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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화와 보수의 갈등

개화 운동의 진전

문호 개방 후 여러 면에서 근대화의 태동이 감돌게 되었다. 먼저 자강을 목적으로 정부 기구의 정비를 서둘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군국 기무를 총괄하게 하고, 그 밑에 정무 분장 기관인 12사를 두었다.

한편, 외국 문물 제도의 시찰을 위한 신사 유람단의 일본 파견, 기술 수습생의 청국 파견이 있었고, 이들 인사들이 내왕하는 가운데 근대 문명에 대한 식견이 점차 넓어졌다. 또, 군대의 현대화를 위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으며, 종래의 군인들을 2영으로 감축하였다.

한편 이 무렵, 일본을 통하여 도입된 지구전도, 만국공법, 중서관계론, 보법전기, 박물신편 등의 서적이 유포되어 개화열을 크게 자극하였다.

개화와 수구의 대립

개국과 개화의 물결에 대한 수구 세력의 반발도 컸으니, 전통적 사회관에 입각하여 척사 위정, 쇄국 양이를 내세우던 수구 세력은 개국 그 자체도 반대하였지만, 개국 후의 개화 운동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여 상소 운동을 일으켰는데, 1881년에 일어난 만인소 등은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 상소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감에 따라 정계는 더욱 혼란해졌다.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따라 개화와 수구의 대립은 민비와 대원군, 일본과 청국의 경쟁과 얽혀, 국가의 전도는 혼미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임오군란

개화와 수구의 대립 투쟁은 마침내 1882년 임오군란으로 폭발되었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생겨난 신식 군대인 별기군 우대에서 불평이 컸던 구식 군인들은 봉량미 지급 문제를 가지고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 틈에 수구 세력은 대원군을 추대하고 궁중에 들어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한 다음, 일련의 보수 정책을 단행하여 국정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여 충주로 피신한 민비는 그 일파와 내통하여 청국군의 원조를 요청하자, 청국은 자기 세력 부식 확장의 좋은 기회라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본국으로 납치하고 다시금 민씨 정권을 회복시켰다. 이후로 민씨 정권은 친청 경향에 흘러, 이에 따라 개국열은 차차 둔화되었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일시 후퇴를 강요당하였던 일본은 강경한 태도로 사후 처리를 요구하게 되니, 이에 제물포 조약의 체결을 보게 되었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후 청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사대 경향에 대하여 반청 독립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한 소장 세력은, 사대 세력으로 전락된 민씨 일파의 수구 세력에 대하여 개화와 독립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근대 의식에 눈떴던 개화당은 일본의 후원하에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개화당을 후원하고 나선 것은 임오군란으로 타격을 받은 일본 세력의 재흥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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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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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였으나, 강력한 청국군의 반격으로 패퇴하게 되었다. 이것이 갑신정변으로서, 비록 외세를 배경한 거사였으나,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라 할 독립 개화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사대당 정부의 친청 경향을 더욱 굳혀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일본은 이 정변으로 입었던 피해의 보상을 내세워 한성 조약의 체결을 보았다.

청⋅일의 협상

일본의 조선 침투 세력은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차차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국내에는 배일 감정이 고조되어 가는 데 반하여, 청국 세력은 날로 뻗었으며, 청⋅일 양국은 조선을 문제로 무력 충돌 위기마저 감돌게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 문제에 대한 청국과의 동등권을 확보하고자 나선 이토오 히로부미는, 청국 리훙장과 협상하여 톈진 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에서의 동시 철병, 조선 군사 훈련 교관의 불파견, 군대 출동 필요시의 사전 통고를 내포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 문제에 있어 청국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의 진출

연해주를 지배하에 넣고 극동 침략의 근거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을 건설하여 부동항 정책, 남침 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러시아는, 청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우리 나라의 반청 경향이 나타남을 틈타 묄렌도르프를 보내어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내용의 조⋅러 밀약을 추진하였으나, 김윤식의 공작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88년 육로 통상 조약을 성립시켜 조선 침투의 길을 텄다. 러시아의 진출과 조선의 친러 경향에 당황한 청국은 급히 대원군을 귀국시켜 외교 고문을 미국인 데니(Denny)로 대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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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세력의 남하
러시아 세력의 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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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사건

청국만이 러시아의 남침 정책에 대항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정책의 대립으로 러시아에 대항해 오던 영국도 함대를 동원하여 1885년 대한 해협의 요지인 거문도를 점령하여 극동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남침을 꺾고자 하였다. 이 거문도 사건은 약소 국가의 희생을 강요하던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사의 한 국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2년 만에 청국의 절충으로 영국 함대는 물러갔으나, 조선 문제는 세계 열강의 각축 속에 휘말려들게 되어 세계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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