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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Ⅶ장 조선 문화 중기(1593~1863)
  • 3. 실학의 흥기와 학술⋅문예의 발달

3. 실학의 흥기와 학술⋅문예의 발달

임진란 후 사회 시설을 다시 정비할 때 서북으로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과 겸하여, 청에 일어난 고증학(考證學)의 학풍을 받아들이었다. 그 새로운 지식과 방법은 우리 나라 학자들에게 크게 자극을 주어, 그에 따라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나라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밖에서 오는 풍조와, 안에서 특히 중앙에서의 양반(兩班)들의 정치적인 분쟁과, 지방에서의 지방 관리와 토호(土豪, 土着兩班)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며, 모든 생산 기술이 쇠퇴하여짐에 당하여, 일부의 학자들이 이것을 개량하려고, 사회 정책(社會政策)을 근본 문제로 하여, 실제적인 경제 시설의 정비를 급무라고 제창하고 일어나서, 실제 경세(經世)의 학풍을 세웠으니, 그 일파를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또는 實證學派, 實學派)라 한다.

이 학파의 선구자 유형원(柳馨遠, 號 磻溪, 1622~1673)은 당쟁도 바야흐로 심해지고, 그에 따라 주자학이 조선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을 듯 왕성하던 때, 모든 세간적(世間的)인 생각을 떠나서 일생 동안 오직 조선의 실제 연구에 전심(專心)하여 반계수록(磻溪隧錄 26卷)을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었다. 그 학풍의 후계자는 이익(李瀷, 1682~1764)으로 또한 평생 학구에 몰두하여, 조선의 실증적인 연구를 완성하여,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남기었으니, 이것은 그의 학문을 체계 세운 것이다. 실학파의 진면목은 성호 이후 영정 양대 간에 배출된 학자들에 의하여, 한 때 학문적으로 난만(爛漫)한 꽃동산을 이루었었다.

歷史學派

安鼎福 (號 順庵, 1712~1791) 東史綱目

李肯翊 (號 燃藜室, 1736~1809) 燃藜室記述

韓致奫 (1765~1814) 海東繹史

地理學派

李重煥 (號 靑華山人, 1690~英祖 庚申 1740以後) 擇里志(八域志⋅博綜志)

鄭尙驥 (號 農圃, 1678~1752) 八道圖

金正浩 (號 古山子, 高宗朝) 大東輿地圖⋅大東地志

言語學派

申景濬 (號 旅庵, 1722~1780) 訓民正音韻解

鄭東愈 (號 玄同, 1744~1808) 訓民正音論(晝永編)

柳僖 (號 方便子, 1773~1837) 諺文志

社會政策派

丁若鏞 (號 茶山, 1762~1836) 經世遺表⋅牧民心書

北學派

洪大容 (號 湛軒, 1731~1783) 湛軒書

朴趾源 (號 燕巖, 1737~1805) 熱河日記

朴齊家 (號 楚亭, 1750~1805) 北學議

반계에서 시작되어 성호에 와서 일단 체계를 세운 실학의 근본 의도는 조선의 사회 경제정책으로 먼저 토지⋅조세정책을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나아가 정치제도를 비판함에 중국의 제도에 근거를 두었다. 성호는 자기의 곽우록(藿憂錄)에서 사회⋅경제⋅정치를 논하였다. 이 학풍은 다시 성호 문하의 안정복⋅신후담(愼後聃)⋅윤동규(尹東奎)⋅정상기(鄭尙驥) 등과 일문(一門)에서 병휴(秉休)⋅만휴(萬休)⋅용휴(用休)⋅철환(嚞煥)⋅삼환(森煥)⋅가환(家煥)⋅중환(重煥) 등이 나와 경학(經學)⋅예학(禮學)⋅사학(史學)⋅경세(經世, 經濟學)의 학과 아울러 서학(西學) 특히 서양 과학과 사상을 받아, 성호학파(星湖學派)를 형성케 되며, 이런 백과(百科)의 학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와서 전개 체계를 세우게 되며, 특히 북학파의 사회 경제 사상과 그 정책에 끼치어 줌이 많았다. 또 성호 이후 실학파에 있어 국사(國史) 연구에 있어 실증적(實證的) 방법과 조선 중심의 인식 방법을 새로이 지니게 되어 주관적(主觀的)인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이긍익의 연여실 기술이 있고, 객관적으로 한치윤의 해동 역사는 우리 근세 사학의 삼대 명작이라 하겠다. 이러한 학풍은 널리 근세 학문의 여러 분야에 끼침이 많아, 학술⋅문예에 있어서도 조선을 중심으로 자각하여 나아가는 방향으로 크게 발전케 되었었다.

그리고 서양 과학 수용과 우리 전통적인 학술의 전개를 살피면, 먼저 병자란 때 인조의 세자(世子) 소현(昭顯)은 인질(人質)로 청나라 심양(瀋陽, 奉天)에 갔다가, 22년(1644) 조선으로 돌아오매, 안면(顔面) 있는 도이취 신부(神父) 탕약망(湯若望, Adam Schall)에게서 천문⋅수학⋅천주교(天主敎) 관계 서적과 여지도(輿地圖), 지구의(地球儀)와 천주상(天主像)을 받아 왔다. 이에 앞서 인조 9년(1631) 명에 진주사(陳奏使)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은 이타리아의 선교사 육약한(陸若漢, Joanne Rodriquez)에게서 치력연기(治曆緣起)⋅이마두 천문서(利瑪竇 天文書)⋅직방외기(職方外記, 世界地理書)⋅천문도(天文圖)⋅만국전도(萬國全圖) 등의 서양 과학서와 천리경(千里鏡)⋅일귀관(日晷觀, 天體觀測機)⋅자명종(自鳴鐘)⋅화포(火砲) 등의 과학 기계를 받아오며, 같이 간 역관(譯官) 이영후(李榮後)에게 서양식 천문(天文) 계산법(計算法)을 배우게 하며, 비장(裨將) 정계길(鄭季吉)에는 화포의 사용법을 배우게 하고, 중국인 포수 박무길(朴武吉)을 데리고 왔다. 또, 이에 앞서 중종 15년(1520)에는 당시 통사(通事) 이석(李碩)이 동남 아세아에 온 서양인의 사정을 전하며, 이광정(李光庭)은 구라파여지도(歐羅巴輿地圖)를 받아 왔다. 서양인들이 동양에 오자, 그 소식은 명나라 조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전하여졌고, 병자란 후 연경(燕京) 왕래하는 사신들이 다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었다. 정조 때 이승훈(李承薰)은 연경에 가서 프란시스코(Franciscan) 파(派)의 포튜갈 선교사 탕사선(湯士選, Alexander de Gouvea)에게 세례를 받고, 기하원본(幾何原本)과 함께, 시원경(視遠鏡)⋅지평표(地平表) 등을 받아 왔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받아오는 서양의 과학 서적과 기계 등은 임진란에 파괴된 우리 문화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천문학은 거의 독자적인 발달을 하고 있었다. 선조 34년(1601) 이항복(李恒福)은 임진란 때에 파괴된 천문 관측기를 시급히 다시 만들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인조 때의 유명한 학자 김육(金堉, 號 潜谷)도 관측기의 변천을 말하며, 정조(正祖) 때에는 측우기(測雨器)를 다시 만들며, 풍신기(風信機, 風速計)도 만들었다. 관측은 퍽 실제적이며 과학적이었으니, 특히 성주덕(成周悳)이 10년을 걸려 편찬한 서운관지(書雲觀志 4卷)에, 관측 제반의 제도를 22항목에 세분하여 놓았으니, 이것은 지금에 있어서도 과학적이다. 관측 방법은 비상현상(非常現象)으로 햇무리⋅달무리와 일월식⋅지진(地震)⋅성변(星變) 등을 관측하며, 통상현상(通常現象)은 일반 기상의 관측으로, 성변은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에 기록하고, 그 외의 것은 전부 풍운기(風雲記)에 기록하고 관측자에게 서명하게까지 하였다. 즉 숙종 39년(1712)에는 청인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조선의 북극고도(北極高度)를 측정하였으나, 영조 때에는 모두 한양(漢陽) 중심으로 측정하여, 시각을 서울 중심으로 잡아,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위시하여, 일월식의 시각 방위의 관측법을 세웠다.

이 문화 부흥기에 있어 남병철(南秉哲)은 수학자로서, 그의 저술 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에서 천체 측량에까지 발전시키었고, 또 의기즙설(儀器輯說)에서 관측 기계의 전반을 설명하였다. 아우 남병길(南秉吉)은 시헌기요(時憲紀要)에서 우리 나라 재래의 역법(曆法) 전반을 설명하며, 시헌역법(西洋太陽曆法)을 상세히 연구하였다. 그의 성경(聖經)은 중국의 천문서를 중심으로 서양인의 학설을 참조하여 성좌도(聖座圖)를 작성함에 일등성(一等聖)에서 육등성까지 1,317개에 미쳤으니, 그의 뛰어나게 앞선 연구이었다. 남씨 형제는 과학에서만 아니라, 근세 문화사상의 한 자랑이다.

또 서양 과학을 받아오매 이영후는 직접 육약한에게서 천문 계산법을 배우며, 한역(漢譯)된 양마락의 천문략(天問略, Ptolemaios의 天文學)과 서광계(徐光啓, 敎名 Paulo)와 용화민(龍華民, Nicolaus Longobardi)이 합작한 치력연기(治曆緣起, 西洋曆法의 沿革書)도 받아 왔다. 그 후 인⋅효(仁⋅孝) 간의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 김육에 와서 서양 역법을 쓸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육 자신에 의해 10여 년의 연찬을 거듭한 후 비로소 시헌력(時憲曆)이 시행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에 쓰던 역법에서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숙종 말년에 연경에 간 사신 이이명(李頥明)은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Ignace Koegler)에게 천문학과 서양 문물에 관하여 상세히 문의하여 새로운 것을 배우려던 동경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수학은 국내 상업의 발전과 특히 중종 이후 북으로 중국 무역의 발달에 따라, 개성 상인들은 독자적인 사계부기(四計簿記, 複式簿記)를 세워, 상당히 수학의 실질적인 면을 개척하고, 이이명은 또한 선교사에게 이마두의 산술개론서(算術槪論書)와 동문산지(同文算指)의 의문을 물었다. 기하원본⋅수리정온(數理精蘊)은 서양 수학 공부의 기초가 되었다.

실학파의 한 사람인 북학파(北學派)의 홍대용(洪大容, 號 湛軒)은 주해산용(籌解算用)에서 일상구구(九九)의 계산, 천체관측 및 음률개조의 수리적(數理的)인 데까지 널리 이해하여 오늘의 산술에서 대수학(代數學)⋅기하학에까지 미쳤었다. 그러나 철종(哲宗) 때의 이상혁(李尙赫)은 산술관견(算術管見)에서 중국의 수리정온의 부족함을 보충하며, 서양 수학을 응용한 기하학적인 전개와, 남상길의 산학정의(算學定義) 등은 다 부진하던 고전적인 수학의 최후의 업적이었다.

지리학은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중국 문헌에 의하여 동남 아시아의 사정을 전하며, 더욱 선조 36년(1603) 이광정은 구라파여지도를 보고 구라파의 지리를 이해하였으며, 또 명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가 간행한 세계지도의 전래는, 지리학에 있어 세계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였다. 선조 36년(1603) 이마두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전래되었다. 또 봉선사(奉先寺, 京畿道 楊州, 지금은 없다)에는 이마두의 지도를 모사(模寫)한 것이 남아 있었으며, 그 후 남회인(南懷仁, Ferdinandus Verbies)의 지도가 수입되어 철종(哲宗) 2년(1854)에 번각(飜刻)되었다.

이와 함께 지도 제작으로 영조 때 정상기(鄭尙驥⋅號 農圃)의 팔도도(八道圖)에서 100리척(里尺)을 응용하여 도형(圖形)을 정비하고, 또한 비변사에 비치한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는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더욱 순조(純祖) 34년(1834)에 청구도(靑丘圖)를 만든 김정호(金正浩, 號 古山子)는 27년 간 신고를 다하여, 혼자 힘으로 백두산(白頭山)에서 제주도(濟州道)까지 답사하고, 지도를 제작하여, 철종 12년(186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22단(段)으로 가로 잘라, 한 단에 100리를 포함시키고, 축척(縮尺)은 162,000분(分)으로, 10리(里) 방안(方眼)을 써서, 거리(距離)를 구절점(區切點)으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조선 토지조사국(朝鮮土地調査局)에서 지형도(地形圖)를 만들기 전까지의 가장 정확한 조선총도(朝鮮總圖)이었다. 김정호는 여지도에 맞추어 고종(高宗) 원년(1864) 대동지지(大東地志, 33卷 25冊 寫本)를 완성하였다. 이 지지의 상세함은 일본 육군성(陸軍省)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만든 50,000분의 1 지도에 비길 수 있다. 실학파의 이익(李瀷, 號 聖湖)은 또한 자연지리학(自然地理學)에 있어 많이 서양의 학설을 받아들이었다. 김만중(金萬重, 號 西浦)의 서포만필(西浦漫筆)이나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晝永編)에는 서양의 지구설(地球說, 땅이 둥글다는 것)을 받아들이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믿는 고루한 사람을 통격하였고, 또 독자적으로 지전설(地轉說)을 발견하여 김석문(金錫文)의 삼환설(三丸說)과 홍대용의 지전설(地轉說)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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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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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안으로 전통적인 지지 편찬의 사업은 부단히 계속되어,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 27卷)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세종대왕 이후 지지 편찬에 나타난 인문지리학적인 정리에다가, 새로이 산천(山川)⋅도리(道里)의 부문을 증가하여 발전시키었다. 개인으로 힘써 새로운 길을 연 이중환(李重煥, 號 靑華山人)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전에 없던 체계로 우리 나라 팔도의 지리를 밝히었으니, 곧 인문지리학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동북방의 경계 지대가 청과 문제가 있게 되며, 한편 국방상으로도 주시할 그 지대에 관하여는 영정 간의 홍양호(洪良浩, 號 耳溪)의 북새기략(北塞記略) 등 역작이 나왔다. 역사지리학에는 정약용(丁若鏞, 號 茶山)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와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속편인 지지(地誌)가 특기할 것으로, 한진서의 연구는 우리 나라 지리를 외국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이 인식하려는 귀중한 연구이다. 선조 때 한백겸(韓百謙, 號 久菴)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북방의 정치적인 지리를 말하며, 한편 자연지리에 언급한 선구자이며, 근세의 성해응(成海應, 號 硏經齋)⋅유득공(柳得恭)도 지리학에 공이 컸다.

의학은 선조 29년(1597) 허준(許浚)이 의서(醫書) 편집의 명을 받았으나, 정유(丁酉)란으로 일시 중지하고, 광해군(光海君) 3년(1611)에 비로소 완수한 동의보감(東醫寶鑑, 25卷)은 세종 때의 의방유치가 너무 호한(浩瀚)한 데 비하여 간요(簡要)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궁정을 중심한 국한된 사람들에게 이용된 보감과 달리 좀 더 실용적으로 일반에게 보급된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濟衆新編)과 황도연(黃道淵)의 방약합편(方藥合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고종 연간의 이제마(李濟馬, 號 南武)는 만년에 함흥(咸興)으로 가서 치료와 연구에 힘써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수립하였다. 사상의학 원리는 그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高宗 31年 著述)에 자세히 밝히어졌다.

또 의서의 번역으론 인조 때 이서(移書)의 마경초언해(馬經抄諺解)와 정조 때 서유린(徐有隣)의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冤錄諺解) 등은 수의학(獸醫學)과 법의학에 공헌한 바 큰 것이다. 무원록언해는 영정 간에 걸쳐 구택규(具宅奎)와 그의 아들 구윤명(具允明)이 세종 때에 신주(新註)한 것을 다시 증수(增修)하여 과학적으로 우수한 연구를 이루었다. 국가적 문화정책으로 영조 때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국조악장(國朝樂章) 등을 편찬하여 조선 문화의 재인식을 촉구(促求)하였으며, 다음 정조는 즉위한 해(1776)에 규장각(奎章閣)을 두고 제도의 정리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며,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을 간행하여 국가 이념을 주지시키며 다시 재흥시키어 보려고 애를 쓴 바 있었다. 또 민간에서도, 먼저 말한 실학파의 학자들이 각 방면에서 조선을 연구하며, 실천적으로 사회를 개량할 방안을 세웠으나, 그것이 제대로 실현이 못 되었다. 역시 같은 실학적인 학자들 중에 숙종조의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는 자연과학의 문헌으로도 유명하나, 실제 생활을 지도하는 경세(經世)의 책으로도 근세 우리들의 생활에 끼친 바가 크다. 이와 같은 것으로 부녀필지(婦女必知)니 규합총서(閨閤叢書)도 일상 생활을 실제 지도한 책이고, 이와 같은 것으로 어숙권(魚叔權)의 고사촬요(攷事撮要)와, 그것을 증보(增補)한 영조 때의 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攷事新書)는 모두 일상 생활을 개량하려던 것으로 유명하다. 더욱 서명응의 손자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륙지(林園十六志. 또는 林園經濟志 113卷 52冊)는 조선의 학문을 실제적으로 고쳐서 연구한 것이니, 특히 산업 기술면에까지 미쳐 상세히 조사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저작으로는 말기의 이규경(李圭景, 李德懋의 孫)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0冊)에서 집대성이 되었다. 이런 체계적인 것에 비하여 김려(金鑪)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와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 등은 실생활의 면을 학문적으로 이해한 과학서(科學書)로 더욱 희귀한 연구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보아 과학적인 연구도 실생활에 충분히 이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조 때도 세상에 농서(農書)를 구하였고, 당시 실학파의 거장으로 면천(丏川) 군수이었던 박지원은, 과농소초(課農小抄, 6冊)에서, 농업 기술 전반을 실제에 맞추어 정연히 정리하며, 자기의 의견을 보태었다. 이에 앞서 박세당(朴世堂, 號 西溪)은 색경(穡經, 2冊)에서 농사 전반에 걸쳐 상세히 지시한 바 있었다.

실제 학문과 달리 당쟁에 좇아 파벌을 이룬 유학은 양대 전란을 겪은 뒤에도 끊임없이 퇴계와 율곡을 각기 계승, 조술(祖述)할 뿐 아니라, 서로 공격 비판하였다. 율곡의 문하인 김장생(金長生, 號 沙溪)의 아들 김집(金集, 號 愼獨齋)은 가학(家學)을 이었으며, 그 문하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號 同春堂) 등은 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일세의 대정치가로서, 더욱 당파에 있어 노론파의 영도자인 송시열은 퇴계학설의 사칠설(四七說)을 공격할 뿐 아니라, 퇴계가 근거를 두었던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의 사단이발(四端理發), 칠정기발(七情氣發)은 기록하는 사람이 잘못 기록하였다 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함께 이기(理氣)의 공발(共發)로 보았다. 즉 사단칠정에 다 선악(善惡)이 있다는 설이다. 이에 대립하여 퇴계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정구(鄭逑, 號 寒岡)⋅김성일(金誠一, 號 鶴峯) 등이 있었으나, 한강의 제자 장현광(張顯光, 號 旅軒)은 오히려 율곡의 학설을 따라, 경위설(經緯說)에서 이기(理氣) 이원(二元)을 설명하고, 영남(嶺南)에서 그 지반을 폈다. 그러나 영남에 있어 퇴계 학설을 충실히 조술(祖述)한 이상정(李象靖, 號 大山)은 영조 때의 학자로 벼슬이 형조(刑曹)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안동(安東 慶北)으로 돌아가서 자제들을 가르치어 일세의 학명(學名)을 영남에 떨치었다. 그의 이기 사칠론(四七論)에서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만드는 데에도 모두 퇴계의 설을 주장하였다. 즉 마음이 발동함에 이르러 이기가 서로 합치어 칠정(七情)을 나타내고, 사단도 그 속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직도 영남 학파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기호(畿湖)의 노⋅소론(老⋅少論)은 흔히 정치에 관계하여 시문을 장하였으나, 경학 성리(性理)에 있어서는 영남 학파가 철학적으로 기품을 지니어 그 풍조는 후일까지 떨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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