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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고려의 정치와 경제

2. 고려의 정치와 경제

신라 말기 혼란 시대에 여러 곳에 호족(豪族)들이 발호하였으나, 호족의 한 사람인 왕건이 통일 건국하매, 지방 호족들을 다시 어루만져서 향리(鄕吏)로서 사심관(事審官)을 시키어 안정시키는 한편, 중앙에서는 태조에서 경종 때까지 약 60여년 간은 문무(文武) 양반(兩班)의 구별없이, 태조 2년(919) 삼성(三省)⋅육상서(六尙書)⋅구시(九寺)⋅육위(六衛) 등을 두었던 것은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아울러 썼던 것이다. 이어 성종 때는 당⋅송의 제도를 따라 개편하였다. 더욱 규모에 있어, 성시(盛時)인 문종(文宗) 때는 삼사(三師)⋅삼공(三公) 아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상서성(尙書省)이 관리 총관을 맡고, 육상서(六尙書) 외에 삼사(三司)는 중외(中外)의 전곡(錢穀) 출입의 회계를 맡았다. 중추원(中樞院, 樞密院)은 왕지(王旨)⋅숙위(宿衛)⋅군기(軍機)를 맡았다. 이 외에 중국식의 백관(百官)의 제를 벌려 놓았으나, 인종 원년(1123)에 고려에 왔던 송나라의 서긍(徐兢)은 자기의 여행기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제도는 대체로 좋은 허명(虛名) 뿐이고 실속이 없다 하였다. 무직(武職)에는 응양(鷹揚)⋅용호(龍虎)의 2군(軍)과 6위(衛)가 있었고, 각각 2군에 상장군(上將軍), 6위에 대장군(大將軍)이 한 사람씩 있었다.

상장과 대장군들이 모이는 관방(官房)을 중방(重房)이라 하였는데, 무인이 힘을 쓰던 의종(毅宗) 이후에는 중방이 정치에 중압(重壓)을 하였다. 응양군의 상장군은 관례(慣例)로 무사단(武士團)의 통령(統領)이 되었다.

외직(外職) 즉 지방관은 성종 2년(983)에는 12주목(州牧), 14년(995)에 10도(道), 12주절도사(州節度使)를 두었다. 변천은 있었으나, 삼경(三京, 西京-平壤, 南京-楊州, 東京-慶州)⋅오도(五道, 楊廣忠淸道, 慶尙晋州道, 全羅道, 朔方道, 西海道, 의종 때)⋅양계(兩界, 東界-東北面, 西界-西北面)를 기준으로 하였다. 지방관으로 유수(留守, 京)⋅사(使, 都護府, 防禦鎭)⋅지사(知事, 州⋅郡)⋅영(令, 縣)⋅감무(監務, 小縣)⋅안찰사(按察使, 道)⋅병마사(兵馬使, 兩界) 등을 두었고, 임시로 안무사(按撫使)⋅권농사(勸農使)⋅찰방사(察訪使) 등을 파견하였다.

다음 충렬왕(忠烈王)에서 공양왕 때까지 약 120년 간은 원의 제도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서 첨의부(僉議府, 中書⋅門下⋅尙書 三省)와 밀직사(密直司, 樞密院) 등 양부(兩府)를 최고 행정 기관으로 삼고, 무반(武班)의 장군은 충렬왕 27년(1301)에 호군(護軍)이라 고치었다. 정규의 관직 외에, 때와 사건에 따라 임시로 두었던 제사 도감(諸司都監)⋅각색(各色) 등이 있었다. 이중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양계병마(兩界兵馬)의 판사(判事)는 서울에 있는 재신(宰臣)들이 겸하고, 일이 있을 때 모이는 도병마사(都兵馬使)란 관청을 설치하였으나, 충렬왕 5년(1279) 이것은 차츰 중신(重臣)을 망라하여 도당(都堂)이라 하고 정부의 실권을 잡았다. 정방(政房)은 신종 5년(1202) 최충헌이 자기 집에다가 문무관의 제도를 따서 두었던 것이 고종 45년(1258)에 다시 왕정 회복에 따라 궁중에 설치되어 이(吏)⋅병(兵)의 전주(銓注)를 맡았었다.

중앙집권제를 확립시키매, 이것을 통제하는 법령은 원칙으로 당률(唐律)에 의하였다. 말기에는 몽골의 영향을 받아 지정조격(至正條格)을 결옥(決獄, 판결)의 기준으로 삼았으나, 공양왕 4년(1392)에 명률(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과 종래의 법령과 합치어 새로이 제정하였으나, 왕조의 변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통제와 국방을 위한 병제는 당의 부병제(府兵制)에 따랐고, 임시로 일이 있을 때에 별군(別軍)이란 것을 두었다. 별군에는 정종(定宗) 2년(947) 계단에 대비하기 위하여 30만의 군을 준비하여 광군사(光軍司)라 하였고, 숙종(肅宗) 때 윤관이 여진에 대하기 위하여 기병(騎兵)⋅보병(步兵)⋅강마군(降魔軍, 僧軍) 등으로 별무반(別武班)을 두고, 정예의 별초(別抄)가 있었으니, 난을 진압하려고 조직하였으나, 최충헌이 조위총(趙位寵)의 수가 늘어가매 좌우로 나누고, 또 몽골에 잡히어 갔던 사람이 도망쳐 돌아오니, 이를 모아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였다. 이것을 삼별초라 하여, 고종 때는 한때 성중에 도적이 많았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야간 경비로 야별초(夜別抄)란 것도 두었다. 최충헌이 시작한 사병(私兵)으로 도방(都房)이란 것이 있었다. 원의 영향을 받던 때는 만호부(萬戶府)가 있었다. 또 원에서 응방(鷹坊)을 보내매, 이것을 금병(禁兵)으로 두었다. 그 제도는 변하였으나, 원류는 원의 케식(怯薜, Koshik)인 것 같다.

토지는 경종 원년에 공전제(公田制)를 실시하여, 토지와 백성을 국가에 직속시키게 되었으나, 원래의 호족들은 그대로 관료(官僚)로 높은 지위에 앉았었다. 그들은 공음전(功蔭田)을 받고 세습(世襲)의 인정을 받았다. 공전제는 계속하여 수정됐으나, 안으로 관료들의 세력이 커지매, 그들이 직접 정권을 쥐고 국왕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권신(權臣)의 대두에 따라 공전제는 흩어지고, 권문(權門)⋅세가(勢家)⋅사원(寺院) 등에 겸병되어 장원(莊園)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법령으로 금지하려고 애썼으나, 관료들 자신이 장원을 가지고 있어, 아무 효과없이 고려 말기에는 전국의 토지는 모두 사전(私田)으로 변하였다. 이에 일반 사람들은 땅을 잃고 유리(流離)하고, 또는 떼를 지어 도적이 되고, 또는 장원의 소작인이 되며, 승려(僧侶)의 노비(奴婢)가 되었다. 승려들은 국가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고, 귀족과 같은 자리에서 호사스럽게 살았다.

또는 한편 북방의 이민족은 연달아 국토를 침범하고, 해안지대에는 왜구(倭寇, 日本海賊)들이 노략질을 하니, 사회는 불안하였다. 그리고 토지 개혁의 의논이 많았으나, 창왕(昌王) 때(1389) 조준(趙浚)이 전제개혁안(案)을 내세우매 이행(李行)⋅황순제(黃順帝)⋅조인택(趙仁澤) 등도 이에 토지를 다시 분배하기를 주장하매, 반대도 있었으니, 이성계 일파인 무력파의 승리로 공양왕 2년(1390), 일체의 토지대장(土地臺帳)을 불사르고 이듬 해 3년에 새로운 제도를 펴서 공전제를 부활시키었다. 조준은 원래 토지를 전부 국가 관리로 하고, 관리에게는 지위에 따라 토지를 주고, 농민들에게도 생활하도록 토지를 주자고 함을, 신제도로서는 토지의 통제는 국가에서 하되, 관료들의 종전의 소유를 어느 정도 그대로 인정하며, 농민을 완전히 토지에 결합시키었다.

국가 재원(財源)인 세제(稅制)도 신라 제도의 계승인데, 공전(公田)에 대한 조(租)는 공전을 기초로 하여 십일세(十一稅)의 원칙에서 한결(一結)에 대하여 2석(石)의 징세를 받았으나, 성종 때 십일세를 상⋅중⋅하의 전품(田品)에 따라 사분일세(四分一稅)로 고치었다. 수전(水田)에 비해 한전(旱田)의 세는 수전의 반분 밖에 안 되었다. 상요(常徭)는 요역(徭役)으로, 사실 노역(勞役) 대신 물납(物納)으로 변한 용(庸)이었다. 조(調)는 잡공(雜貢)으로 호(戶)에 대한 과세인데 각종 토산을 상납하게 하였던 것이다. 역(役)은 부역(賦役) 의무의 이행으로, 지방에서는 자치적이었으나, 또한 강제적인 직역(職役)은 농민들의 의무였으니, 실질 요역과 같았다. 또 염세(鹽稅)⋅어량세(漁梁稅)⋅선세(船稅)⋅상세(商稅) 등과 사전(私田)의 전주(田主)에게 받는 전세(田稅) 등 잡세(雜稅)가 고려 봉건(封建) 사회 재정의 기초이었다.

이러한 제도 밑에서 그들은 실제 농업 생산을 위주로 생활을 하매, 국가에서는 농상(農桑) 정책에 힘써 농업 기술과 농사 관리(管理)와 권장을 위하여 권농사(勸農使)⋅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 등을 파견하였었다.

그러나, 뒤에 이들은 기술적인 지도보다 관료로써 감독할 뿐, 또는 그보다 민간에 폐를 끼침이 심하여, 폐지되었다. 다시 기술적인 개량에 힘을 썼으니, 공민왕 11년(1362)에는 수차(水車)의 이용을 권장하였다. 그 때의 밀제학(密提學) 백문보(白文寶)는 중국 강남의 수차에 따라 고려에서도 수차를 만들어서 논에 물을 대는데 이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농업 기술에 관하여 중국에서 계속 받아들이기에 힘썼으니, 이암(李嵒)은 원의 농상즙요(農桑輯要)를 받아들이었고, 고려 말기 문익점(文益漸)은 강남에 가서 목면(木棉)의 씨(種字)를 가져오며,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하고, 또 씨 뽑는 취자차(取子車)와 실 짜는 소사차(繅絲車)를 만들어 목면 방직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키었다.

사회의 진전에 따라 고려의 국내 상업의 발달로 성종 15년(996)에 철전(鐵錢)을 주조하고, 숙종 3년(1098)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금속화폐로 은병(銀瓶)을 만들어 사용하게까지 되었다. 은병은 우리 나라 지형을 본받아 만든 은전(銀錢)으로 활구(濶口)라고도 하였다. 국내 경제의 발전과 아울러 외국 무역이 전개되었으니, 국도 개성은 국내 문화의 중심지며, 당시 동양의 국제 도시의 하나로, 서쪽 예성가에서 개성을 들어오는 어구 벽란도(碧瀾渡)는, 고려에 인접한 여러 나라는 고사하고, 멀리 일본⋅유구(琉球)⋅대식(大食, Arabia) 등의 상선이 드나들며, 남방의 향료(香料)⋅염료(染料)⋅약재(藥材) 등을 수입하여 도시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의 기호(嗜好)⋅장식을 도와주었다. 이에 도시의 귀족들이나, 불사(佛寺) 승려들의 문화적인 생활에서 다도(茶道)와 향도(香道)가 불교의 선(禪)과 함께 발전하여 그윽하고 아름다운 고려 청자(靑瓷)의 발달을 촉진시키었다. 이 청자는 말기에 더욱 사치스러워지자, 금채(金彩)를 쓰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화사(華奢)한 청자는 조선 예술의 최고(最高)일 뿐 아니라, 그 아름다운 품은 다른데서 찾기 어렵다. 이런 아름다운 그릇에 담기는 음식도 국제적으로 변천하여 고려 말기에는 원에서 포도주(葡萄酒)까지 받아들이었다.

몽골의 침입, 원과의 교섭이 밀접하매, 고려 서울 개성에는 색목인(色目人, 西域人)이 와서 살았으므로, 회교(回敎)나 라마교(喇嘛敎)도 들어오고, 그에 따라 이국적(異國的)인 풍습이 전하여졌으니, 쌍화점(雙花店)의 노래는 그런 서방적인 흔적을 간직하여, 고려 때 서울 풍습의 한 모습을 알려 준다. 또 고려의 풍습과 문물이 원에 전하여서 고려양(高麗樣)이라 하여 그들에게 진중(珍重)된 바도 있었다.

도시에 국한된 것은 아니나, 귀족층의 사람들이 호화로이 문화적으로 생활하는 반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그와 달리 음산하고 구차하였다. 개성의 시가는 대개 민가(民家)가 벌집이나 개미굴 같고, 거의 초가로 근근히 비바람을 가릴 뿐이요, 좀 부유한 집이 기와를 이었을 뿐이며, 열에 여덟 아홉이 초가라고 고려도경에 전한다. 또 사회 생활이 궁핍해졌을 때는 호구(糊口)의 책(策)으로 자녀를 팔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실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에도 뚜렷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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