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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Ⅳ장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문화
  • 3. 신앙과 학술

3. 신앙과 학술

초기의 학승(學僧)들의 활동이 국 내외에 떨치며, 통일기의 전후에 걸쳐 여러 종파가 신라 사람의 불교의 학으로, 신앙으로 받아들이어졌다. 당나라에서 유식론의 대가이었던 원칙의 문하인 도증(道證)은 그의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경흥(憬興)은 유가(瑜伽)의 시조가 되었고, 또 천태종(天台宗)의 법화경(法華經)도 연구되고, 밀교(密敎)의 총지종(摠持宗)⋅신인종(神印宗)도 전해지며, 성실(成實)⋅구사(俱舍) 등의 소승(小乘) 불교도 전하여 행하여졌다. 당에 건너간 승려들도 많았으나, 혜초(慧超)는 일찌기 당에 가서 밀교를 배우고 남해(南海)⋅인도⋅중아(中亞)를 거쳐 중국에 돌아와 오대산(五臺山)에서 역경(譯經)에 종사하였으며, 그의 인도 방면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제8세기 동서 교섭 관계와 당시 그 방면의 사정을 알게 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입당한 승으로 아리야발마(阿離耶拔摩, Aryavarma) 외의 여러 사람이 인도에 구법(求法)하러 갔었다. 더욱 일본 자각대사의 순례행기에 보인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에서는 신라의 승속(僧俗)으로만 신라식(式) 생활을 하며, 불도에 종사하였다. 신라 불교는 여러 종파 중에서도 밀교적인 것과 의상이 전한 화엄종이 의상 문하에 지통(智通)⋅표훈(表訓) 등이 나와 전등(傳燈)을 계속하여 발전하였고 원효의 뒤는 뚜렷하지 않다. 선종(禪宗)은 선덕왕 때(632~647) 법랑(法朗)이 처음 전하고, 다음 신행(神行, 信行)은 법랑에게 배우고, 다시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禪)을 전하여 해동 선종의 선구가 되며, 헌덕왕(憲德王) 13년(821) 도의(道義)가 당에서 돌아와 선(禪)을 전하니, 신라 선종 울흥(蔚興)의 발단으로, 입당의 고승(高僧)들은 신라에 돌아와 각종의 선(禪)을 열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은 가지산(迦智山)의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선종의 광포(廣布)에 따라, 이에 다른 교학(敎學)의 파로서 교종(敎宗)이 대립 논쟁하게 되었다. 말엽에 와서 산천 지리의 설을 주장 창도(唱道)한 도선(道詵)은 선종의 출신으로, 이어 고려 시대 불교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치었다.

불교는 원시적인 사상에서 배태발전한 화랑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함에, 화랑도가 진충보국의 정신에서 활동함과 같이 불교도는 호국사상을 지니어 통일 신라에 이바지하였다.

한학은 일찍부터 정치에 따르는 학문으로 배워왔으나, 신문왕 2년(681) 예부(禮部)에 국학(國學)을 두고,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킴에 사서(四書)⋅오경(五經)을 비롯하여 문선(文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익히고, 그 제도로는 박사(博士) 몇 사람과 조교(助敎) 한 사람이 있었다. 한학의 실용과 함께 한문학이 전개되어 전설(傳說)로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찬자(撰者) 불명의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등 몇 가지가 있었고, 문무왕 때의 강수(强首)는 문장이요, 말기의 최치원(崔致遠, 號 孤雲)의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은 지금도 전하여, 당시의 문장을 엿보게 하며, 비문(碑文) 등이 따로 고운의 글을 전한다.

또 자연 과학도 자기 경험의 전개와 중국 문화의 소산(所産)을 받아들이어 한층 실용화 하였다. 역법(曆法)은 원시적인 데서 경험을 통하여 발전되었으나, 문무왕(文武王) 14년(674)에 당에 간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배워와서 전함으로 새 역법으로 고쳐 썼다. 한 20년 뒤에는 승 도증(道證)이 당에서 돌아와서 천문도(天文圖)를 바치었다. 관측에는 앞서 말한 첨성대를 이용하며, 관측에는 천문박사가 있었다. 또 누각전(漏刻典)이란 관에는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두어 시간 측정을 하였다. 천문사상(天文思想)은 다른 문화면에도 표현되었으니, 성좌(星座) 운행을 이해하고, 방위(方位)를 표시하는 십간(十干)⋅십이지(十二支)의 사상은 능묘(陵墓)의 상석(像石) 등 석조(石造) 공예물에도 표현되었다. 즉 괘릉(掛陵)의 미석(未石), 전하기를 김각간묘(金角干墓)라 하는 데의 진석(辰石), 성덕왕릉(陵)의 신석(申石), 흥덕왕릉의 오석(午石) 등이 그 유물이다.

천문⋅역학을 잘 이해하고 실용한 그들의 수학(數學)은 중국적인 지식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수학 교육에는 산학박사(算學博士)와 산학조교(算學助敎)를 두고,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 등을 교수하였다. 이런 수학은 다 정치⋅경제⋅건축 등에 실용할 수 있는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곧 이 수학 지식을 실제에 응용하여 훌륭한 문물을 후세에 끼치고 있다. 이러한 실례는 지금 빈 터전만 남고, 그 전날의 호화로운 꿈 자취 깃들이는 망덕사(望德寺)의 유지(遺址)가 탑파(塔婆)와 수학적인 비례로 짜이었으며, 천군리(千軍里) 사지(寺址)가 석탑의 크기와 비례를 맞추고 있고, 또 절터의 쌍탑(雙塔)이 등비 급수적(等比級數的) 체감(遞減)을 보이고 있다. 불국사(佛國寺) 다보탑(多寶塔)도 등비 급수적 체감을 적용하고, 석굴암(石窟庵)은 기하학(幾何學)적 계획을 실용화한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남산(南山) 밑의 포석정(鮑石亭) 또한 10간 12지의 사상에 따르며, 하천 유수(流水)와 곡수(曲水)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이용하여 석구(石溝)를 축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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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多寶塔)
다보탑(多寶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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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에 예속된 의학(醫學)은 효소왕(孝昭王) 원년(692)에 처음으로 의박사(醫博士)를 두어 본초(本草)⋅갑을경(甲乙經)⋅소문경(素問經)⋅침경(針經)⋅맥경(脈經)⋅명당경(明堂經)⋅난경(難經) 등을 학생들에 교수하였다. 본초는 약재(藥材), 소문경⋅난경은 중국의 기초 의학, 갑을경⋅침경⋅명당경은 침술(鍼術)⋅맥경은 진맥(診脈, 診斷學)에 대한 것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궁정에 독점된 중국 의학 외에 신라의 독자적인 약방(藥方)도 이루어졌으니, 일본의 의심방(醫心方)이란 책에는 신라 법사방(新羅法師方)이 전한다. 이것은 신라 불승(佛僧)들이 쓰던 상약방(常藥方)일 것이다.

또 고려(高麗) 예종조(睿宗朝, 1106~22) 사람인, 김영석(金永錫)은 신라의 의서(醫書)에서 뽑고 추려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만들었으니, 신라 사람은 중국 의학에서 따로 떨어져 의서의 편술을 하였으며, 그것이 12세기까지 세간에 전하여 있었던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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