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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발해

5. 발해

발해의 흥망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남쪽은 신라에 속하였지만, 북쪽은 한때 당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독립 운동을 일으켜,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699). 이가 바로 발해의 고왕이다.

발해 국민의 대부분은 말갈족이었으나, 그들은 고구려 시대에는 고구려에 복속하였던 자들이었으며, 또한 발해의 지도층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그러므로, 발해의 국가적 성격은 고구려의 후계자라 할 수 있다.

발해는 처음 당⋅신라와 대립하면서 국가 발전을 꾀하였다.

무왕은 일본과 국교를 트고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당의 떵조우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다음 문왕은 더욱 국토를 확장하는 한편, 당과 화친하여 당 문화를 섭취하였다.

그리고, 문화 활동에 주력하여 문운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이에 당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이리하여, 선왕 때에는 전성 시대를 이루어 문물 제도가 완비되었고 국력이 크게 떨치어 영토가 동으로 연해주, 서로 카이위안, 남으로 함남, 북으로 헤이룽 강에 이르렀으나, 선왕 후에는 국세를 떨치지 못하여 서북으로부터 이동해 온 거란에게 멸망되고 말았다(926). 발해가 망하니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은 그 대부분이 남으로 이동하여 고려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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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영토
발해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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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문화

발해의 제도와 문화는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독자적인 것도 있었고, 고구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발해는 당의 제도를 본떠 중앙에 정당, 선조, 중대의 3성을 두고, 정당성에 대내상을 두어 국무를 총리하였으며, 충, 인, 의, 지, 예, 신의 6부를 두어 국무를 분장하였다. 이 밖에, 감찰 기관으로 중정대를 두고, 국립 대학으로 주자감을 두었다. 그리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발해는 서울을 자주 옮겼는데, 그 중 상경 용천부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지가 되었다. 서울 상경은 당의 서울 장안성을 본떠 내성과 외성으로 구별하였고, 내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 대로가 있어, 그 좌우에는 집이 질서 있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그 성터, 절터가 남아 있고, 기와, 벽돌, 불상 등이 발견되고 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연꽃 및 당초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며, 당의 영향을 받은 석등은 웅건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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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석등
발해의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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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궁전 기단의 사자머리
발해 궁전 기단의 사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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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신라와는 국교를 트지 않았지만, 당 및 일본과는 국교를 맺고 접촉이 잦았다. 당에 모피, 밀(봉밀), 철, 사슴 등을 수출하고 비단, 곡식, 서적 등을 수입하였으며, 일본에는 주로 모피 등을 수출하고 직물을 수입하였다.

▦ 연구 과제 ▦

1. 우리 향토에 있는 삼국 시대의 유물, 유적에 관하여 알아보자.

2. 삼국 문화의 생성 과정과 그 특색을 관련지어 비교하여 보자.

3. 신라가 국토와 민족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인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자.

4. 신라의 삼국 통일의 의의에 관하여 토론하여 보자.

5. 우리 삼국 문화가 일본 아스카 문화에 끼쳤던 영향을 연구하여 보자.

6. 발해 건국의 의의를 말하여라.

7. 발해는 우리 민족사상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나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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