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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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Ⅶ장 조선 문화 중기(1593~1863)
  • 4. 천주교의 전래와 동학 운동

4. 천주교의 전래와 동학 운동

포튜갈 사람들의 동양 무역의 발전에 따라 예수회(耶蘇會)의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오더니, 명 신종(神宗) 만력(萬曆) 연간에 처음으로 이타리아 사람 마테오⋅릿치(Matteo Ricci, 利瑪竇) 등이 들어와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중종 때부터 중국을 통하여 유롭 사람들이 동양으로 오는 것을 알았고, 선조 때의 허균(許筠)은 서학(西學, 天主敎)을 일찌기 알게 되었고, 이수광(李晬光)은 이마두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였다. 또 소현세자(昭顯世子)는 탕약망(湯若望)에게서 천주교 관계 서적을 받아오며, 신자를 데리고 왔었으나, 세자는 귀국하자 곧 세상을 떠나니, 따라온 신자들은 다시 청 나라로 돌아갔다. 북경에 와 있던 서양 신부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선에 들어오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영조 때의 이익(李瀷)과 그 문하의 안정복 등의 남인(南人) 학자들은 서학(西學) 즉 천주학(天主學)을 연구하였다. 또 일부에서는 비밀히 모이어서 천주교를 믿고 있던 이벽(李蘗)⋅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 등은 교리(敎理)를 연구하였으나, 의례(儀禮)를 몰라서 곤난을 느끼어 때마침 같은 동료의 한 사람인 이승훈(李承薰)에게 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이 연행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감을 기회로 따라 가서, 의식과 교리에 관한 서책을 받아오게 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정조 8년(1784)에 세례(洗禮)를 받고 돌아와서 같은 교유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 자신으로 교회를 성립 발전시키었다. 정조 15년(1791, 辛亥) 진산(珍山, 全羅道)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조상의 신주(神柱)를 폐위하매 이를 기회로 일부 관헌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하여 탄압을 주장하여, 드디어 윤지충⋅권상연 등이 처형당하였으니, 이 사건을 신해(辛亥) 진산 사변이라 한다. 이어 정조 16년(1792) 조선 교회는 북경 교회를 통하여 로마 교황(敎皇)에게 알려지고, 정조 18년(1794)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비밀히 들어와서 전도하였다. 교회에는 남인들이 많이 관계하였으나, 남인들도 두 갈래로 나뉘어서 다투어 천주교를 믿는 파를 신서파(信西派)라 하고, 그 반대파를 공서파(功西派)라 하였다. 그러나 호학(好學)의 군주 정조 위에 있으며, 그 아래 채제공(蔡濟恭, 南人 時派의 中心 人物)이 영의정의 자리에서 파쟁을 무마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없었으므로 이 한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이때 이가환(李家煥) 등은 교리책을 번역하여(1788~1791), 상하의 모든 분야에 교를 퍼지게 하였다. 마침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고 정조 또 돌아가니 정조에 은연히 대립하고 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곧 순조(純祖) 원년(1801, 辛酉)에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교인 이승훈⋅권철신⋅이가환 등을 처형하였으니, 이 탄압을 신유박해(辛酉迫害)라 한다. 신자 황사영(黃嗣永)은 조선 교회 사정을 북경을 통하여 서양에 전하여, 원조를 받으려 하다가 발각되어 처단을 받으니, 이것이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다. 뒤 이어, 정하상(丁夏祥) 등의 활동으로 교회의 사정이 북경을 거쳐 로마 교황에게 전해지자, 1831년(純祖 31年)에 조선에 독립 교구(敎區)를 두기로 하고, 프랑스의 파리 외방(外邦) 전도회(傳道檜,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s de Paris)에 조선 전교를 명하였다. 이에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가 오고, 뒤 이어 앙벨트(Imbert, 范世享) 주교(主敎)⋅샤스탕(Chastan)⋅모오방(Maubant, 羅伯多祿) 등의 프랑스 신부가 들어왔다. 헌종(憲宗) 5년(1839, 己亥)에 다시 교도를 박해하니, 세상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라 한다. 전후하여 김대건(金大建)은 마카오(媽港) 신학교(神學校)에서 공부하고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때에 프랑스의 페뢰올(Ferreol), 다베뤼(Daveluy, 安敦伊)들과 함께 전교하다가 순교(殉敎)하였다. 그 뒤를 이어 김대건과 같이 마카오 신학교에 있던 최양업(崔良業) 신부가 입국하자, 곧 베루느(Berneux, 張敬一) 주교 등이 들어와서 전교하였다.

그러나 안에서는 심한 파쟁에 정신이 없어,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일찌기 서양인들은 조선을 알았으며, 선조 15년(1582)에는 서양인 마리이(馬里伊) 등이 제주에 표착하였으나, 그대로 북경으로 돌려 보냈고, 임진란 때 웅천성(熊川城)에 포튜갈 신부 세스페데스(Cespedece)가 왔었으나 조선과는 아무 관계없이 돌아갔다. 효종 4년(1653)에는 화란(和蘭, Nederland)의 상선이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그때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고초를 겪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조선을 소개하며, 순조 16년(1816) 영국의 호올(Basil Hall)이, 서해안을 지나 서남 해상을 통과하여 지나 갔고, 31년(1831) 홍주(洪州, 忠淸道) 고대도(古代島)에도 이양선(異樣船)이 왔다 가며, 이어 헌종 11년(1845)에는 또 영국의 벨처(Captain Sir Edward Belcher)가 사마랑호(Samarang)를 타고와서 제주도,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조사하였고, 이듬 해 12년(1846)에는 프랑스 군함이 헌종 5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의 항의를 제출하러, 홍주 외연도(外煙島)에 왔었고, 이듬 해 13년에 다시 회답을 받으러 오다가, 전라도 서해안 고군산(古羣山) 군도 앞 바다에 주저앉았다. 계속하여 태평양의 물결은 우리 나라 바닷가에 쉬지 않고 부딪쳐 왔다.

천주교의 전래와 함께 서양의 자본주의 세력은 차츰 우리 나라에 다가 왔다. 이 때 국내는 왕실의 척족(戚族)들이 세도(世道)를 하여,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하며 농촌의 피폐는 심하여, 삼남을 위시하여 민요는 쉬일 사이 없고, 사람들의 생활에 안정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새로 전해온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으나, 순조 원년(1801)⋅헌종 5년(1839)⋅고종 3년(1866)에 걸쳐 탄압이 심하여 허다한 교도들이 순교(殉敎)하였으나, 농민들의 괴로운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 때 최수운(崔水雲)이 부패 불안의 사회를 건져 보겠다고 하여, 1860년 도를 닦고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에 합친다는 “인심 즉 천심”(人心卽天心)의 이(理)를 깨닫고, “보국안민”(輔國安民) 즉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포덕천하”(布德天下), 즉 덕을 천하에 전할 것, 억조창생 동귀일체(億兆蒼生 同歸一體), 즉 모든 사람은 다 같다고 가르치게 되었으나, 동학에서는 유교의 삼강 오륜(三綱五倫)과 천주교의 천주(天主), 불교의 도를 닦아 깨달음과 또 자연(自然) 그대로를 표방하며, 지상(地上) 신선(神仙)을 목표하였으니, 신선사상은 또 도교(道敎)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퍽 복잡하게 여러 종교의 특색 중 동학에서 필요한 것을 따서, 종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국의 힘인 양(洋, 西洋)⋅왜(倭, 日本)의 두 세력을 다 배척하며, 서학(西學, 天主敎)에 대하여 우리의 가르침(敎)이라 하여 동학이라 하였다. 이어 최수운은 개교 3년 후에 접소(接所, 布敎所)를 만들어, 교단(敎團)의 조직 활동을 하였으나, 철종(哲宗) 14년(癸亥, 1863)에 잡히어 천주를 받든다고 하여 사학(천주교)으로 잘못 알고, 이단 사교(異端邪敎)로 몰리어 참수(斬首, 목을 베이는 형)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동학도(東學徒)는 교를 전하며, 교세(敎勢) 확장에 힘쓰며, 교도들은 교조(敎祖) 최수운의 원을 풀려는 신원(伸寃) 운동을 시작하여, 고종 29년(壬辰, 1892) 충청 감사(監司)에게 신원 탄원서(嘆願書)를 던지고, 이어 전주 감영에 던지며, 12월에는 서울에 탄원서를 내어 동학교도의 박해 받음을 말하고, 이듬 해에는 서울에 와서 복합(伏閤)하게 되었고, 3월에는 최시형의 지휘에 따라 보은(報恩)에 모였을 때, 교도들은 관헌⋅토호의 토색(討索)을 비난하며 분개하여, 동학도의 기세가 자못 험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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