)⋅견(絹) 등이 생산되고, 특히 궁정에 속한 공장에서는 조하금(朝霞錦)이니 대소화어아금(大小花魚牙錦)이니 하는 고급 직물도 생산하였다. 또 복식품(관⋅귀걸이⋅반지⋅띠)⋅무기⋅농기구⋅불상 등 여러 가지 금속 공예품의 제작도 발달되었으며, 여기에는 국가적으로 철유전(鐵鍮典)이 있어, 금속 공예를 담당하며, 와기전(瓦器典) 등이 도기⋅와전(瓦塼)의 제작을 관할하였었다. 국가의 발전과 왕실 중심의 수공업의 발전은 통일 신라의 안정과 함께 국내 상업의 발전과 외국 무역을 번성케 하였다. 국가에서는 경주에 시장을 두며, 그것을 관리하는 시전(市典)을 두었고, 역(驛)과 역을 관할하는 관청이 생기었다. 또 외국과의 왕래에 따라, 교통과 무역이 발전되었다. 말기에 와서 공식적인 교통이 차츰 쇠잔(衰殘) 함에 따라 개인적으로 상인들의 해상 활동이 왕성해졌다.

유명한 장보고(張寶高)는 흥덕왕(興德王) 3년(828) 청해진(靑海鎭, 全南 莞島)을 근거로 대사(大使)가 되어 서남 해안의 경비를 하며, 한편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해상으로 활동할 때는 중국의 초주(楚州, 江蘇省 淮安縣)와 사주(泗州)⋅연수향(漣水鄕, 江蘇省)에는 신라 사람들의 거류지(居留地)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또 등주(登州, 山東)에는 신라의 사원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이 있어, 신라 사람들의 불교 신앙의 중심이었다. 일본 승려 원인(圓仁) 자각대사(慈覺大師) 같은 이는 당에 가서 신라 법화원에 머물렀고, 또 신라의 배를 타고 돌아갔다. 그의 입당 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신라 해상 활동을 전하여 주는 문헌(文獻)으로 귀중하다. 이런 길을 통하여 행한 무역에서 신라는 금⋅은⋅동과 금속 제품, 인삼⋅고급 직물⋅말⋅노예(奴隷) 등을 수출하고, 비단⋅향료⋅차⋅서적 등을 수입하였다.

국가의 발전에 따른 도시의 경제적인 발달은 먼저 말한 경주의 도제(都制) 할지(割地)의 규모 정연하며, 색복(色服)⋅차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의 호화 다채(多彩)로웠음은 아울러 신라의 서울 거리가 반도에 있어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게 하였다. 일반 사람의 생활도 풍성하였으며, 불교가 왕성하매 시중이나 주변에 허다히 산재한 원근의 사찰(寺刹) 또한 당시 사람들의 정신 생활의 본거지였으며, 도시의 한 풍물이었으니, 저 유명한 봉덕사의 종이 새벽과 해 저물녘에 은은히 혼신(昏晨)을 고함이야말로, 신라 문화의 유구한 여운(餘韻)이었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도 구차히 살던 사람이 얼마던지 있었으니, 삼국 유사에 전하는 직정사(直定寺)나, 김대성(金大城)⋅손순(孫順)⋅효종랑(孝宗郞) 등의 얘기는 그 얘기가 유⋅불⋅선 삼교(三敎)의 색채를 띠었으나, 경주의 일부 사람들의 구차한 현실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