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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민족 문화의 위기(危機)

2. 민족 문화의 위기(危機)

1910년 국권을 잃은 후 1945년 8월까지 만 35년 간의 일본 제국주의 조선 통치는 우리의 강산을 그들의 식민지(植民地)로, 쌀을 위주하는 농산물과 그 외의 원료(原料)를 제공하게 얽매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에서 생산된 조잡(粗雜)한 상품을 투매(投賣)하는 시장으로서 억눌렀다. 처음 총독부를 설치하자, 곧 지방제도(地方制度)를 통일하고 경찰권(警察權)을 통합하며, 집회⋅결사(結社)와 출판물(出版物)을 엄격히 단속하며, 외국에서 들어오는 것도 엄중히 단속하였으니, 모두 공안풍속(公安風俗)을 위한다는 명목(名目)을 세우고, 사실은 민족운동의 탄압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1910년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을 두고, 1918년 10월에 토지 조사를 완료하여 조선 재래의 토지제도를 개편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의 통제의 첫걸음이었다. 이에 따라 미간지(未墾地)의 개척, 치수(治水)의 조사, 권업모범장의 직속 통일을 기하고, 동양척식회사를 보호 발전시키었으니, 곡창 한국의 합리적인 경영을 꾀하였다. 1915년까지에는 기상관측망(氣象觀測網)을 대략 완성하고, 민력(民曆)을 만드는 등, 농업 사회 통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통치에 이용하기 위하여, 구관조사(舊慣調査)에 착수하여, 1908년 법전조사국(法典調査局)을 설치하였고, 1915년에는 총독 정치의 자문기관(諮問機關)인 중추원(中樞院)에 그 사무를 이관하였다. 이어 조선 사료(史料) 조사와 고적(古蹟) 조사에 착수하여, 삼년 간에 조선사가 편찬되었으며, 1909년부터는 세끼노(關野貞, Sekino) 등이 한국의 유적⋅유물(遺物)을 조사하며, 또 한편 1911년부터는 따로 선사시대(先史時代) 유적⋅유물 조사도 진행하였다. 이어 총독부에서 1916년 박물관(博物館)을 설치하였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과 전국에 걸쳐, 시위 운동이 전개되자, 횡포한 학살(虐殺)과 탄압으로 억누르며, 조선 사람에만 적용하는 치안유지(治安維持)에 관한 법규(法規)로서 보안법(保安法)을 공포하여, 우리들의 정치 운동을 탄압하였다. 3월 1일 운동을 계기로 총독 정치의 방침을 바꾸어 조선⋅동아의 두 개의 우리말 신문 발간을 허가하고(1920), 서울에 식민지 통치의 촉탁연구 기관으로서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창설되었다. 1922년에 조선 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를 개최하기 시작하며, 조선사(朝鮮史) 편수(編修)를 계획하여 일본인의 손으로 착수하였다. 이에 얼마의 한국 사람들도 고용되었다. 이로서 지방사료(地方史料)의 탐방을 개시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고문서(古文書)⋅고기록(古記錄) 등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조선사 편수회에서 편찬에 이용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귀중한 것은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으로 간행되었다. 1919년 지방제도가 개혁되었고, 1931년 지방 자치제도(自治制度)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법령은 주체가 일본이 되고, 우리들은 종속되도록 되었다. 뒤를 이어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진흥과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을 일으키어 피폐한 농촌을 정치적으로 수습하기에 힘써 농산물의 증산을 꾀하였고, 또 산금(産金) 장려를 하였다. 산업 장려와 함께 전력(電力) 통제를 계획 실시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산업 경제 기구를 일본에 예속 이용하기 위한 합리적인 정책이었다. 또 농촌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금융조합(金融組合)을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하여 1928년 금융조합연합회(聯合會)를 설치하였다. 1936년 이후에는 만주 사변 이후 중국 대륙 침략을 수행하기 위하여 애를 쓰던, 일본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 휘몰아 넣게 되매, 1937년 7월부터 중국 침략을 개시하면서 한국은 완전히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통제하매,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하며, 성명(姓名)까지 고치어 일본식에 따르는 등, 형언키 어려운 폭정(暴政)의 계속은 드디어 우리들을 강제 노동에 몰아 넣고, 마침내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매, 일본 침략군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여, 젊은 청년과 학도들을 그들의 군문(軍門)에 서게 하였다. 이 뿐 아니라, 종래 자기네들이 이용하기 위하여 조사 연구하던 우리 문화의 조사 연구도 중지하고, 우리말로 간행 되던 신문 잡지의 간행을 중지하며, 민족적인 문화의 박멸이 전개되었다. 이런 암흑 속의 고민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연합국 측에 허리를 굽힘에서 서광을 보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국토와 문화를 다시 찾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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