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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Ⅴ장 고려의 문화
  • 3. 학술과 문화의 발달

3. 학술과 문화의 발달

태조 훈요 중에 또한 불교의 전파를 지시하였으며, 신라 불교의 모든 유산을 계승한 고려 사람들은 현실에서 떨어진 정토(淨土)를 동경하여 원왕생(願往生)하는 생활의 근거를 불교에 두었다. 이런 생각은 산천비보(山川裨補)의 지리설(地理說)과 합치어 호국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국왕들의 불법에의 귀의(歸依)와 불교가 국가에 호국 비보한다는 데서 고승(高僧)들이 왕사(王師)⋅국사(國師)로서 재신(宰臣)의 위에 서고, 승려들의 과거(科擧)로 승과(僧科) 제도를 두어 법계(法階)를 주었다. 법계는 선종(禪宗) 교종(敎宗)에 대덕(大德) 이하 6계를 두었다. 신라 때부터 각 종파(宗派)가 크게 선⋅교(禪敎) 둘로 구분되었으니, 처음 선종⋅밀교(密敎)에는 선법계를 주더니, 후에 천태종(天台宗)도 이에 들었고, 화엄(華嚴)⋅법상(法相)⋅율(律)⋅소승(小乘)에는 교법계를 주었다. 승려의 직분에는 최고에 왕사⋅국사가 있어, 그들의 신분은 완전히 관리와 같았으며, 특전을 가지고 부(富)와 권세(權勢)를 잡게 되었었다. 사상적으로는 대각(大覺)국사 의천(義天)이 송에서 새로이 천태종의 교리를 받아오기까지는, 신라 불교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문종(文宗)의 왕자인 의천은 선종(宣宗) 3년(1086)에 송으로 건너가 화엄과 천태의 교법(敎法)을 배워, 이것을 고려에 선포하매 선종(禪宗)은 교(敎)의 산하(傘下)에 포섭하여 대립하는 교⋅선 양종(兩宗)을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숙종(肅宗) 6년(1101)에 47세로 청운의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선교습합(禪敎習合)의 사상은 불교계에 깊이 스미었으니, 전남 송광사(松廣寺)에 해동제일 선법굴(禪法窟)을 일으킨 보조(普照)국사는 선으로써 교를 포섭하려 하였다. 보조의 선은 조선 불교의 전통을 이루는 것으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으고 있다. 원과 관계가 깊어지매 중국의 임제종(臨濟宗)이 들어왔고, 마가타국(摩揭陀國, Magadha)의 선승(禪僧) 지공(指空) 화상이 원나라에서 개성으로 와서 선을 전함에, 그에게서 배운 나옹혜근(懶翁惠勤)과 무학자초(無學自超)가 있다. 나옹은 중국 강남(江南)의 순 임제선(臨濟禪)을 받아들이니, 무학은 다시 나옹에게서 배우고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귀의를 받고, 왕사의 책(冊)을 받았다. 그리하여 임제선백(臨濟禪伯)이 교계(敎界)를 흔들어도 고려말에 있어 사회와 함께 부패 타락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또 불교는 대개 전통적인 고유 사상과 융합되어 호국적인 사상을 가지고 발달하여, 국가의 신분적인 대우와 경제적으로 왕실과 관료 귀족들의 전답(田畓)의 시여(施與), 미곡⋅포백(布帛) 등의 시입(施入)으로 사전(寺田)의 확대는 속세적인 권력의 발전을 보였다. 승려들은 광대한 사원령(寺院領)에서 산출되는 곡물을 팔며, 또 술을 양조(釀造)하여 팔고, 제염장(製鹽場)도 소유하였다. 여기서 얻은 수익(收益)은 장생고(長生庫)를 통하여 고변 빚놀이(高利貸)를 하였다. 또 사원령은 면세(免稅)이어서, 사원령에 이름만을 빌어 면세하는 사람이 생기고, 한편 농민들도 자기 토지를 사원에 붙이고 소작인으로 있는 것이 편하게도 되었다. 이에 사원령이 발달하였으니,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는 주위 4만 7천 정보(町步)가 넘는 광대한 사원령을 지니었었다. 발전기에 있어서는 출가(出家)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서 반승(飯僧) 일시에 수만인 경우가 흔했다. 이것을 제한하기 위해 충숙왕(忠肅王) 12년(1325) 도첩제(度牒制)를 세웠으나, 효과를 못보았다. 불교 신앙과 호국 사상에서 나온 연등회(燃燈會)가 있었으니, 이것은 국태(國泰) 민안(民安)을 천지 신명(神明)에게 비는 것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하던 것이, 2월 보름으로 바뀌었고, 개성과 지방 각처에서 연중 행사로 행하였다. 같은 행사로 팔관회(八關會)는 국도와 서경(西京, 平壤)에서 동짓날에 행하였다.

불교 문화의 한 자랑은 대장경(大藏經) 개판(開版)이다. 학계에서는 각판(刻版)이 두 번이니 세 번이니 하나, 지금 알기는 아직 두 번인 것 같다. 현종(顯宗) 2년(1011), 계단의 대병이 쳐들어오매 왕은 나주(羅州)로 옮기어 대장경을 조조(彫造)하여 불력(佛力)으로 적군을 물리치려 함에서 각판을 시작하여 문종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다음 송에서 3천 여 권의 교소(敎疏)를 가지고 돌아온 의천은 다시 국내⋅요(遼)⋅일본 등에서 더 수집을 하여 1,010부(部) 4,740여권으로써 목록을 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선종⋅숙종 양대 간에 인행(印行)을 하니, 이것이 의천의 속장(續藏)으로써 먼저의 정장(正藏)을 보속(補續)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 19년(1232)에 몽골의 병화(兵火)로 이것이 부인사(符仁寺)에서 타 버리자, 이어 고종 24년(1237)에서 38년(1251)에 걸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고 개간(開刊)하였다. 개간 당시 경문 교감(校勘)을 맡은 개태사(開泰寺)의 승통(承統, 敎宗 僧職의 第六階) 수기(守其)는 송본(宋本)⋅계단본(契丹本)과 현종본(顯宗本)과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을 교정(校訂)하였다. 이것은 수기의 고려국신조교정별록(高麗國新雕校正別錄, 30卷)에 적히어 역시 장중(藏中)에 끼어있다. 이로서 고려판(高麗版) 대장경이 불교 학계에 있어 가장 정확한 것으로 귀히 여겨지며, 또 그 판(版)이 질기며, 글자를 새긴 품이 예술적으로 극치에 이른 것이다. 경전 수는 1,539부, 6,805권, 판수(板數)는 8만 여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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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 보관된 고려 때의 장경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 때의 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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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전성한 고려 시대의 유학(儒學)은 중엽 묘청(妙淸) 일파를 물리치고, 모화주의(慕華主義)의 유교 관념을 가지고 일어난 김부식(金富軾) 일파의 활동에서 시작한다. 충렬왕 때에는 안향(安珦)이 양현고(養賢庫)를 부흥하고,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孔子)와 그 제자의 상(像)을 그리어 오며, 유교(儒敎) 전용의 제기(祭器)와 악기 경자사(經子史)의 여러 가지 책을 사 오고,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를 두는 등, 활발한 운동이 일어나 유학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불교가 극성하였으나, 그것은 정신 생활에 근거를 두었고, 정치에는 유학이 관계가 깊었다. 일찍 문종 때의 최충(崔沖)은 사학(私學)에서 유학을 근거로 교육하였으니, 이미 일반의 사학에서도 국가의 교육 이념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곧, 권력적인 관리에 등단하는 길도 되었었다. 그러나 의종(毅宗) 이후 정중부의 난, 이어 최씨의 정권, 삼별초란(三別抄亂)과 그동안 중방(重房)의 무력정치 아래서 한때 쇠퇴하더니, 몽골이 들어와서 왕정이 복구되매 유학은 다시 산림(山林)에서 궁정(宮廷)으로, 승려의 손에서 다시 정치의 영역(領域)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종래 사장(詞章)⋅훈고(訓詁)⋅기송(記誦)을 주로 한 학풍(學風)은 경사(經史) 연구에 더욱 더 주력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간 백이정(白頤正)은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서적을 가져오고, 또 이제현(李齊賢)⋅백문보(白文寶) 등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서 배웠고, 안향의 문인(門人) 권단(權漙, 號 菊齋)의 사서집주(四書集註)의 개판으로 전포되고, 이어 우탁(禹倬)⋅이제현⋅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학자를 배출하여 우리 나라 주자학(朱子學)의 발전할 기초를 이루었다. 이에 유학은 불교에 대항하여 그 기세는 점차 높아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 같은 학자의 배불론(排佛論)이 발생하여 전개되매 속세적으로 타락한 불교는 그에 대항하기 어려웠었다.

고려 시대는 송의 경학의 수입에 따라 문운(文運) 융성하여, 국학과 사학(私學)의 발전은 물론, 송에서 또 서적을 수입하기에 힘써 숙종 때는 태평어람(太平御覽)을 받아들이며, 궁중에는 경연(經筵)의 학사(學舍)로서 청연(淸讌)⋅보문(寶文)의 이각(二閣)을 두어 문신으로 하여금 경학을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인종 때 고려에 와서 본 송의 서긍(徐兢)은 고려에서는 국학(國學)은 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시중(市中)의 아이들까지도 선생에게서 글을 배우며, 궁중 장서각(藏書閣)에 책이 잘 수집 정돈된 것을 칭찬하였다. 더욱 문종 이후에 문예 학습에 이름난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니, 윤관(尹瓘)과 그의 아들 언이(彦頤)⋅김부식(金富軾)과 그 아우 부의(富儀), 홍관(洪灌)⋅정지상(鄭知常) 등이 있었고, 최충헌의 무단(武斷) 정치 때에는 그들에게 대접을 받던 이인로(李仁老)와 이규보(李奎報)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또 오세재(吳世才) 등 정치에 무관히 음주(飮酒) 시부(詩賦)만 즐기어 지낸 칠인이 있어 중국의 죽림(竹林) 칠현(七賢)에 비기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 문운의 변천에 따라 나타난 문인 중, 문집(文集)이 후세에 전하여, 그 모습을 알게 하는 것을 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50卷), 승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5卷),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은 역사 연구에 끼친바 공이 크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3卷),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3卷),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3卷), 이색의 목은집(牧隱集, 55卷) 등은 시문을 위시하여, 고려 시대의 사실(史實)과 당시의 풍물과 사정을 전하는 문예 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이다.

실용적 자연과학으로 천문 관측과 역상(曆象)에 관한 일체의 업무는 태복감(太卜監)에서 맡았었다.

이 태복감은 시대에 따라 명칭을 여러 가지로 변경시키었으니, 사천대(司天臺, 顯宗 14年, 1023)⋅사천감(司天監, 睿宗 11年, 1116)⋅관후서(觀候署, 忠烈王 元年, 1275)⋅서운관(書雲觀, 忠宣王) 등으로 문종 시대의 제도를 중심하여 빈번히 변하였다. 여기에는 역시 관료적 기술자들을 배치하였고, 관측에는 신라 때와 같이 천문대가 왕궁 안에 있었으니, 개성 만월대(滿月臺) 왕궁터에 남아 있다. 고려사 천문지(天文志)에 보면, 475년간의 관측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식(日蝕) 132회를 비롯하여 달과 각 성신(星辰)의 운행을 상세히 관측하였다. 특히 태양의 흑점 관측이 34회나 있었다. 이것은 육안으로 직접 관측하였던 것으로, 서양에 비하여 약 3세기나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관측은 주술적(呪術的)인 것이 극복 못되고 점성적(占星的)인데 머물렀다. 그러나 천문도(天文圖)를 만드는 등 과학적인 천문 관측을 겸행하였던 것이다. 또 시간 측정에는 누각원(漏刻院)이 있었다.

역법(曆法)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받아서 썼으나, 여러 가지로 착오가 생기어 문종(文宗) 때는 다섯 번이나, 새로 편성하여 보았으나, 제대로 되지 못하여, 이어 착오를 고치기에 힘쓰다가, 충렬왕(忠烈王) 7년(1281)에 원 나라에서 아라비아 역법에 따라 새로 만든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오며, 충선왕(忠宣王)은 최성지(崔誠之)로 하여 돈을 주어 그 역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수학은 관리 등용에 구장(九章)⋅철술(綴術)⋅삼개(三開)⋅사가(謝家) 등을 시험하였으며, 수시력을 이해하고 사용한 고려는 그에 상응한 발달된 수학 지식을 지니었다.

의학 또한 관료 기관으로 궁정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나, 왕도적 정치 이념에서 일반 백성의 구제에까지 진전시키었다. 관제는 전의시(典醫寺, 太醫監)⋅봉의서(奉醫署, 尙藥局)로 전의시는 의료를 담당하고, 봉의서는 약을 맡았다. 관료 등용의 시험에서는 소문경(素問經)⋅갑을경(甲乙經)⋅본초경(本草經)⋅명당경(明堂經)⋅맥경(脈經)⋅침경(針經)⋅난경(難經)⋅유연자방(劉涓子方)⋅창저론(瘡疽論) 등을 썼으니, 대체로 신라 때의 것을 계승하며 유연자방⋅창저론 등 외과(外科)⋅피부(皮膚)과 방면의 의서를 더 첨가 수입하였었다. 의료 기술은 국가 독점이었고, 자선적인 의료⋅시약(施藥) 기관으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위보(濟危寶)⋅혜민국(惠民局) 등은 일반 빈민 구제 기관이나, 여기에도 의약 기술을 가진 관료들이 시료(施療)를 하였고, 특히 혜민국은 의료적 구제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이 충선왕 때는 사의서(司醫署)의 관할로, 공양왕 때에는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개편되었으나, 제도는 바뀌어도 사실의 기능은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특히 중국의 의서(醫書)를 다시 간행하여서 이용하였으니, 문종 12년(1058)에는 충주목(忠州牧)에서 황제난경(黃帝難經) 등을 간행하고, 또 법의학(法醫學)에 관한 의옥집(疑獄集) 등도 간행되었으니, 이것은 다 고려 의학의 진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들이 새로이 의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지금 책은 전치 못하나, 내용의 일부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간행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란 책에 인용되어,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향약 고방(古方)⋅삼화자(三和子) 향약방 등이 명목을 전하며, 혜민구급방만은 조선 초기까지 교과서로 사용되었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과 정도전(鄭道傳)의 진맥도결(診脈圖缺) 등이 또한 이름만 남기었다. 송의 의학을 배운 이단지(李坦之), 의약을 가지고 원에 행사한 설경성(薛景成), 의료적 자선 사업을 한 조선공(朝鮮公), 도(燾)의 사적을 보아 고려 시대는 의학이 상당히 발전된 것을 알겠다.

기술면에서는 고려 말기에 원에서 화약(火藥)이 전하여지자, 화약을 사용하는 화포(火砲)를 사용케 되었다. 이 화포는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하였다.

문학 중의 가요는 고려사 악지(樂志)에 서경(西京)의 여러 편의 노래가 해설되어 있으며, 또 다른 책에 그 노래가 근근히 전하는 것도 있으며, 혹은 원 노래는 전치 않고, 한시(漢詩)로 번역되어 그 때 사람들의 생활 감정을 이해하게 한다.

西京別曲 서경별곡
西京이 서울이 마르는 닷곤 소경 고요마른 여므론 질삼베 ᄇᆞ라시고 괴시란 우러곰 좃니노이다. (樂章歌詞에 전하는 것) 西京이 서울이언만, 새로 지은 적은 서울 안즐김이 아니언만 님 이어 그대를 여인다면 길삼베 버리고서 계신 데로 울며라도 따르리다. (요샛말로 옮긴 뜻)

이 밖에도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에 노래가 전하여, 균여선사전(均如禪師傳)에는 균여가 고려 광종(光宗) 때에 불교 신앙을 노래한 보현가(普賢歌) 11수(首)를 이두(吏讀)로 적은 것이 있다. 가요에 따라 음악에는 신라 때부터 전하는 당악(唐樂)을 계승하여, 송 나라 때의 궁중에서 연향(宴饗)의 의식(儀式)에 쓰던 것과, 민간의 악곡과 유희(遊戱)가 송⋅원 이대 사이에 점차 고려에 들어왔다. 대체로 송 휘종(徽宗)때부터 전래되어 원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공민왕에게 시집올 때 같이 춤추는 여인과, 배우(俳優)⋅요술장이들이 색다른 악곡과 가무(歌舞)를 전하였다.

회화는 송⋅원의 영향을 받고 발전하였으나, 현존하는 작품은 거의 절종(絶種)으로 화가들의 성명(姓名) 조차 전치 않는 오늘날에는, 공민왕의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와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고일(高逸)한 기품을 띠고, 고수(枯樹)⋅황초(黃草)의 창망(蒼芒)한 광경을 전하여, 고려의 화품을 엿보게 한다. 고분 벽화로는 수락암동(水落岩洞, 京畿 開豊) 고분의 벽화와 부석사 조사당에 남은 것이나, 수덕사(修德寺)의 근대적인 벽화와 법당방(法堂坊, 京畿道 長湍郡) 고분의 십이지(十二支) 신상을 그린 것이 남았을 뿐이다. 또 왕궁만다라도(王宮曼陀羅圖) 등 몇 가지는 일본(愛知 大恩寺)에 전한다.

불교의 숭신(崇信)으로 가람(伽藍)의 경영은 헤아릴 수 없이 번다하였으니, 불사(佛寺)의 개창(開創), 또는 재흥(再興)된 것을 하나 하나 가리기 어려웠다. 북방 민족의 입구(入寇)가 심하였으나 그 사이의 평화로운 시기에 특히 불교를 중심한 물질문화(物質文化)는, 고려의 우수한 특질을 발휘하며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을 추리면 현존 목조 건축(木造建築)⋅석탑⋅부도(浮屠) 석등⋅석비(石碑)⋅석당(石幢)⋅능묘(陵墓)⋅불상(佛像)⋅조소(彫塑)⋅벽화(壁畵) 등 귀족적인 생활에서 나타난 자기(磁器) 공예품 등이 있다.

목조 건축으로는 부석사(浮石寺, 慶北 榮州)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은 그 균형있는 미(美)를 지니고 있다. 더욱 무량수전은 지금 조선에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건축으로, 구조는 자유로우며, 각 부분의 웅장한 품은 신라부터의 전통적 양식에 송의 영향을 가미하여 아름다웁다. 봉정사(鳳停寺, 慶北 安東)⋅심원사(心源寺, 黃海 黃州)⋅석왕사(釋王寺, 咸南 安邊) 등에도 고려 시대의 전각(殿閣)이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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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내부(浮石寺 無量壽殿 內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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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정면(浮石寺 無量壽殿 正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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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은 허다히 산재해 있으나, 초기의 우수한 것은 개심사(開心寺, 慶北 醴泉)의 오중(重) 석탑이며, 고려 시대를 통하여 유일한 걸작은 현종(顯宗) 11년(1020)에 조립(造立)한 현화사(玄化寺, 京畿道 開豊郡 嶺南面 玄化里)에 있는 석탑으로, 이것은 신라의 구형(舊型)을 떠난 고려의 독특한 수법으로, 조탁(彫琢)의 아름다움과 그 규모의 장대한 것은 볼만하며, 탑신(塔身) 각층(各層) 사면에는 석가삼존(釋迦三尊)과 나한(羅漢)⋅보살(菩薩)⋅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새기었다. 신라에 비하여서는 좀 뒤늦기는 하나 이채(異彩)있는 것으로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 忠北 忠州)의 사자탑(獅子塔)과 마곡사(麻谷寺, 忠南 公州)의 5중 석탑은 머리에 청동(靑銅)의 라마식(喇嘛式) 보탑(寶塔)을 올려 놓은 것이 또한 독특한 것으로, 그 기술 또한 우수하다. 다각(多角) 다층(多層)의 탑으로는 월정사(月精寺, 五台山)의 팔각구층탑(八角九層塔)이 제일 크며 가장 우수하다. 또 다탑봉(多塔峰, 全南 和順郡 道巖)의 임립(林立)하는 일군(一群)의 탑이 있으니, 또한 고려의 소산으로 한 곳에 많이 모아 만든 것이 이관(異觀)이다. 부도(浮屠)에는 정토사(淨土寺)의 홍법대사(弘法大師) 실상탑(實相塔)의 의장(意匠)이 참신하며, 수법 섬려한 유례 없는 걸작이다. 또 법천사(法泉寺) 지광국사(知光國師) 현묘탑(玄妙塔)은 기교의 정려(精麗) 장식 변화가 다기함은 고려의 특이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이다.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의 부도는 중인도식(中印度式)으로 독특한 일례를 이룬다. 이것이 화장사(華藏寺, 京畿道 長湍)에 있는 지공 혜령조탑(指空慧靈照塔)이다. 석동은 당 말에서 오대(五代)에 걸쳐 중국에서 유행하던 것이 고려에 전해진 것으로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읍동면(邑東面)에 각각 일기(一基)씩 완전한 것이 남아 있다. 이것은 팔각(八角) 기단(基壇) 위에 세운 팔각 석주(石柱)로 머리에는 삼층 보개(寶蓋)를 올려놓고, 석주면(面)에는 다라니(陀羅尼)를 새긴 것이 기교 아름다웁고 볼만하다. 비(碑)는 신라 말기의 양식에 고려에 들어와서 약간 특이한 수법으로 이루어졌으니 대체 초기의 것이 볼만하나, 현화사 터에 남아 있는 영추산(靈鷲山) 대자은현화사비(大慈恩玄化寺碑)는 고유한 특질을 발휘하여 수법 장려하고 웅호(雄豪)한 기상을 표시함은 더욱 주시할 바다. 석등엔 관촉사(灌燭寺)의 것이 고려 일대의 걸작이며, 가장 균형있는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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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오중석탑(開心寺 五重石塔)
개심사 오중석탑(開心寺 五重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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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석탑 초층 탑신 부조(玄化寺 石塔 初層 塔身 浮彫)
현화사 석탑 초층 탑신 부조(玄化寺 石塔 初層 塔身 浮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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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조각에는 당시의 것을 그대로 지니기 어려웠던, 조선 시대의 배불(排佛)사상과 임진란의 재화(災禍)로서 오늘에 남은 것이 적다. 부석사 부량수전의 아미타여래 좌상(阿彌陀如來坐像)은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소상(塑像)으로, 목심(木心)에 소토(塑土)를 붙이고, 포장(布張) 금박(金箔)으로 된 것으로 의문(衣文)⋅면상(面相) 등이 예술적으로 되었다. 도갑사(道岬寺, 全南 靈巖) 미륵당(彌勒堂)의 석조 여래좌상(6尺5寸)은 면상의 온아(溫雅), 형태의 균정(均整)함은, 적조사(寂照寺, 京畿 開豊郡 嶺南面)의 철조(鐵造) 여래좌상(5尺3寸)과 함께 남아 있는 고려 시대 미술품 중 걸작이다. 이 외에 규모의 웅장한 것으로는 관촉사의 미륵상(彌勒像)이니, 미적인 것보다, 거석(巨石)을 모아 조선 최대의 불상을 꾸민 기술이 놀라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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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목조 미타 좌상(浮石寺 木彫 彌咜 坐像)
부석사 목조 미타 좌상(浮石寺 木彫 彌咜 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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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조사 철조 여래상(寂照寺 鐵造 如來像)
적조사 철조 여래상(寂照寺 鐵造 如來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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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품도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며 송⋅원의 영향을 받고, 장중 웅건한 기상을 잃고 섬려하여졌으나, 고려 독자의 경지를 갖고, 한때의 광채 더욱 빛났던 것이다. 특히 금공(金工) 중 종(鐘)은 많이 일본에서 가져갔으나, 대표적으로 우수한 것은 다 조선에 남아 있다. 흥천사종(興天寺鐘, 舊王宮 美術舘)⋅대흥사종(大興寺鐘, 全南 海南)⋅용주사종(龍珠寺鐘, 京畿 水原)은 신라의 양식을 답습한 좋은 작품이요, 연복사종(演福寺鐘, 京畿 開城 南門)은 순연한 원대의 양식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서울 남산(南山) 전 일본인이 있던 절에 있는 종(현재도 그전 자리에 있다)은 신라와 당의 양식을 절충한 것으로 유일의 특이한 것이다. 고분 중에서 발굴되는 금속기에서는 동경(銅鏡)의 형태 문양이 가지가지 있음은 고려에서만 처음보는 바이다. 이 외의 금속 일용품은 귀족적인 생활면을 미루어 알게 하며, 기교가 정미(精美)하여 당시의 특질을 발휘하였다. 또 금속 공예는 종래의 기술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이때의 주조(鑄造)로는 성종 15년(996)에 철전(鐵錢)과 은전(銀錢)을 주조함과 또 금속 주조 기술을 활자(活字)에 이용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글(新印詳定禮文跋尾)에 보면, 고종 19년(1232) 주자(鑄字)로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인행(印行)하였다 한다. 지금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도 그때 간행의 우리 나라 활자본(活字本)이 간직되어 있어 고려 시대에 활자 주조 기술이 발명된 것을 말하여 준다. 또 칠기(漆器)가 나전(螺鈿)⋅대모(玳瑁)⋅옥석(玉石) 등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으로 발전함은 조선 공예 기술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도공(陶工)은 우리 문화사상 광채 이륙(離陸)하여 우리 예술의 정화이었으니, 근원은 송의 월(越)⋅여(汝)⋅용천(龍泉)⋅정(定)⋅건(建)과 자주(滋州)의 각 요(窯)이었다. 그에서 받아들인 것을 조선 사람 자신이 특유한 발달을 시키고, 수법에선 아주 완미(完美)한 것으로 만들어, 청자(靑瓷) 상감(象嵌)의 법은 고려의 독창적인 것으로, 특히 청자의 비취(翡翠) 옥색은 본바닥의 송보다 더 연연(姸姸)히 아름다웠다. 이리하여 송 나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휘종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에 왔던 서긍 또한 그의 고려도경 속에서 고려 청자의 그 연연한 비취빛은 자기 나라에서보다 더 아름답다고 끝없이 칭찬한 일이 있다. 청자 외에도 백자(白瓷)⋅황록채(黃綠彩)⋅녹유(綠釉)⋅시유(柿釉, 붉은 감빛) 등 다채로이 발전하여 기와에도 적용되어 유리와(琉璃瓦)⋅청자의 기와까지 있었으니, 건축의 호화로운 양상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벽돌장(塼)에는 보상화(寶相花)⋅연화(蓮花) 등을 돋나오게 새기고, 당초문와(唐草文瓦)도 있었으나, 대체로 신라 시대에 비하여 퍽 조졸(粗拙) 해짐을 면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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