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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시대의 사회와 문화

사회 계급

고려 시대의 사회 계급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지배층을 다시 귀족 계급과 중류 계급으로, 피지배층을 평민 계급과 천인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이 계급의 차별이 엄격하였다.

귀족 계급은 왕족과 문무 양반이 이에 속하였는데, 이들은 교양과 전통을 중하게 여겼으며, 토지의 소유, 관직의 독점, 학교 입학, 과거 응시 등 각종의 특권을 가졌었다.

중류 계급은 의술, 천문, 지리, 법률 등에 종사하는 잡직(기술관)과 하급 관리인 이속, 그리고 남반이라 불리는 궁인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귀족보다 지위가 낮고 출세도 제한되어 있었으나, 평민 앞에서는 당당한 지배층이었다.

평민 계급은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층으로, 그 중에 공장과 상인은 농민보다 천시를 받았다. 농민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 외에도 병역과 부역의 역역을 맡고, 또 특산물을 바치고 공물을 부담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은 그 사회의 기축이 되는 계층이었으나, 아무런 권리도 없이 항상 토지에만 속박되어 이주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천인 계급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지위를 차지하여 멸시를 받았다. 이에는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화척(백정), 재인(광대), 노비 및 부곡, 향, 소의 주민 등이 이에 속한다. 그 중에서 노비가 가장 천시를 받았는데, 이에는 관청에 속한 공노비와, 귀족들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회 시설

빈곤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 정책과 시설이 마련되었다. 광종 때에 구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제위보가 만들어졌으며, 또 태조 때에 흑창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성종 때에 의창으로 개편되었다. 성종은 각 주, 현에 의창을 설치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과 유사시에 대비하는 한편,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추수기에 거둬들이는 농민 구제 사업을 했다. 또, 성종 때에는 개경과 서경, 12목에 상평창을 마련하여 물가 조절의 구실을 했다.

이 밖에, 정종 때에 대비원을 개경의 동⋅서 두 곳에 설치하여 빈곤한 사람들을 치료하였으며, 예종 때에는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에게 약을 주어 치료하였다. 또, 후세의 계와 비슷한 것으로 보가 있었는데, 이 보는 쌀이나 포목 등을 원본으로 삼아, 그 이식으로써 어떠한 사회 사업을 하였다. 이에는 제위보를 비롯하여 교육 사업을 위한 학보, 팔관회 경비를 위한 팔관보, 승려 교육 사업을 위한 광학보 등이 있었다.

생활 풍속

남녀가 다 같이 흰색을 숭상하였다. 남자는 상투에 검은 건을 썼고, 부인은 머리를 오른쪽 어깨 위로 늘어뜨렸으며, 귀부인은 외출할 때에 검은 너울을 썼다.

명절로는 설, 3월 3일의 상사일, 4월 8일의 불탄절, 5월 5일의 단오, 6월 15일의 유두, 7월 15일의 백중과, 추석 등이 있었고, 특히 2월 보름(뒤에는 정월 보름)의 연등회와 11월 보름의 팔관회는 중요한 연중 행사였다, 이 중, 상사일에는 쑥으로 만든 개피떡을 먹고, 단오에는 상류층의 격구(공치기), 부녀자들의 그네, 남자들의 씨름과 석전 등이 행하여졌으며, 유두에는 동류수에서 머리를 감았다. 연등회 때에는 거리와 집집마다 휘황찬란한 등불을 달고 부처에게 공양하고, 춤과 노래를 즐기면서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빌었다.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보름, 서경에서는 10월 보름에 행하여졌는데, 행사는 연등회와 비슷하였으나, 불교적 색채는 거의 띠지 않았고 하늘과 산천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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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는 원과 접촉이 잦았으므로, 그 곳 풍속이 고려에 들어와서 궁중 및 상류 사회에 유행하였다. 즉, 왕은 고려 본명 외에 몽고 이름을 따로 가졌으며, 궁중에서는 몽고말을 궁중 용어로 사용하였다. 또, 몽고의 의복이 유행하였으며, 앞머리를 깎고 뒷머리를 땋는 몽고식의 체두변발이 행하여졌다. 그리고, 원에서 고려의 처녀를 징발하여 가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조혼 풍속이 유행하였다. 한편, 이로 인하여 고려인이 원에 들어가서 살았으므로, 그 곳에 고려의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을 고려양이라 하였다.

유학의 발달

불교가 국교로서 숭상되는 한편,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학문으로서 존중되었다. 한편, 과거의 영향도 있어 유학은 차차 융성하게 되었다. 특히, 성종 때에는 개경에 국자감을 두어 유학을 가르쳤고, 12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 1인씩을 보내어 지방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개경에 비서성, 서경에 수서원을 두었다.

유학은 문종 때에 더욱 융성하여, 개경에는 유명한 사학이 많이 세워져, 유학 교육의 성황을 이루었다. 해동 공자라 일컬어지던 대 유학자 최충이 문종 때에 벼슬을 사직하고 사숙을 세우자, 학생들이 운집하므로, 9재를 마련하여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것을 최충도 또는 문헌공도라고 하였다. 이를 모방하여 많은 유학자들이 사숙을 세웠는데, 그 중 12개가 유명하였다. 이것을 12도라고 하였으며, 교학 활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와 같이 사학이 융성함으로써 관학이 더욱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예종 때에는 국학에 7개의 전문 강좌인 7재와 일종의 육영 재단인 양현고를 마련하여, 관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궁중에 학문 연구소인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였으므로 유학이 크게 융성하였고, 김부식, 정지상 등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교육과 과거 제도

태조는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에 유의하였으며, 성종 11년에는 종전의 대학을 국자감으로 개편하였다. 국자감은 일종의 국립 종합 대학으로서, 이것에는 유학을 교육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이 있었고, 기술 분야를 교육하는 율학, 서학, 산학이 있었다. 여기에는 각각 박사와 조교를 두고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국자학에는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에는 5품 이상, 사문학에는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였으며, 율학은 법률, 서학은 글씨, 산학은 산술을 가르쳤는데, 여기에는 8품 이하의 자제와 서민이 입학하였다.

이 밖에, 개경에는 원종 때에 설치된 동⋅서 학당이 지방에는 향학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8품 이하의 자제와 서민이 입학하여 유학을 배웠다.

과거 제도는 광종 때에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에 의하여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과거에는 문관 등용 시험으로 제술업과 명경업이 있었고, 기술관 등용 시험으로는 잡업이 있었다.

제술업은 진사업이라고도 하여 시, 부, 송, 책 등 문예로, 명경업은 유교의 경전으로 시험하였는데, 그 중에 제술업이 성하였다. 잡업에는 의업, 지리업, 명법업, 명서업, 명산업 등이 있어, 각각 전문 분야로써 시험하였다. 이 밖에, 승려에게는 승계를 주기 위한 승과가 있었고, 고려 말기 공양왕 때에는 무관 등용 시험인 무과가 설치되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불교의 융성

고려의 불교는 왕실 불교로서 호국적이고 구복적인 성격을 띠고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고 사찰을 건립하는 한편, 훈요십조에서 자손에게 불교의 보호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더욱 불교가 번성하였다.

고려에서 불교 사업으로 가장 볼 만한 것은 대장경의 판각이다. 즉, 현종 때에 요의 침입이 있자, 불교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려고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문종 때에 6천여 권을 완성하였다. 또,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 때에 송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귀국할 때 많은 불경을 얻어 온 외에, 다시 요와 일본에 사람을 보내어 불경을 구해다가,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4천 7백여 권의 불경을 판각하였다. 이것을 의천의 속장경이라 하는데, 앞서 문종 때에 완성된 대장경 판본과 더불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다가, 몽고의 병화를 입어 불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몽고의 병화로 대장경 판본이 타 버리자, 불력을 빌어 몽고를 물리치려고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게 되었다. 즉, 최우는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16년이나 걸려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8만 대장경판으로, 세계적인 보물로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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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대장경 판고
8만 대장경 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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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 불교가 한 전환기를 이룬 것은 의천 때였다. 의천은 문종의 네째 아들로, 송에 갔다가 돌아와서 교관겸수, 즉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창설하였으며, 그는 또 불교 종파 통일에 노력하여 선종의 9산을 조계종으로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신라 이래의 5교 9산에 대하여, 새로 5교 양종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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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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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승려로는 의천 이외에 무인 집권 시대의 보조국사 지눌과, 고려 말의 태고화상 보우 및 나옹화상 혜근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지눌은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주장하여 조계종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또,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숭상되고, 왕자와 귀족들이 많이 출가함으로써 승려의 지위가 높았다. 특히, 유명한 승려를 국사와 왕사로 하여 국가와 왕실의 고문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려에게 법계를 주기 위하여 승과라는 국가 시험을 마련하였으며, 사원의 토지는 면세되었고, 승려에게는 각종 역역이 면제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융성하고 승려의 지위가 높아지자, 그에 따라 폐단도 컸다. 즉, 사원은 광대한 토지를 영유해 국가 조세 수입을 감소시켰고, 또 평민들은 국가의 역을 피하기 위해 입산하는 일이 많았다. 또, 사원은 장생고를 두어 고리대업을 했고, 상업, 양조 등 영리 사업을 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다.

풍수 지리설

신라 말에 도선이 당에서 배워 온 풍수 지리설에다 내용을 가미한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민간 신앙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사상은, 산수에는 좋은 곳과 나쁜 곳이 있어, 좋은 곳을 택하여 집을 짓거나 산소를 쓰면 국가나 개인에게 행운이 온다는 것이다.

이런 데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이를 중요시하여,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이 사상의 중요성을 자손에게 유언으로 훈계하였고, 후세 왕들도 이 사상에 의하여 이궁을 경영하였다. 또 고려에 3경을 둔 것이나, 숙종 때에 김위제의 건의로 남경(지금 서울)을 설치한 것이나, 인종 때에 묘청이 서경에 천도하면 36개국이 조공하여 온다고 주장한 것 등은 모두 풍수 지리설과 관계가 깊은 것이었다.

인쇄술과 과학

고려는 송의 영향을 받아 목판 인쇄가 발달하여, 경서, 역사, 대장경 등이 인쇄 출판되었고, 숙종 때에는 국자감 안에 서적포를 두고 서적을 인쇄 출판하였다. 그러나, 고려 인쇄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금속 활자의 발명이었다. 고종 21년(1234) 최윤의가 지은 상정고금예문 50권을 주자(금속 활자)로 인쇄하였다.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가 금속 활자를 발명한 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그 후, 공양왕 때에는 서적원을 두어 주자로 서적을 인쇄 출판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의 과학에서 볼 만한 것은 화약의 제조였다. 이 화약은 송과 원에서도 사용되었으나, 젯법은 비밀에 붙였었다. 그러나, 우왕 때 최무선이 화약 젯법을 알게 되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기를 만들었다.

주자학의 전래

충렬왕 이후, 원과 자주 접촉을 가지면서 그 곳의 문화가 수입되어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즉, 주자학이 새로 전래하여 학문계에 새기운을 이루게 하였으며, 또 원을 통하여 서역의 천문, 수학, 의학 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공민왕 때에는 문익점이 원에 갔다가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정천익에게 주어 재배에 성공하였고, 또 정천익은 씨아와 물레를 만들었다.

주자학은 송의 주자(주희)에 의하여 철학화된 유학으로, 이를 성리학 또는 송학이라고도 한다. 이 학문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충렬왕 때 안향이 원으로부터 배워 온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충선왕 때에는 백이정이 원에 가서 주자학 책을 가져왔고, 충숙왕 때에 이제현은 충선왕이 원나라 서울에 세운 만권당에서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주자학이 퍼지게 되고, 고려 말에는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등 유명한 주자학자가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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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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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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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주자학이 발달하게 되면서, 주자학자들 사이에는 승려들의 타락을 비난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교와 불교의 대립을 보게 되었다.

문학과 사학

고려의 문학은 아직 국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문학이 중심이 되었고, 유학의 발달과 더불어 과거에 문예가 중요시된 데서 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무신 집권 시대에는 문인들이 현실을 도피하려는 경향이 생김에 따라 패관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이 때의 작품으로는 문종 때 박인량의 수이전과 이인로의 파한집, 이규보의 백운소설,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이 있다. 그리고, 문집으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제현의 익재집, 이곡의 가정집,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등이 전한다.

국문학으로는 고려 중엽 이후에 신라 향가의 변형에서 발달한 시조와 장가인 가사가 유행하였다. 가사로는 정서의 정과정곡, 고종 때의 한림별곡, 안축의 관동별곡, 그리고 서경별곡, 청산별곡 등이 전한다.

역사로는 춘추관을 두고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했으나, 지금은 한 권도 전하지 않는다. 지금 전하는 역사 저술로는 인종 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충렬왕 때 중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 있고, 이 밖에 충렬왕 때 이승휴의 제왕운기, 문종 때 중 혁련정의 균여전, 고종 때 중 각훈의 해동고승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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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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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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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엮어져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기사가 최초로 취급되어 있어, 이 두 역사책은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 오늘날 전하지 않는 것으로 김관의의 편년통록, 정가신의 천추금경록, 민지의 세대편년절요와 본조편년강목, 이제현의 세대편년 등이 있었다.

예술

고려 시대에는 호화스러운 귀족 생활과 불교의 융성, 그리고 송의 영향을 받아 예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건축에는 궁궐과 사찰 등 훌륭한 걸작품이 많았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그리고 덕산 수덕사의 대웅전, 안변 석왕사의 응진전, 강릉의 객사문 등이 있다.

그 중에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로서, 둥근 기둥의 중간 배가 부른 것 등 고려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석조 건축으로는 탑파가 남아 있는데, 현화사의 7층 석탑, 월정사의 팔각 9층 석탑, 라마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경천사지 10층 석탑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걸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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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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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10층 석탑
경천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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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 안의 목조 아미타여래상이 그 때의 아름다운 솜씨를 보여 주고 있으며, 석불로는 거대하기로 유명한 은진 관촉사의 미륵상이 있으나 예술적 가치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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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아미타여래상
부석사 아미타여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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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미륵불
관촉사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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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예 미술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은 자기이다. 고려자기는 송의 영향을 받고, 다시 고려인의 독창력을 발휘하여 송을 능가하는 우수한 작품을 냈다. 자기에는 청자, 백자, 녹자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청자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예술품이다.

특히 비색청자는 아름답고 정교한 절품이고, 상감청자는 당초, 모란, 운학 등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는 고려 독창적인 작품이다. 이 청자는 섬세하고 연약한 미를 지니어 귀족적인 기풍을 풍기고 있다. 가장 우수한 작품은 귀족들의 사치 생활이 절정에 달했던 예종, 인종, 의종 때에 만든 것들이다. 글씨에는 문종 때의 유신, 인종 때의 중 탄연, 최우가 유명하여, 신라의 김생과 더불어 신품 사현이라 불리고 있다. 이 밖에, 숙종 때의 홍관, 충선왕 때의 이암이 유명하였다. 글씨체로는 대체로 당의 구양순체가 유행하였는데, 이암이 원으로부터 조맹부의 송설체를 전래한 후에는 이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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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연의 글씨
탄연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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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나라에서 도화원을 두고 화원을 양성하였으며, 더우기 송, 원의 영향을 받아 매우 발달하였다. 화가로는 인종 때의 이영이 송에 가서 예성강도를 그려 휘종의 칭찬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이광필도 명종의 애호를 받았고, 공민왕도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고려의 그림으로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와 벽화로서 부석사 조사당의 천왕상, 수덕사 대웅전의 수화도 등이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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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벽화
수덕사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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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우리 고유의 향악과 중국의 속악인 당악, 그리고 예종 때에 송으로부터 수입한 대성악(아악)의 세 종류가 있었으며, 음악과 함께 발달한 가면극으로 처용무와 산대잡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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