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2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2차
  • Ⅲ. 고려 시대의 생활
  • 4. 고려 시대의 대외 관계

4. 고려 시대의 대외 관계

고려는 북진 정책을 썼으므로 북방 민족과 충돌이 잦았고, 송과는 비교적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과는 원의 강요로 뜻에 없는 정벌을 2차나 하였고,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찾아 평화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요와의 관계

거란은 916년에 건국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몽고 지방의 주인공이 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국호를 요라고 고쳤다. 고려는 요와 국초 때부터 대립을 하여 왔으나, 요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는 국교를 끊고, 정종 때에는 광군을 조직하여 북진 정책을 세우고 그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 간의 긴장된 국교 관계의 결과, 제1차로 성종 12년에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그들이 침입한 목적은 고려로 하여금 송과의 접촉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서희는 소손녕과 요와 통교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담판을 짓고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한편, 서희는 그 이듬해부터 교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청천강 이북의 여진을 정벌하고, 강동 6주를 개척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려는 요와 국교를 텄지만 송과도 친교를 계속하였으므로, 때마침 강조의 정변이 있자, 요의 성종은 이것을 구실삼아 제2차로 현종 원년에 재침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맞아 흥화진(지금 의주)에서 양규가, 통주(지금 선천)에서 강조가 크게 싸웠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리하여, 현종은 볼모로 하공진을 요 성종에게 보내어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요를 물러가게 하였다.

확대보기
강동 6주
강동 6주
팝업창 닫기

그 후, 고려는 친조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요는 강동 6주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도 응하지 않았으므로, 제3차로 현종 9년에 소배압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러나, 귀주(지금 구성)에서 강감찬에게 거의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오랜 싸움은 피차간에 손실만 컸으므로, 고려는 송과의 친교 관계를 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으로써 요도 고려 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요구를 포기하게 되어, 양국 간의 국교는 회복되었다.

요와의 전쟁에서 성의 필요를 느껴, 현종 때에 왕 가도로 하여금 개경의 나성을 쌓게 하였다. 또,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덕종 때에 유소로 하여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함경 남도 정평 해안인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정종 때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요와의 전쟁으로 많은 문화재가 불타 버렸으므로, 현종 때에 김심언 등으로 하여금 태조로부터 목종까지 7대 사이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전쟁을 계기로 대장경이 판각되었다.

여진과의 관계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후 여러 부족으로 갈리어 만주 일대와 압록강 상류에서부터 함경도 함흥 평야에 걸쳐 살면서, 고려를 상국으로 섬기고 사절을 보내며, 토산물을 바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1세기 초 고려 선종 때에 하얼삔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완옌부에서 추장 영가와 그의 아들 우야소가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숙종 때에는 그의 세력이 함흥 지방에까지 미쳐 고려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별무반을 조직하여 예종 2년에 윤관으로 하여금 함흥 평야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침입이 계속 잦았고 돌려 줄 것을 애원하므로, 예종 4년에 이를 그들에게 돌려 주었다.

확대보기
동북 9성 설치도
동북 9성 설치도
팝업창 닫기

그 후, 예종 10년(1115)에는 우야소의 아우 아구다가 국호를 금이라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남쪽으로 쫓아 중국의 북부를 차지하면서,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다가 인종 4년에 이자겸의 주장으로 이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송과의 관계

중국에는 당이 멸망한 뒤 오대라는 분열 시기가 계속되다가, 고려 광종 11년(960)에 송이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고려에서는 바로 송과 국교를 맺고 그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다. 한편, 송은 북쪽의 요, 그리고 금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와 친교를 맺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피차간에 사신과 상인의 왕래가 잦았고, 고려에서는 유학생, 유학승을 파견하였으며, 한편 송인으로 고려에 귀화하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현종 때에 요와 강화를 맺고 나서는 공식적인 외교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문종 때에 다시 열리게 되었다.

원과의 관계

1206년에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되어 세력을 크게 떨치던 몽고는 금을 멸망시킴으로써 고려와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때마침, 고종 4년에 몽고에게 만주로부터 내몰린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김취려 등으로 하여금 이를 치게 하였으나, 이 때에 뜻밖에도 몽고군이 와서 우리를 도우므로, 이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시키고, 또 그들 포로에게는 토지를 주어 나라 안에 살게 하였는데, 이들의 거주지를 거란장이라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몽고는 매년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여 와서 고려를 크게 괴롭혔다. 그러다가 고종 12년에 몽고 사신 저고여가 귀로에 살해되자, 국교가 단절되고, 고종 18년에는 살리타이가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이에, 귀주에서 박서가 분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살리타이에게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최우는 반대론을 물리치고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에, 살리타이는 재차 침입하였으나, 처인성(지금 용인)에서 김윤후에게 사살되었다. 그러나, 이후 몽고는 고종 46년까지 전후 6차에 걸쳐 고려를 침범하였다.

몽고와의 강화는 원종 11년에 성립되었다. 그러나, 굴욕적인 강화는 무인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하였다. 즉, 최씨 정권을 타도한 무신 김준, 임연 등이 반대하였고, 원종 11년에는 개경 환도에 반발하여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삼별초를 지휘하여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그 후 진도, 탐라로 옮기면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4년 만에 여⋅원 연합군에게 평정되고 말았다. 이 삼별초의 난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나, 고려 무인의 왕성한 자주 정신을 유감 없이 발휘한 것이다. 몽고는 고려 원종 12년에 국호를 원이라 고치고, 고려 말기 공민왕 때까지 고려를 속박하게 되었다.

확대보기
몽고의 침입과 삼별초의 항쟁
몽고의 침입과 삼별초의 항쟁
팝업창 닫기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그리고, 경주 황룡사의 9층탑과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판 등 많은 문화재가 불타 버린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일본과의 관계

고려 시대에는 일본과의 공식적인 접촉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상인들이 자주 내왕하면서 교역을 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때에 원의 강요로 두 번이나 일본을 정벌하게 된 후부터는 왜구가 자주 침입함으로써 복잡한 문제를 자아내었다.

왜구란 일본 큐우슈우, 시코쿠의 해안 지대에 거처하던 해적들로서, 이들은 가끔 우리 나라와 중국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그런데,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그들의 침입이 더욱 빈번하여 그로부터 받는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이성계, 최영 등이 이들을 격멸하였고, 창왕 때에는 박위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한편, 왜구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왕 때에 나흥유, 정몽주 등을 일본에 보내어 교섭하게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 연구 과제 ▦

1. 고려 시대의 우리 나라 변경의 개척을 지도로 작성하여 보자.

2. 고려 시대 우리 민족과 이민족과의 교섭을 도표로 나타내 보자.

3.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변천과 사회 생활의 변화를 관련지어 가며 연구하여 보자.

4. 원의 침입이 우리 나라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하여 토론하여 보자.

5. 고려 문화의 특색을 그 성장과 관련지어 연구하여 보자.

6.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과정을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살펴 보자.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