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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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Ⅷ장 조선 문화 후기(1864~1910)
  • 4. 신 교육과 신 사조(新思潮)

4. 신 교육과 신 사조(新思潮)

일본이 로시아와 싸워서 이기자 포트머스조약과 영일(英日) 동맹에 따라, 우리 나라를 침범하매 우리들도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여, 빨리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겨누려던 것이었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 기독교 신교파(Protestant Mission)의 선교사들이 와서 학교를 세우고 신교(新敎)를 전하며, 새로운 교육을 시작하였다. 즉 고종 22년(1885)에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는 한국 정부의 후원을 얻어,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우니, 이 학교는 신 교육의 학교로는 처음이요, 서양식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학문을 전하여 끼친바 컸다. 5년 뒤늦어 고종 27년에는 또한 아펜젤러 목사의 힘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설립되니, 이 학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자 교육의 새로운 기관으로 크게 활동하게 되었다. 또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는 평양의 숭실(崇實)전문학교(The Union Christian College, 1906)와 서울의 연희(延禧)전문학교(The Chosun Christian College, 1915)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1917) 등이 일본에 합방되던 전후에 우리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새로이 허다한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서울에는 보성학원(普成學園, 1905)⋅양정의숙(養正義塾, 1905)⋅휘문의숙(徽文義塾, 1906) 등이 설립되고, 특히 평양의 안창호(安昌浩)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서북인(西北人)의 각성을 촉진시키며, 민족운동의 근거를 이루었다.

일본인은 통감부를 통하여 착착 조선을 병합할 계획을 추진하여, 모든 기관을 자기네의 관리하에 두도록 개편할 때, 우리들의 문화 개척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의 기독교 선교에 따른 새로운 문화 수립의 운동이었다. 자기네의 선교를 위하여서 조선 교구(敎區)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우리말을 연구하여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과 조선어문전(朝鮮語文典, 1881) 등을 편찬 간행하여, 내외의 학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로 1910년 사이에 망국적인 매국노(賣國奴) 송병준(宋秉畯) 등의 무리는 일본의 보호를 주장하여, 갖은 흉악한 짓을 다 할 때, 우리들의 선각자들은 힘써 자주독립(自主獨立)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화 운동을 일으키었다. 당시 서울은 물론, 각 지방에도 다수의 신 교육과 정치운동의 단체가 생기었다. 그 중 자강회(自彊會)⋅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흥사단(興士團) 등이 유명하며 후일 우리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치었다. 밖으로 미국 본토와 하와이(Hawaii), 로시아의 우라디오스토크(Vladivostok), 일본의 도교(東京 Tokio), 중국의 상해(上海, Changhai) 등지에 같은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일반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신 문화의 수입을 위하여 출판⋅신 문예 운동이 일어났으니, 고종 20년(1883)에 정부 기관으로 박문국(博文局)을 두고, 관보(官報)의 성질을 띤 한성순보(漢城旬報, 2년 후 週報라 고침)를 내었다. 민간에서는 고종 33년(1896) 서재필(徐載弼, Dr. Jeason)이 독립 신문을 국문으로 간행함을 위시하여, 1898년 남궁억(南宮檍)이 황성 신문(皇城新聞)을 발간하여, 민족 정신을 고취하더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1905)을 반대하다가, 일본인의 탄압으로 폐간되었다. 그 때 영국인 베텔(Bethell)은 양기탁(梁起鐸)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발간하여 배일 운동을 하였다. 이에 전후하여 서울과 지방 각처에서 다수한 신문과 잡지가 간행되었으니, 최남선(崔南善, 六堂)이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발행하던 월간 잡지 소년(少年)은 근세 문화에 크게 끼친바 있었다. 또 같은 때에 미국인 헐버트(H. B. Hulbert)는 코리아⋅레뷰(The Korea Review)를 간행하여, 조선 문화의 연구는 물론, 조선 사정을 외국에 전하기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학부(學部) 안에 편즙국(編輯局)을 두고, 현채(玄采) 등에게 여러 가지 교과서를 편찬케 하고 이것을 간행하며 신 교육에 힘을 썼다. 때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이란 책을 국문과 한문을 섞어서 간행하며, 고종 34년(1897)에는 역시 학부에 국문 연구회를 두니, 주시경(周時經)⋅최광옥(崔光玉) 등이 국문 연구에 힘써, 우리글을 정리하는데 현대적인 기초를 주었다. 김택영(金澤榮)⋅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號 丹齋) 등은 우리 나라 역사와 지리 연구에 힘써 개척함이 많았으나, 김택영은 조선 말기의 가장 유명한 한시인(漢詩人)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알려졌고, 신채호는 국사의 근대적 역사의 선구자로, 오직 민족의 정기(精氣)를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니, 그 발견한 바는 우리 나라의 학자들에게는 물론, 중국 학자들에게 끼친 바 크며, 더욱 중국 학계에서 존경을 받는다.

문예 운동에는 신소설(新小說)에 이인직(李人稙)은 1909년부터 귀의 성(鬼의聲)⋅혈의 루(血의淚) 등의 작품을 내고, 이어 이해조(李海朝)는 자유종(自由鐘)⋅옥중화(獄中花, 春香傳) 등 30여종의 신 소설을 지었으니, 그들이 다 유명할 뿐 아니라, 신 문학 운동의 선구였다. 이에 따라서 신 소설 작가로 여러 사람이 속출하였다. 신 소설의 발달과 함께, 최남선은 신체(新體)의 시를 잡지 소년에 발표하여 자유시의 선구를 이루었다.

다른 한편 교회(敎會)측에서는 고종 19년(1882) 누가(St. Luke)와 요한(St. John) 두 복음(福音)이 국문으로 번역되어, 기도교 성경이 차츰 전부 번역되었으니, 이것은 종교 신앙을 통하여 국문을 이해하는 데 큰 운동이 되었다. 이어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이 번역되고, 헐버트는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짓고, 윤치호(尹致昊)의 웃으운 이야기(伊索寓言, Aesops) 등이 나오며,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 등 서구의 재미있는 작품이 계속 번역 수입되었다.

그러나 신 문화의 수입과 민족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이 전개는 되어도, 이미 구미 열강의 공인(公認)을 받고, 조선 침략을 진행하는 일본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구한국(舊韓國) 말기의 우리 나라 개혁은 이미 뒤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민족 국가의 운명과 함께 고전적(古典的)인 우리 문화는 쇠퇴의 길을 밟고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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