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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 조직과 정치의 혼란

유교적 사회의 구성

태조가 억불 숭유 정책을 내세운 후, 역대 국왕의 꾸준한 불교 억압과 유학 장려에 따라 유⋅불교의 교체가 진행되었다.

조선의 사회는 유교적 성격이 강한 양반 중심의 신분 계급 사회였는데, 사회의 상층을 이루는 것은 양반 계급이었다. 그들은 치자 계급이었고, 지식 계급, 특권 계급이었다. 중인 계급은 양반 다음 가는 계급으로, 그 전통이나 지식은 양반에 못지 않았으나, 직업이 기술 관직이라 하급 관료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대체적으로 그 직업을 세습하였다.

국민 대다수는 상민 계급으로서, 농업이나 그 밖의 직업에 종사하였다. 생산을 담당하던 상민들은 조세, 부역, 군역, 공납 등 각종 의무를 지녔었다.

사회의 최하 계급은 천민 계급이었다. 그들은 인격이 전혀 무시되었으며, 공사의 노비가 대부분이었다. 이 밖에, 광대, 무당, 사당, 창기, 백정 등이 있었는데, 특히 백정은 도살, 제혁, 유기장 등의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따로 부락을 이루고 살았었다.

양반 사회의 분열

엄격한 신분제, 문무의 차별, 편협한 지방색, 적서의 구별, 직업의 세습 등 양반 사회가 내포하는 모순은 성종 이후 허다히 벌어진 사회 혼란의 배경이었다. 집권적 관료 체제의 국가였으니만큼 모든 양반은 특권을 누리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는 고급 관료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한정된 관직을 얻으려는 싸움은 주자학의 대의 명분론으로 꾸며지게 되어 사화, 당쟁으로 악화되었다. 양반 사회의 분열은 먼저 유학계에서부터 벌어졌다. 국초 길재의 뒤를 이어 야에 묻히어 학문에 힘쓰는 학자들을 사학파라 하였으며, 반대로 조선 왕조 개창에 적극 협력하여 정권에 참여한 집권 세력을 관학파라 하였는데, 양 파의 대립은 향토성, 사상, 정치 이념이 얽혀 점차로 심각성을 띠게 되었다. 학계의 대립은 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관학파는 다시 훈구파, 절의파, 청담파로 갈리었으며, 훈구파만이 계속 관계에 남아 정권을 잡았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 그의 숭문 정치에 의하여 많은 사학파(사림파)의 학자가 정계로 진출하자, 이들은 조정에서 신진 세력을 형성하고, 기성 세력인 훈구파를 배격하였으며, 농장의 확대에 따르는 토지 분배의 불공평을 비판하여 그 개혁을 주장하자, 양 파 사이의 대립은 날카롭게 되었다.

이리하여, 귀족들 상호간에 정권 쟁탈전이 벌어져, 연산군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동안에 네 번이나 사화의 참극을 빚어 냈다.

사화와 유림의 동향

조선 사회가 내포한 사회 모순에서 발생한 신구 사류의 대립은 성종 이후 정권 쟁탈전을 유발하여 마침내 사화가 거듭 일어나게 되었다. 연산군 4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문제로 무오사화가 일어났으며, 10년에는 폐비 윤씨 문제로 갑자사화가 벌어져 사류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연산군의 실정은 마침내 중종 반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중종의 신임을 받고 도학 정치를 폈던 조광조의 개혁 운동에 반발하는 세력의 공세로 중종 14년에 기묘사화가 벌어졌으며, 그 후 명종 원년에는 외척 간의 세력 투쟁으로 을사사화가 있었다.

여러 차례의 사화에 타격을 받은 사류들은 벼슬을 등지고 시골로 내려가 선유의 옛터에 서원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사원은 주세붕이 안향의 고향에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이 시초로서, 그 후 많은 선비들이 이를 본받아 각처에 서원을 세우니, 선조 때에는 백 수십 개를 헤아리게 되었고, 사액을 받은 것만 하더라도 20여 개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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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서원
도산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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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처음 선현을 봉사하고 지방 유생을 위한 강학의 장소로 후진 양성에만 힘썼으므로, 유명한 유학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유학은 정치와 동떨어진 사색적, 이론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절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더욱 파고들어 우주의 본체와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데 힘썼다. 주자가 만물을 낳는 원동력을 ‘이’, 만물을 낳는 재료를 ‘기’라 하여 이기 이원론을 주장한 데 대하여, 서경덕은 ‘이’와 ‘기’는 원래 하나로서 도리어 만물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여 이기 일원론을 주장하였고, 이언적은 이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이황은 주자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고, 이이는 서경덕의 학설에 자기의 독특한 학설을 보태어 일원적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주자학은 이황, 이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이 후, 이황은 영남 학파의 스승이 되고, 이이는 기호 학파의 스승이 되었다.

당쟁으로 인한 정계의 혼란

선조 때에 지방 유생들이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확고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부터 사화는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선조 이후의 당쟁은 정계와 학계를 주름잡게 된 사림 내부의 정권 투쟁이었다. 그들은 지방에 농장이라는 경제적 지반과 서원이라는 배후 세력을 가졌으며, 족보와 그리고 통혼을 통하여 얽혀진 강력한 족당이었다. 정권 탈취와 그 영속을 위한 당쟁은 뿌리가 깊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당쟁은 선조 8년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보수와 신진의 대립인 동서 분당에서 비롯되었다. 정권을 잡은 동인이 다시 남⋅북으로 분립되었으며, 이후 정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당쟁은 피를 뿜는 항쟁과 분열로 확대되어 국가와 사회를 좀먹었다.

왜란⋅호란의 국난 후에도 당쟁은 더욱 악화되었다. 주자학의 대의 명분론과 유교적 예속 생활이 결부되어 예론이 당쟁에 악용됨으로써 현⋅숙종 때에는 당쟁이 거듭 일어나 국정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이른바 사색 당쟁은 국난의 위협을 주게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에, 영⋅정조 양 대에 걸쳐 탕평책이 나오게 됨으로써 당쟁은 고개를 숙인 듯했으나,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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