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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우리 민족의 건국과 발전

2. 우리 민족의 건국과 발전

청동기 문화의 유입

신석기 문화와 씨족 사회 생활을 영위하던 동방 사회에 큰 변동을 일으키게 한 것은 대륙으로부터의 금속 문화의 전래였다. 우리 나라에 금속 문화가 도입된 것은 흉노족에 의한 청동기 문명의 전래에서 비롯된다. 몽고 고원을 중심으로 한 대륙 북방 초원 지대에 살던 유목민인 흉노족은 기원전 5~4세기경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그 세력을 펴다가, 만주 땅의 우리 겨레에게 스키토 시베리아(Scytho-Siberia) 계통의 북방계 청동기 문명을 전해 주었다. 따라서, 청동기의 도입에 따라 금속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그 초기는 석기와 금속기가 혼용되었다.

청동기의 도입에 따라 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으며, 청동으로 만든 무기의 사용에 따라 정복 사업이 촉진되었다. 이 결과, 공동체적 사회 조직에 변화가 일어나 권력을 가진 족장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급층이 생기게 되었고, 따라서 피지배 계급층과의 사이에 권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 작용이 생겼다.

우리 민족의 건국

금속 문명의 전래에 따른 토착 사회의 발전 과정이 만주와 반도의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륙 문명을 먼저 섭취한 북방 사회가 먼저 발달하였고, 북방에서도 대동강 유역이 가장 먼저 깨우쳐졌다.

우리 나라 최초의 부족 국가인 고조선은 바로 이 곳에서 자라났다. 고조선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고대 문명을 이루었으며, 주위 여러 부족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건국은 바로 우리 나라의 건국이다.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풍운수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단수를 중심으로 한 신시를 이루고, 생명, 질병, 선악, 양곡 등 인간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으며, 단군은 국호를 조선이라 부르는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은 동방 사회에서의 새로운 사회 변동을 뜻하는 건국 신화이다. 즉, 고조선 사회가 수호신을 모시는 제단을 중심으로 한 제⋅정 일치의 사회이며, 제사와 정치 양권을 장악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활동을 펴게 된 나라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철기 문명의 전래

기원전 4~3세기경 한민족의 활발한 활동에 따라 철기 문명의 전래를 보게 되었다. 그 전래의 경로는, 명도전의 출토로 보아, 만주를 거쳐 압록강 중류를 통하여 청천강, 대동강 유역으로 번진 것이라 생각된다.

석기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가 병용된 시대의 유물로는 동검(구리칼), 동모(구리창), 동과(구리창), 동탁 등의 구리 제품과, 명도전, 철모(쇠창), 철부(쇠도끼), 철서(쇠호미) 등의 무기와 농기구가 있으며, 또한 쇠로 된 재갈인 철비 등의 마구가 있다. 이러한 유물 가운데는 대륙의 그것과 다른 독자적인 것도 있어 주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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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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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명의 전래는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정복 사업의 격화를 이끌어 동방 토착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였다.

그 결과, 각지의 부족 국가 체제가 강화되었고, 부족 국가 간의 투쟁이 진전되어, 마침내 삼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배경을 이루었다.

고조선의 변천

고조선 사회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기원전 4세기경에는 그 세력이 남으로 진번, 동으로 임둔, 북으로 예맥 등 여러 사회에까지 뻗쳤었다. 고조선의 북방 진출은 한족의 동방 진출로 북변에서 시끄러운 일이 자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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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시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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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경, 진⋅한 교체로 인한 중국 사회의 파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피하여 동방 사회로 흘러 나왔다. 고조선은 이들 망명하여 오는 유민을 포섭하였는데, 이 무리를 배경으로 위만이 세력을 규합하여, 준왕을 몰아 내고 고조선을 지배하였다(B. C. 194년경).

위만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그 세력을 주위로 폈으나, 중국 지배의 토대를 강화한 한의 동방 진출 정책과 충돌하여, 마침내 우거왕 때, 1년간의 항전도 헛되이 평양성은 함락되었고, 따라서 조선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동방 진출의 야심을 펴게 된 한 무제는 기원전 108년, 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이른바 사군을 설치하여 군사적인 지배를 실시하였다.

한의 군현과 토착 사회

한은 군을 다시 현으로 세분하고, 군과 현에는 한의 본국에서 태수와 속관을 파견하여 식민지적인 직할 정치를 폈다. 사군에 대한 경제적인 착취는 상당하여, 소금, 철, 목재, 농산물, 해산물을 비롯하여 노동력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의 침략과 착취는 도리어 우리 민족의 줄기찬 반항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이민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그 단결이 촉진되었고, 집권력의 강화를 보게 되어, 토착 사회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한의 군현을 설치한 후 26년 만에 우리 민족의 줄기찬 반항으로 진번, 임둔의 두 군을 철폐하게 되었으며(B.C. 82), 현도군도 만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B.C. 75). 후한 말에는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한족 군현 세력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줄기찬 공격으로 313년에 반도 안에서 완전히 구축당하였다.

북방 부족 국가의 발전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정착한 만주와 반도 각지에서도 부족 국가가 형성되었다. 각 부족 국가는 자연 환경의 차이에 따라 인문 활동에도 다소의 차이가 생겼으나, 모두 우리 겨레의 부족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장 북부의 부족 국가 부여는 비옥한 북만주 평야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여 풍족한 생활을 하였으며, 이미 1세기에는 흉노, 고구려와 더불어 북동 아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고구려는 일찍부터 대륙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위 한족 세력과의 투쟁을 통하여 차차 집권력을 강화하여 마침내 1세기 후반에는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여, 주위 여러 부족 국가를 제압하게 되었다.

함경도 지방에 자리잡았던 옥저와 그 남부의 일부와 강원도 북부의 동예는 고구려보다 후진적이어서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남방의 삼한

한반도의 중부 이남의 여러 사회는 북방에 비해 발달이 훨씬 더디었다. 그러나, 여러 부족 사회가 자라나는 가운데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진이라는 연맹 조직이 생겼다.

그 후, 북방으로부터의 유이민과 한 군현의 영향으로 새로운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더니, 그 결과로 마한, 변한, 진한의 이른바 삼한1) 진한 북재설과 남재설의 대립이 있어 삼한의 명확한 위치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엇갈려 있다.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삼한은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신지니 읍차니 하는 지도자들이 각기 자기 부족을 영도하면서 유력한 부족 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 놓은 연맹체였으며, 대체로 한강 유역의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문적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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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국가의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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