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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시대의 정치

후삼국과 민족의 재통일

신라는 혜공왕 때부터 귀족 사이에 분열이 생기어, 왕위 쟁탈전이 잇달아 일어나 정치가 문란하여졌다. 따라서, 사회는 혼란해지고,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귀족의 사병이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또 도둑 무리가 되어 세상을 소란하게 하였다. 더구나, 진성 여왕 때에 조세 독촉이 심하자, 마침내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틈을 타서, 평소에 야심을 품어 오던 지방의 토호들은 각처에서 군사를 일으켜 세력을 떨치게 되었으니, 이들 중 북원(지금 원주)의 양길, 완산주(지금 전주)의 견훤 등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 중에서도 양길의 부하로 있던 궁예는 강원, 경기, 황해도 지방을 공략한 후, 양길을 타도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901). 그는 그 후 국호를 마진이라 고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그 후, 도읍을 송악(지금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겨, 다시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라 고쳤다.

그리고, 견훤은 무진주(지금 광주)에서 군대를 일으켜, 완산주를 근거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892). 이리하여, 통일 신라 말기의 우리 나라는 다시 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후삼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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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형세도
후삼국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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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있으면서 후백제의 남서해 쪽을 공략하여 이름이 높았다. 한편, 궁예는 폭군이 되어 백성과 부하를 괴롭혀 인심을 잃었다. 이에, 왕건이 배현경, 신숭겸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니 이가 곧 고려의 태조로서,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정하고, 서울을 송악으로 옮겼다.

고려의 태조는 후백제를 자주 쳤지만, 신라에 대해서는 친근책을 썼다. 신라는 후백제의 침략을 받아 영토가 줄어들고 국력이 쇠약해져 나라를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순하고 말았다(935). 한편, 후백제는 한때 세력을 떨쳐 신라를 침범하고 고려를 곤궁에 몰아넣기도 하였으나, 견훤이 아들 신검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고려에 망명하고, 후백제의 신검은 태조의 정벌을 받아 멸망함으로써 후삼국은 고려에 의하여 통일되고 말았다(936).

왕권의 안정

태조는 고구려의 옛땅 회복을 목표로 삼아 북진 정책을 썼다. 이리하여,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북방 경략에 노력하였다. 또,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사상 통일을 꾀하는 한편, 풍수 지리설을 중요시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민족 융화에 힘써, 경순왕에게 태자보다 윗자리인 정승 벼슬을 주고, 경주를 식읍으로 주는 한편, 그 곳의 사심관에 임명하였다.

한편, 견훤에게는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귀순한 신라와 후백제의 귀족들을 포섭하였다.

그러나, 왕권의 안정은 아직 요원한 것이었다. 즉, 태조 때만 하더라도 지방에는 호족들이 세력을 펴고 있었고, 중앙에는 건국에 공로가 컸던 귀족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혜종 때에는 왕위 쟁탈전인 왕규의 난이 있었다. 이에, 정종은 왕권 강화에 힘써 왕규를 제거하는 등 외척의 발호를 억누르고, 거란에 대비하여 광군사를 두어 광군 30만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광종은 노비 안검법을 마련하고 과거 제도를 채택하여, 귀족 세력을 억제하는 데 노력하였고, 또 각 주, 현의 세공액을 제정하고, 관리의 공복제를 마련하였으며, 광덕, 준풍 등의 연호를 세워 자주성을 발휘하였다. 다음 경종은 전시과를 제정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다음 성종은 문물 제도를 크게 정비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다.

정치 체제의 정비

국초에는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이어받고, 여기에 당의 제도를 참작하여 과도적인 정치 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성종 때에는 당의 제도를 본떠 정치 제도를 크게 정비하였고, 다음 문종 때에 고려의 관제는 완성을 보게 되었다.

고려의 정치 체제는 중앙 집권 체제로, 그 기구를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경직과 외직으로 나누었다.

경직의 최고 기관은 3성이었는데, 그 중 내사성(후에 중서성)은 왕명의 출납, 문하성은 최고 정책의 수립과 국정의 총리, 상서성은 6부의 통솔과 정책의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국무를 분장하는 6부가 있어, 이부는 문관의 인사, 호부는 호구와 조세, 예부는 외교, 교육, 과거, 제사, 병부는 무관의 인사, 군사, 우역, 형부는 법률과 소송, 공부는 토목과 건축을 맡았다. 이 밖에, 서무를 분장하는 9시가 있었으며, 독립된 특별 관청으로 조세 출납과 회계를 맡는 삼사, 군국기무와 왕명의 출납을 맡는 중추원, 감찰과 풍속의 단속을 맡는 어사대, 3성과 중추원의 고관이 국사를 논의하는 기관으로 도병마사가 있었다.

지방 제도는 성종 때 12목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10도로 나눈 일이 있으나, 현종 때에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어, 도에는 안찰사, 계에는 병마사를 두었다. 그리고, 그 밑에 도호부, 주, 군, 현을 두고, 수령으로 도호부에 사, 주와 군에 지사, 큰 현에는 영, 작은 현에는 감무를 두었다. 이 밖에, 천민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부곡, 향, 소가 있었고, 또 3경 제도가 마련되어 처음에는 개경과 서경, 동경(지금 경주)을 말하였으나, 뒤에 동경 대신 남경(지금 서울)을 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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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양계도
5도 양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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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까지는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나, 말단 행정은 그 지방 출신인 향리에게 맡겨져, 그들은 조세와 부역의 징발, 소송의 처결 등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등 그 세력이 매우 컸다. 이에, 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기인 제도를 마련하여,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와서 머무르게 하였고, 또 중앙 고관을 출신지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임명, 감독하도록 하였다.

고려의 군사 제도는 당의 부병제를 본떠 6위를 설치하였고, 후에 2군을 더 두었는데, 이 2군 6위의 제도는 고려 군제의 기간이 되었던 것으로, 그 밑에는 1000명을 단위로 하는 영이 예속되어 있었다.

군관은 상장군, 대장군, 장군 등이 있었고,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 기관으로 중방이 있었다. 또, 지방에는 주현군이 있어 그 수가 30만에 달하였다.

귀족 정치의 동요

문종 이후, 오랜 태평 시대가 계속되었으며, 문화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종 때부터 원종 때까지 약 120년간은 귀족 사이에 분쟁이 자주 일어났고, 밖으로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귀족 정치가 크게 동요되었다. 인종 4년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는 외척으로 세력을 떨치던 인주 이씨 출신으로, 예종, 인종의 2대에 걸쳐 횡포를 부리더니, 마침내 왕위를 탐내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종은 척준경을 포섭하여 그를 제거하였다.

또, 인종 13년에는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묘청은 서경 출신의 중이며 도참가로서, 그는 동향인인 정지상, 백수한 등과 결탁하고, 풍수 지리설과 결부시켜 서경 천도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금의 정벌과 칭제, 건원을 주장하였다.

이 서경 천도 운동은 서경 임원역 터에 대화궁을 세우는 등 한때 그 실현을 보는 듯하였으나, 개경 중심의 귀족이며 유학자인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그 군대를 천견 충의군이라 하며 버티었으나, 1년 만에 김부식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평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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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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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지나친 문신 우대 정책은 무신들의 반감을 샀다. 더우기, 의종은 문학을 좋아하고 놀이로 세월을 보냈으므로, 이를 호위하던 무신들은 불평이 컸다. 이에, 대장군 정중부, 이의방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을 학살하고, 왕의 아우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 정권에 대하여 명종 3년에 김보당이 반기를 들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또 이듬해에는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대하고 군대를 일으켰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얼마 안 가서 무신 간에 세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즉, 이의방은 정중부 일파에게 피살되고,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제거되었다. 이어서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은 최충헌에게 피살됨으로써, 이로부터 최씨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와 같이 중앙에서 무신 간에 세력 쟁탈전이 거듭 일어나 사회가 동요하자, 천민들이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명종 6년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의 반란, 신종 원년에 개경에서 일어난 만적의 난 등을 비롯한 여러 반란은 거의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던 것으로, 천민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가담하였다.

무인 정치

최충헌은 무인으로서 이의민을 제거한 후, 같은 파일지라도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숙청하였고, 또 왕의 위치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는 무신 정권을 반대하던 사원 세력을 억제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천민의 난을 진압시켜, 4대 60여 년 간에 걸친 독재 정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또 무인 정권의 최고 기관으로 교정도감을 두고, 그 장관인 교정별감이 되어 백관의 인사 및 감찰, 조세의 징수 등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앞서 경대승이 설치하였던 사병 집단인 도방을 개설하여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또, 그의 아들인 최우는 최충헌의 제도를 계승하는 한편, 정방을 자기 집에 두고 백관의 인사를 처리하였으며, 삼별초를 편성하였다. 이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조직된 특수 군대였다.

최씨 정권은 몽고와 근 30년간의 항전을 계속하였으니, 그 동안 대체로 문신들은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최씨 정권은 이를 반대하였다.

마침내, 고종 45년에 문신 유경과 무신 김준 등이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정권은 몰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몽고와의 강화도 급진전되어, 그 이듬해 태자 전을 몽고에 보내어 강화를 청함으로써 휴전이 성립되었다.

원 침략 시대의 정치

몽고와는 원종 11년에 개경 환도를 단행함으로써 완전한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고는 고려 원종 12년에 국호를 원이라 고쳤으며, 그 때부터 고려를 속박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정벌을 강요하여 왔다. 이에, 고려는 병선과 식량을 전부 부담하여 여⋅원 연합군으로써 제1차로 충렬왕 즉위년에 몽고의 장수 홀돈과 고려의 장수 김방경이 합포(지금 마산)를 떠나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큐우슈우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로 끝나고, 충렬왕 7년의 제2차 정벌도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또, 원은 화주(지금 영흥)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 그 후, 고려는 원에 그 영토의 환부를 교섭하여, 자비령 이북과 제주도는 충렬왕 때에 고려에 돌아왔으나, 철령 이북의 땅은 약 100년간 원의 지배하에 있다가 공민왕 때에 와서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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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지배 시대의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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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은 감독 기관으로 정동행성을 두고, 다루가치라는 관리를 두었을 뿐 아니라, 원의 공주로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또, 왕에 관한 칭호와 관제를 격하시켜 3성을 폐합하여 첨의부라 하고, 6부를 개편하여 전리사, 판도사, 군부사, 전법사 등으로 고치고, 중추원을 밀직사,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고쳤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외환

공민왕은 즉위 후 밖으로 원을 배척하고, 안으로 정치를 어지럽히는 권세 있는 집안을 억압하기 위하여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그는 정동행성을 철폐하고,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었던 관제를 문종 때의 것으로 복구시키고, 쌍성총관부를 쳐서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고, 원의 연호 사용을 정지하는 한편, 기씨 등 친원파를 숙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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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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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자못 복잡 다난하였다. 공민왕 8년과 10년에는 홍건적이 침입하여 분탕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는데, 특히 제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복주(지금 안동)로 피난하였으나, 정세운,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또, 남으로부터는 왜구가 침입하여 그 행패가 심하였으므로, 최영, 이성계 등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였으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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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도
왜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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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세와 최무선이 금강 어귀 진포에서 화포로 왜구를 쳐부수고, 이성계는 황산에서, 정지는 관음포(지금 남해)에서 왜구를 격멸하였으며, 창왕 때에는 박위를 보내어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이렇게 그들의 기세가 꺾인 이후에는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였다.

한편, 대륙에서는 공민왕 17년에 명이 일어나고, 원은 몽고 지방으로 쫓겨나 북원을 이루었으므로, 이 두 나라에 대한 국교 관계로 우왕 때에 가서는 친명파와 친원파의 분열까지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시국에 왕비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모든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강제로 차지한 토지를 본인에게 돌려 주고, 노비를 해방시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에 돌아가고, 그 자신 영화에 도취하여 방탕 생활로 정치를 어지럽히다가 귀양 가서 죽었다.

신흥 세력의 대두와 고려의 멸망

우왕 때에는, 외교 문제로 이인임, 최영 등의 친원파와 이성계, 정몽주 등의 친명파로 갈렸는데, 친원파는 기성 귀족들이고 친명파는 신흥 귀족들이며 유학자들로서, 그 대립이 심각하였다.

마침내 우왕 14년에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지배하겠다는 것을 통고하여 왔다. 이에, 최영은 스스로 8도 도통사가 되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명의 만주 지배의 총본산인 랴오뚱 정벌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조민수를 달래어 회군을 단행한 후, 최영을 귀양 보내어 죽이고, 우왕을 내쫓은 후, 창왕을 세웠다. 이것으로, 신흥 세력이며 친명파인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성계 일파는 기성 세력을 누르고 신흥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준의 주장을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공양왕 2년에 공⋅사 토지 문서를 불사르고, 그 이듬해에 과전법의 실시를 보게 되었다.

한편, 신흥 세력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이성계의 천하가 되었다. 이에, 정몽주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건져 보려고 하다가, 선죽교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피살되었고,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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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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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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