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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Ⅶ장 조선 문화 중기(1593~1863)
  • 1. 정치의 문란과 사회 상태

1. 정치의 문란과 사회 상태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정유의 난리는, 그대로 일본 침략에 대한 방어 격퇴의 전쟁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나왔던 일본군은 우리 나라의 기술자와 문화재(文化財)를 허다히 탈취하여 갔으며, 그들은 또 부녀자(婦女子)를 수 없이 잡아다가 포튜갈 상인에게 팔아 먹었다. 국난으로 뒤집힌 고국 산천을 뒤에 두고, 일본에 잡히어 가고, 다시 동남 아시아 방면으로, 또는 멀리 서양으로 팔리어갔다. 17세기 초엽 일본에서 마카오(Macao)⋅고아(Goa)를 거쳐, 루네쌍스 때 이타리아 피렌체(Firenze)에까지 흘러간 소년도 있었다. 당시 전라도에서 일본으로 잡히어 가던 처참한 광경은 일본에 잡히어 갔던 강수은(姜睡隱)의 간양록(看羊錄)에 잘 나타나 있다. 국내는 노략질과 방화로 건축물과 서적을 위시하여, 탕진 됨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기술자의 납치와 함께, 전부터 탐내던 서적과 기타의 문물을 눈에 띄는대로 가져갔다. 이 난리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조총(鳥銃)이라고 하는 소총을 알게 되었고, 이어 이것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선조 초년부터 분파된 당파(黨派)의 싸움은 임진난 중에도 계속되었으나, 남인(南人) 유성룡(柳成龍)이 정국(政局)을 수습하여, 큰 싸움은 없었으나, 난후에는 북인(北人)들이 세력을 잡았고,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대북파(大北派)에서 정권을 잡았으나, 만주의 후금국(後金國, 淸)과 명 나라에 대한 국제 관계가 복잡하게 되자, 광해군의 자중책(自重策)에 반대하는 서인(西人)들은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仁祖)를 세우게 되었다.

즉 만주의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奴爾哈赤)가 강해짐에, 광해군 때 명의 요청으로 후금 공략에 출병한 우리 군대는 살이호산(薩爾滸山) 회전에서 패하며, 인조가 들어서자 향명(向明)의 태도를 표명하게 됨과 명의 모문룡(毛文龍)이란 자가 우리 나라 가도(椵道, 平北)에 와서 후금의 요동 진출을 방해하며, 우리를 귀찮게 굴게 되어 후금은 먼저 조선을 억제하며, 모문룡을 들이칠려고 하여서 인조 5년(丁卯, 1627)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 옴에, 평산(平山, 黃海道)에서 화의를 하고, 형제의 의(義)를 맺었으나, 그들은 다시 양식(糧食)과 정명군(征明軍)의 징모(徵募)를 요청하고, 신하로 복속하기를 강요하며 응하지 않아, 청(淸)의 태종은 10만의 군대를 몰아 다시 쳐들어왔다. 이에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에 신례(臣禮)를 하게 되었으나, 명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대주의 이념이 전개되게 되었다. 임진란 때 파괴되고 피폐한 우리 사회는 채 복구할 사이도 없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더 한층 피폐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씨 조선의 쇠퇴를 촉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은 조선 사회를 한층 더 빈곤하게 만들었으니, 국가 재정의 기본인 토지 경작 면적만도 임진 전에 비하여 30%의 양으로 줄었고, 병자란(丙子亂, 1636)후에 복구된 양도 임진 전의 50%에 지나지 못했다.

     年代
道名
壬辰前 光海君 仁祖17年
京畿 150 千結 39 千結 55 千結
全羅 440  〃 110  〃 190  〃
黃海 110  〃 60  〃 79  〃
忠淸 260  〃 110  〃 131  〃
慶尙 430  〃 70  〃 193  〃
江原 28  〃 11  〃 (34)  〃
平安 170  〃 94  〃 (150)  〃
咸鏡 120  〃 47  〃 46  〃
1,708  〃 541  〃 694(878)  〃
( ) 표는 효종 때 유형원이 조사한 평시 전결로 보충한 것

근세 부흥기인 영조(英祖) 때(1726)에도 전지(田地) 120만 결(結)로 출세지(出稅地, 조세를 내는 땅) 83만 결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한편 당쟁은 심하여지며 반대파의 살육을 목적하며, 또 그에 대항하는 복수(復讎)로 전개되어 그칠줄을 몰랐다. 서인들은 낙당(洛黨)과 산당(山黨)으로 갈라져, 인조 때(1622~49)는 낙당이 집권하더니, 효종(孝宗) 이후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산당이 세도를 잡았고, 서인은 남인들과 싸우더니, 다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고, 숙종(肅宗) 15년(1689) 왕세자를 세우는 문제로 송시열은 몰리어 처형을 당하고, 남인들이 등단 하였으나, 숙종 이십 년부터는 다시 남인들이 몰려나고, 서인들이 들어섰으나 노소의 항쟁이 심하였다. 이렇게 쉬지 않는 정국의 변동은 중앙에서는 피로서 항쟁하는 참극(慘劇)을 빚여냈고, 지방에서는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붕당(朋黨)을 형성하며, 이 서원을 중심한 지방의 유림(儒林)들도 편색(偏色)적인데서 혈연(血緣)인 집단으로 발전하며 동족(同族)을 형성하여 발전시키었다. 이 사람들은 유교적인 직분(職分) 사상에 좇아 농토는 전호(佃戶)⋅노비에게 맡기어 경작하며 농촌 사회에 있어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욱 이민족의 침입 전쟁으로 국가⋅사회 기구가 문란한 틈을 타서, 국가의 조세를 피하여 전토(田土)를 은결(隱結, 조세를 면하기 위하여, 출세하는 대장에서 빼는 것)로 하여, 탈세(脫稅)하는 경작지가 늘어갔다. 파괴된 사회는 쉽게 복구되지 않았으며, 재해(災害)에 따른 흉년(凶年, 饑饉)이 닥쳐와서 현종(顯宗) 연간에서 순조(純祖) 연간에 걸쳐 심하였다. 특히 순조 12년(1812)에는 269만의 기민(飢民)이 나타났다. 이런 수의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할 방도는 국가적으로 지니지 못하였었다. 농민들은 걸군(乞群)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며, 또 도적이 되어 각처에 화적(火賊)이 출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는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불안한 때를 타서 순조 11년(辛未, 1811) 평안도의 홍경래(洪景來)는 반란을 일으키었다. 홍경래는 계획적이요, 조직적으로 서리(胥吏)⋅상인⋅유협(遊俠)을 규합하며, 무기를 준비하여 일어서자, 농민과 몰락⋅불평의 관료들이 이에 합류되어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지역을 지배하며, 정주성(定州城)에서 버티어 정부군(政府軍)도 여러 달에 걸치어 공격하여, 거의 반 년만에 진압하였다. 그런 이후 계속하여 삼남(慶尙⋅全羅⋅忠淸)의 각처에도 민요(民擾, 농민 반란)가 끊이지 않았으나, 다만 나라의 관군(官軍)이 이것을 진압할 힘을 지니어 겨우 억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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