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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외세의 각축과 자주 독립 운동

4. 외세의 각축과 자주 독립 운동

청⋅일 전쟁의 영향

동학 혁명 운동은 날카로운 대립을 보여 오던 청⋅일의 열전을 초래하였다.

임오군란 후 정치적으로 후퇴를 면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청국에 밀려 초조하였다. 더우기 자국의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하여 조선은 극히 필요한 존재였다. 이 때, 청국이 조선에 출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내세워 많은 군사를 출동시킴으로써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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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양국 상인 수입액 백분비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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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과 그 이듬해에 걸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은 시모노셰키 조약에 의하여 조선 침략의 경쟁자인 청국을 탈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랴오뚱 반도와 타이완을 획득하여 대륙 침략의 기반을 얻게 되었다.

을미사변의 혼란

청⋅일 전쟁에 의한 일본의 급작스러운 득세는 극동 지배의 야망을 가진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유인하여, 동양 평화의 위협이라 하여 랴오뚱 반도를 청국에 돌려 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와 같은 삼국의 간섭에 일본은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일 전쟁 후 가중되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염증을 느껴 오던 우리 정계에서는 삼국 간섭을 계기로 친러 경향이 태동되더니, 마침내 친러 정부의 수립을 보았다. 초조해진 일본은 비상 수단에 의하여 자기 세력을 회복하고자 본국으로부터 불령 일인을 불러들여 왕궁을 급습하여, 무도하게도 민비를 학살하고 친일 정객을 내세워 정권을 탈취하였다. 친일 정부는 대의 명분을 위하여 갑오경장의 계승을 내걸고 군제의 개혁, 태양력의 채택, 종두법의 실시, 연호의 건립과 함께 단발령을 선포하여 국민에게 단발을 강요하였다.

의병 운동과 아관 파천

을미사변 때의 일본의 불의와 친일 신정부의 급격한 개혁과 단발령의 강요는 국민의 반일 감정을 돋우게 되어, 마침내 무기를 들고 나서는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이소응, 이춘영, 유인석, 김복한, 허위, 기우만 등의 활약은 컸다. 한편, 을미사변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친러파는 어수선한 국내 사정을 틈타 국왕을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모셨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다시 친러 정권이 수립되고 그 후 1년간 국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물러 있게 되니, 나라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따라서, 각종 잇권이 러시아에 넘어감으로써 열강의 경제욕을 자극하는 바 되어, 이에 각국은 기회 균등을 주장하여 우리 나라로부터 각종 잇권을 탈취하게 되었다.

독립 협회의 활동

열강의 손에 국정이 우롱되며, 위정자의 주견 없는 행동으로 국가 운명이 이지러지려는 때에, 자주 독립, 개화 문명을 지향하는 구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갑신정변 뒤 미국에 건너갔던 서재필은 자유 사회와 근대 문명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후, 자주 독립의 기치를 들고 민족 계몽을 위하여 독립 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하여 1896년 독립 협회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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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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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협회는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설하고, 독립관에서는 정치 집회를 자주 가졌으며, 종래의 개화주의자와 달리 서재필, 남궁억,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젊은 지식인들이 자주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광범한 영향을 각 층에 미친 근대적 구국 운동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만민 공동회의 개최

독립 협회는 정부에게 외국에 대한 의존책을 청산하도록 요구하였으며, 보다 광범한 자주, 민권, 자유 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만민 공동회를 주최하여 6개조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그 실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보부상들의 조직인 황국 협회를 동원하여 독립 협회를 탄압하더니, 마침내 독립 협회를 해산시켰다.

성숙되어 가던 자주 독립과 대의 정치의 태동은 무참하게 꺾였으나, 그 자주 정신은 그 후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져 빛을 남겼다.

대한 제국의 수립

자주 독립, 국왕 환궁의 소리가 높은 가운데, 아관 체류 1년 만에 국왕은 경운궁(지금 덕수궁)으로 환어하였다. 국왕도 국민의 소리에 호응하여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1897년 원구단에서 대한국제 9조를 서고하여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광무라는 연호를 세웠다. 또, 관제를 개혁하고 13도제를 실시하였으며, 신 교육령을 펴,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 제국의 장래는 구정객의 정권욕과 열강의 간섭으로 인하여, 민중의 자주 독립 정신을 정상적으로 살리지 못하고 다시 악순환의 길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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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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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의 영향

삼국 간섭 이후 극동 정책의 대립으로 우리 나라와 만주를 두고 각축전을 벌여 오던 러⋅일 양국은, 전쟁에 의하지 않고 그들의 야욕을 펴고자 1896년, 1902년 양차에 걸쳐 세력권 조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1904년 전단을 열었다. 1902년 영⋅일 동맹을 맺었던 일본은 영국의 후원하에 남만주를 점령하고 러시아 함대를 대한 해협에서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은 국력을 다하였고 러시아는 내정 악화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으므로, 미국의 중재로 포오츠머드 조약을 맺어 종전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랴오뚱 반도와 사할린 남반부를 영유하게 되었으며, 한국 침략 경쟁에서 러시아를 축출하고 독점적 지위에 올라섬으로써 극동 침략의 주도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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