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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Ⅴ장 고려의 문화
  • 1. 고려의 통일과 변천

1. 고려의 통일과 변천

신라는 선덕왕(宣德王, 第37代) 이후 중앙에서는 왕위(王位) 계승에 쟁탈전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는 호족(豪族)과 살기 어려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었다. 즉 혜공왕(惠恭王, 第36代) 때부터 김씨 왕족 사이에 모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어, 선덕왕에서 150년 동안은 국왕을 서로 살해하며, 왕위에 올랐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남에 세상은 소요하고, 중앙 정부는 진압할 힘도 없었으며, 각 주군(州郡)에서는 공부(貢賦)도 중앙에 보내지 않아 국가 재정도 궁핍하였고, 이에 왕실에서는 사람을 보내서 공부를 재촉케 되자, 인심은 점점 나라에서 떨어지며, 각처에 도적들이 일어나고, 이것은 합치어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양길(梁吉)은 북원(北原, 江原道)에서 궁예(弓裔, 신라 왕족이라 하였음)를 써서 지금의 경기 강원도 쪽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양길에 반하여 왕건(王建)을 비장(裨將)으로 부리어 경기 충청도를 점령하고,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며, 마진국(摩震國)을 세우더니, 국도를 철원(鐵圓, 鐵原 부근)으로 옮기고 대동강 방면까지 나아가서 경략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었다(911). 앞서 신라 서남해(西南海)의 수장(戍將)인 견훤(甄萱)이 무진주(武珍州, 光州)에서 일어서 전라 경상도 쪽을 공략하고, 완산(完山, 全州)에 국도를 두고, 나라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였음에, 다시 삼국 시대의 형세를 나타내어 삼국이 다투게 되었다. 궁예는 자기를 미륵불(彌勒佛)이라 하며, 모든 일을 불교 신앙에 중심하려 하며, 재래의 풍수(風水) 사상에 잡히어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年號)까지 썼다. 그의 불교에 치중한 유물로는 철원성(鐵圓城, 鐵原郡 北面 月井里 楓川原)에 남아 있다. 모든 것이 규모가 크며, 당시에 남긴 석등(石燈) 같은 것도 덩치가 크고, 북방적인 웅건한 품은 궁예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큰 뜻을 엿보게 한다. 궁예는 자기 비장 왕건에게 내몰리어 태봉국의 웅지(雄志)는 사라지고, 왕건에게 계승되었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불렀다(918). 이 때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들이쳐 빼앗고, 진례(進禮, 慶南 金海地方)를 들이침에 신라의 경명왕(景明王)은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여, 왕건은 견훤을 물리치며, 자기 세력을 늘이어 갔다. 견훤은 다시 경주를 들이쳐,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을 잡아 자진(自盡, 자살)케 하고, 왕족 김부를 국왕으로 세웠다. 또 왕건이 쳐들어가자, 공산(公山, 永州地方)에서 왕건을 무찔렀으나, 경순왕(敬順王, 金傅) 4년(931) 고창(古昌, 安東)의 싸움에서 패하며, 뒤에 왕위를 아들 신검(神劍)에게 빼앗기자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신검은 왕건에게 대항하여, 일이천(一利川)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후백제는 고려에 항복케 되었다. 이에 대세는 결정되었으므로, 경순왕은 고려의 서울 개성(開城)으로 왕건을 찾아 항복함에(敬順王 3年, 高麗太祖 13年, 935) 신라의 사직을 끝마치었다.

왕건 태조는 국내 통일을 완성하며, 먼저 대외 관계에 유의(留意)하여 대륙의 오대(五代) 제국(諸國)과 자주 왕래하여 국교(國交)를 맺었고, 광종(光宗) 때(960)에 송(宋)이 건국함에 통빙(通聘)하며, 국내의 집권화(集權化)에 힘썼다. 이어 성종(成宗) 때 만주 방면의 계단국(契丹國)과 압록강 반(畔)에서 접촉하매 대외적으로 송과 요에 양면적(兩面的)인 통빙책(策)을 쓰게 되매, 외부의 자극을 안으로 중앙 집권화에 이용하여 착착 개혁을 하였다. 계단은 고려에 복속을 강요하며, 군대를 몰아 왕경(王京) 개성(開城)을 함락시키매, 현종은 남으로 피하여, 계단이 고려의 친조(親朝)를 요구함을 거절하였다. 다시 서북계(界)의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산(鐵山)⋅곽주(郭州)⋅귀주(龜州) 등, 8성(城)을 요구하매 이것을 또 거절하자, 현종 6년(1015)부터 10년 사이에 네 번이나 그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후 고려는 송과 계단 두 나라에 대한 이원적(二元的)인 관계를 계단이 망할 때까지 약 120년 간 지니었었다. 그동안 안으로는 문화의 극성기를 이루고, 이면에는 고려 귀족의 성숙과 나아가 왕실과의 혼인에서 외척(外戚)들이 전횡(專橫)을 하게 되었다. 선종(宣宗) 때 만주 알추카(阿勒楚喀) 지방에 여진(女眞)의 완안씨(完顔氏)가 일어나서 동여진(東女眞)까지 복속시키고, 고려 동북면에 접경(接境)하게 되었다. 고려는 이에 여진에 대비(對備)하기 위하여 예종(睿宗) 2년(1107) 윤관(尹瓘)을 보내어 정벌하고,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通泰)⋅진양(眞陽)⋅숭녕(崇寧)의 구성(九城)을 두었으나, 뒤에 이를 포기하고, 그들과 통빙하던 80년 사이는 무인(武人)들이 머리를 들고 나섰으니, 의종(毅宗) 24년(1179)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수령으로 문신(文臣)을 몰아내고, 국왕을 바꾸는 등, 무인들이 활발히 활동함에 따라, 또 그들 상호 간의 항쟁이 심하여지니, 그 틈에 권신(權臣) 들은 모두 살해 당하고, 지방은 혼란해졌다. 이 혼돈 상태를 명종(明宗, 1171~) 초년에서 신종(神宗, ~1204) 말년까지에 차츰 정돈되매, 무인 최씨(崔氏) 일문(一門)이 집권(執權)하였다. 최씨는 충헌(忠獻)이 명종 말년 이후 고종(高宗)까지의 수십 년 동안, 4대(代)나 정권을 손에 잡고 강대한 가병(家兵)을 거느리며, 광대한 사전(私田)을 갖고 전제(專制) 정치를 하였다.

때마침 몽골의 세력이 만주를 거쳐 고려에 미치니,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遷都)하여 40년 간의 강도(江都) 시대를 이루더니, 집권하던 최씨가 강화도에서 그 세를 잃자, 몽골에 반항하던 고려 왕실은 개성으로 다시 돌아오니, 몽골은 일본의 남송(南宋)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일본 정벌을 추진시킴에 고려의 군사와 물력(物力)을 동원시키었다. 이어 고려는 모든 면에서 몽골화(蒙骨化)를 강요 당하여 문물제도에 몽골의 영향이 컸었다. 더욱 고려 왕실은 원(元)과 혈연적(血緣的)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약 86년 간 그의 통치 시대를 이루었으나, 공민왕(恭愍王) 때 원이 와해(瓦解)되어 북으로 옮기자, 공민왕은 다시 고려 재흥의 기운을 타고, 배원(排元) 운동을 일으키어, 동북 함경도 방면, 서북의 평안도와 만주로 들어가, 일시 심양성(瀋陽城, 奉天)을 공격하였으나, 국내에는 북천(北遷)한 원에 뜻을 둔 파와 새로 일어난 명(明)에 대하는 향명(向明)파와의 갈등이 20여 년을 끌더니, 고려의 장수 이성계(李成桂)는 만주 출병군을 위화도(威化島)에서 돌려, 향명의 태도를 뚜렷이 하고 돌아와 전제(田制) 개혁을 주장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이를 단행하여 구 세력(舊勢力)을 다시 편성하였으니, 고려 왕실은 곧, 이성계 일파의 계획에 따라 괴멸(壞滅) 되었다.

고려의 판도는 구 신라의 강역 전부를 계승하였으나, 북방 이민족과의 접촉 교전(交戰)으로 국경선에 출입은 있었으나, 대체로 서북은 압록강 만의 용만(龍灣, 義州)에 달하였고, 동북으로 북관(北關)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북진하여 명천(明川) 귀문관(龜門關) 이남에 달하였다. 남으로는 해상에서 탐라(耽羅)를 복속시키어 제주도(濟州道)를 남쪽의 한계로 삼았다. 고려가 시대적으로 북방의 여러 강국과의 교섭에 고난을 겪었으나, 고구려의 고토(故土)를 회복하려는 생각에 군략적(軍略的)인 의욕(意慾)은 태조 왕건 이후 공민왕 때까지 일관하여 행동으로 표시되었다. 즉 한때는 계단(契丹, 遼)⋅여진(女眞, 金)의 침입, 몽골(蒙古, 元)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으나, 고려 왕실은 고토 회복을 지시한 태조의 훈요(訓要)를 끝까지 굳게 신봉하여 실천에 힘을 다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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