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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유학의 발전과 불교의 쇠퇴

5. 유학의 발전과 불교의 쇠퇴

학술상으로 주자학이 정신적인 세계와 사회 생활을 통제하는데 이용되었다. 주자학은 곧 국교(國敎)로 중시되었으니, 전 사회에서 불교에 의하여 통치하던 것을, 좀 더 실제적인 주자학으로 바꾸면서, 주자학자 정도전(鄭道傳)에게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편찬시켜서 모든 제도와 정책을 유교주의에 딸케 하였다. 이와 함께 경학은 과거(科擧)의 정과로서 무과(武科)에까지 병시(併試)케 하며, 세종대왕 자신 그 면학(勉學)에 힘쓰며, 2년(1420)에는 집현전(集賢殿), 8년(1426)에는 독서당(讀書堂)을 두고 군신(君臣)이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중 외의 학교제도를 정비하며 경학을 장려하였다. 이에 주자학은 국교로서 지반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의 유지책으로 유학에 따른 선조(先祖) 제사(祭祀)는 일찌기 정몽주(鄭夢周) 등의 가묘제(家廟制)에 기원한 것으로, 이것은 문공가례(文公家禮)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에 각 집에서는 가묘(家廟)를 두며, 관혼상제(冠婚喪祭)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준하게 되었다.

유학이 정책으로 장려되매, 학문으로의 주자학의 이해도 깊어지고, 그 해석이 정치에 적용되어, 여러 가지 대립이 생겨서 중종(中宗)부터 선조(宣祖)에 이르는 사이 정쟁(政爭)을 일으키어, 나아가 정치적으로 분당(分黨)을 이루어, 선조 초에는 동서(東西)로 갈리고, 다시 동인(東人)은 남북(南北)으로 갈리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새로 된 왕조에 적극 협력하여 나와서 벼슬사는 일파에 대하여, 세상에 안 나오고 숨어서 유학에 침체하는 일파가 생겼으니, 전자를 관학파(官學派), 후자를 산림파(山林派)라 하게 되었다. 고려 말의 길재(吉再⋅號 冶隱)는 경상도 선산(善山)에서 문하생을 가르치기에만 힘쓰고, 나오지 않았으나, 그 문하의 김숙자(金叔玆)는 세종 때 나오고,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나오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같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산림(山林)에서 나와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국초(國初)부터 공신으로 벼슬살던 공신파(功臣派)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공격을 하매, 두 파는 대립을 보았다. 여기서 김종직의 문하인 김일손(金馹孫)에 대한 공신파 이극돈(李克墩)의 트집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燕山君 4年, 1498)가 일어나고, 이어 갑자사화(甲子士禍, 1540)가 일어나매 김굉필⋅정여창 등 여러 학자들이 처형당하고 유배되었다. 여기서 학자들은 다시 산림에 숨게 되었다. 중종 때에 다시 사화에 몰린 학자들의 억울함을 풀고,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를 높이 등용하였으나, 여기서 다시 조광조 등 젊은 학자와 남곤(南袞) 등 노신파(老臣派)와의 알력으로,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 800여 명의 소장관리들이 몰리어 죽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런 화를 본 학자들은 숨어서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유학이 현실적으로 정치에 응용되어도 예에만 치중하고, 또 산림에서는 소극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안동 예안(禮安)의 이황(李滉)과 개성의 서경덕(徐敬德)은 조선 유학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킴에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 이이(李珥, 號 栗谷)는 처음 불도에 마음을 쓰더니 세상에 나와 주자학의 발전에 힘썼다. 조광조의 제자에는 백인걸(白仁傑)⋅이언적(李彦廸) 등 여러 사람이 나오고,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은 김안국의 문하로 이름 높은 학자이다. 선조 8년(1575)에 김효원(金孝元, 東人)과 심의겸(沈義謙, 西人)을 중심하여 두 파로 갈라져 싸우게 되자, 지방에서도 유학도(儒學徒)들이 파를 이루고 그에 가담하였다. 그들의 근거는 서원(書院)이니, 중종 37년(1542) 경상도 풍기(豊基)에 갔던 주세붕(周世鵬)이 주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고려의 안향(安珦)을 모시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움에서 시작한 것으로, 여기에 국가에서는 편액(扁額)을 주고, 토지를 주며 여기에 면세를 하여, 노비(奴婢)와 서적을 보냈다. 이 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도 한다. 대개 서원은 봉건적인 한 권력 단체처럼 발전하게 되었고, 나라에서 편액을 준 서원을 특히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학문으로의 주자학은 권력 행사의 도구로, 유학도의 근거요, 또 정쟁의 근거이었다.

그러나 유학의 학리는 이황에 이르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발전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심이 되고, 또 한편 이이의 이상(理想)을 정치에 실현하려는 정신에서 이루어진 이기일원적이원론(理氣一元的二元論)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이 되었다. 이황의 이학통론(理學通論)⋅성학십도(聖學十圖)와 이이의 성학즙요(聖學輯要) 등에서 그들의 학설은 알겠으나, 영남(嶺南)에 있어 조식(曹植, 號 南冥)은 퇴계와 양립하는 거유(鉅儒)로 주지적(主知的)인 퇴계와 달리 평이한 실천면을 주장하였다.

유학이 국교(國敎)로써 발전하며, 후일에는 정치사상으로, 철학으로, 사회 윤리로 발전하여 국가와 개인의 현실적인 일상 생활을 지도하게 되자, 한편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던 불교는 태조 이성계가 무학자초(無學自超)에 귀의(歸依)하여 개국(開國) 정치에 끼친바 있고, 왕실과 서민(庶民) 사이에 있어 신앙으로는 면면이 끊기지 않고, 이어왔으나, 정치가 유학에 근거를 두게 되며, 유학자의 배불론(排佛論)이 일어났으며, 국가의 재정 정책으로 종파의 정리, 사원의 폐합(廢合), 이에 사원의 경제력을 제한하여 전답과 노비를 몰수하게 되었다. 또 도첩(度牒)제를 엄중이 하고, 고려 시대에 있던 승려에게 주던 위계를 폐지하게 되었다. 또 서울 문안의 사원을 철폐하여 승려의 성내 출입을 금지하게까지에 이르렀다. 세종 때에는 선(禪)⋅교(敎) 양종(兩宗)으로 합하여, 전국에 36사(寺)를 정하여 양종에 속하게 하였다. 서울 문안의 흥천사(興天寺)를 선종 도회소(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정 도회소로 하여 승려에 관한 사무를 맡게 하며, 예조(禮曹)의 승록사(僧錄司)를 폐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고 불전(佛典)의 국역(國譯) 간행을 하며, 여장(麗藏)의 수보(修補) 복각(復刻)도 하였고, 선조 때의 서산대사(西山大師, 淸虛 休靜)는 선⋅교 양종의 판사(判事)를 겸하였었고, 선가구감(禪家龜鑑)을 내어 선가 수도의 길을 가리키어 조선 불교의 중흥(中興)이라 하였으나, 조선 초부터 승려들을 국가의 큰 공역(工役)에 부리어, 차츰 후일에는 승려를 천류(賤類)로 여기게 되었다. 귀족적인 내불당(內佛堂)이 폐지되어도 국왕⋅왕족들의 원찰(願刹)은 그들의 내세(來世)의 명복을 빌었고, 일반 사람들의 신앙의 근거는 지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보호가 약해감에 따라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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