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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침략 정치

일제의 무단 정치

한국 병탄이란 큰 야망을 달성한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사와 내정을 장악하는 총독을 임명하여 한반도를 통치하도록 하였다.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강압적이고도 야만적인 무단 정치를 하였으며, 4만의 헌병과 헌병 보조원을 수족으로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무력으로 한국민을 다스리도록 하였고, 심지어는 관리나 교원에게까지 제복과 칼을 차게 하여 조소를 샀다.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애국 인사를 투옥하고, 모든 정치적 결사와 집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글로 발행되던 신문을 폐간하여 여론 창도의 길을 막고, 우리의 이목을 가리었다. 악명 높은 무단 정치는, 1919년 무력에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거족적이고 평화적인 기미 독립 운동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 조사 사업과 농민의 몰락

한국인으로부터 농토를 수탈하는 동시에 식민지 통치의 재정 조달을 위한 조세 제도 확립의 기초 작업으로 1912년부터 7년간에 걸쳐 토지 조사를 하였다.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의 개편을 내세운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이 때까지 토지 소유 관념이 뚜렷하지 못하였던 실정과 관을 상대로 하는 법 생활의 미숙 및 일본인에 대한 반감으로 소정의 신고를 소홀히 함으로써 우리 농민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민전과 문중 전답, 종중 산림, 공해전, 궁원전, 역전, 둔전 등의 공전이 총독부 소유로 된 것이다. 전국 농토와 임야의 약 4할이 총독부의 손에 들어가자, 총독부는 이것을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위시한 일본인 토지 회사와 이주 일인 농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여 주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현실적 토지 점유자이며 경작자이던 농민층이 소작농으로 몰락하였으므로, 소수의 양반 관료와 친일파들이 지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반봉건적 소작 관계에 얽매이게 되었다. 한편, 막대한 농토가 일인 수중에 들어가자 자연적으로 우리 농민의 농가당 평균 경작 면적이 감소되어,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운 영세농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곤궁하여 농산물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농토를 등지고 이농하는 자가 격증 일로였으며, 화전민이 늘어났고, 삶의 터를 찾아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비극이 잇달아 일어났다.

농민의 소작농화 경향
평균 연차 소작 농가 홋수 전 농가에 대한 비율
1913~17 1,008,000호 39.4 %
1918~22 1,098,000 40.6 %
1923~27 1,172,000 44.7 %
1928~32 1,136,000 50.2 %
1933~37 1,577,000 55.2 %
한국 경제사 개설 : 최 호진 저

문화 정치의 진상

1919년의 기미 독립 운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무력에 의한 위협으로 우리 민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던 통치 방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일제는 일시적 방편으로 우리 민족을 회유하고자 이른바 문화 정치를 내세웠다.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일반 경찰제를 취하였으며,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대검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한글로 된 몇 가지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고, 소수 인사를 말단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고 감옥은 넓혀졌으며, 신문에 대해서는 엄중한 검열을 실시하였다.

관리의 등용에 있어서도 일본인 관리와 심한 차별 대우를 하였으며, 이를 오히려 민족 이간에 이용하였다. 문화 정치란 하나의 구실이었으며, 오히려 경제 수탈은 강화되었다.

경제 지배의 준비 공작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경제 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제1기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이다. 이 때에는 식민지 경제 착취의 기초 작업이 수행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과 아울러 1904년부터 화폐 정리가 단행되어 근대적 화폐제의 확립을 보았고, 중앙 은행으로는 조선 은행이 설립되고, 식산 은행으로는 농⋅공 은행이 설립되어 금융 자본의 독점 조직이 이루어졌다. 한편, 경제 착취의 신경이 될 교통, 운수, 통신의 확충이 수행되어 1914년까지는 전국의 간선 철도가 완성되었고, 일본과의 해저 전신, 각 도시 간의 통신망이 정비되었다. 1912년에는 우선 회사가 창립되어 해운 활동을 펴게 되었다. 급증하는 총독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각종 세목이 생겨났고, 징세 사무가 강화되었으며, 인삼, 담배, 소금 등의 전매 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경제 착취의 수족이 될 일본인의 이민이 성행하였음은 물론이다.

농업 수탈의 강화

경제 수탈의 제2기는 1919년부터 1929년까지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급속하게 자라난 일본의 자본주의가 그 발전의 경제적 기반을 우리땅에서 찾으려던 때였다. 즉, 상⋅공 증가에 따른 농촌의 피폐로 식량을 얻고, 각종 제조 공업의 원료를 우리 땅에서 구하고, 생산품을 손쉽고 값싸게 소비시킬 수 있는 소비 시장 조성을 목적한 때였다.

일본은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1926년부터는 제2차 계획이 착수되었다. 이에 따른 산미 증산 활동으로 미곡 생산량이 증가하였으나, 농업 형태는 벼농사 중심의 단작형 농업으로 바뀌어 자립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 증산을 위한 수세, 비료대, 운반비 등의 격증으로 오히려 농촌 경제는 악화되었다. 생산된 미곡은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그 양은 해마다 증가하였으며, 그 대신 만주에서 잡곡을 반입하였다. 원료 공급책으로 면화 재배와 양잠을 장려하였고, 그 생산품은 공판 제도에 의하여 수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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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미곡 반출로 붐비는 군산항
대일 미곡 반출로 붐비는 군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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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생산고와 대일 반출량(생산량 대 반출량)
연도 생산량 반출량
1920 1,270만 석 185만 석
1922 1,432  〃 340  〃
1924 1,517  〃 475  〃
1926 1,497  〃 544  〃
1928 1,730  〃 742  〃
1930 1,370  〃 540  〃
1932 1,590  〃 760  〃
1934 1,630  〃 870  〃
한국 경제사 개설 : 최호진 저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화

1931년 불법적인 만주 사변으로 만주를 지배하게 된 일본은 보다 적극적인 대륙 침략을 펴게 되었다. 군부 독재를 확립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후급속히 자란 일본 자본주의의 잉여 자본을 동원하여 보다 유리한 해외 투자지로서 대한 반도를 지목하고,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1930년 이후의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농⋅공 병진의 산업 활동을 폈다. 이리하여, 종래의 식량 증산과 더불어 근대 공업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지하 자원의 개발이 활발해졌다.

대일본 수출입 비율
     연도
품명
수출 수입
1921 1935 1921 1935
식료품 69.9% 59.7% 9.9% 12.5%
원료 13.4% 16.5% 4.8% 10.4%
원료제품 12.3% 17.2% 9.2% 14.1%
완제품 2.7% 5.1% 75.6% 61.6%
기타 1.7% 1.5% 0.5% 1.4%
100% 100% 100% 100%
한국 경제사 개설 : 최호진 저

공업화 경향은 1937년의 중⋅일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강화되어, 전 생산액에 대한 공업 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 갔다. 그러나, 모든 공업 시설은 일본 전체를 한 단위로 한 일부여서 자립성이 없었고, 또한 중공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며, 거의 다 일본 대재벌에 의하여 독점된 것으로, 우리 겨레에게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부담만이 늘어 갔을 따름이었다.

산업별 생산액 비율의 변천
  1925 1931 1936
농산물 72.7% 63.1% 51.8%
임산물 3.2% 5.3% 5.1%
수산물 5.1% 6.9% 7.0%
광산물 1.3% 2.0% 4.8%
공산물 17.7% 22.7% 33.1%
합계 100 100% 100%
한국 경제사 개설 : 최호진 저

지하 자원 개발에 있어서는 전쟁 물자 도입의 대외 지불 수단의 보충을 위한 금광의 개발과 연료 확보를 위한 탄광 개발에 광분하였다. 그러나, 1941년 미⋅일 전쟁의 시작에 따라 전략 물자인 철, 석탄, 텅스텐, 흑연, 마그네사이트, 몰리브덴 등 광산물의 수탈량이 급증하였다.

중요 광산물 산출량 (단위: 톤)
  석탄 텅스텐 흑연 몰리브덴 마그네사이트
1930 5,876 532,457 884,138 11 20,073 28 0
1940 22,060 1,185,426 5,740,941 4,218 94,581 195 73,540
1944 0.598 3,331,814 7,048,776 8,333 103,306 160 157,745
국사 신론 : 이기백 저

민족성 말살 정책의 강행

만주 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제3기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는 병참 기지화를 서두르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민족성 말살 정책을 강행하게 되었다. 내선 일체, 동조 동근 등 허울 좋은 구호를 내걸고 황국 신민화 운동이라는 것을 내세워 강행된 이 정책은 세계 식민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육을 통한 민족성 말살이 첩경이라고 생각한 일제는 교육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또한 우리의 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고, 아침마다 궁정 요배를 강요하고, 황국 신민 서사를 제창시켰다. 또,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이에 불응하는 애국 지사를 투옥 살해하였고, 심지어 학교를 폐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일반에 대해서도 신사 참배, 정오 묵도, 일어 상용을 강제하였으며, 우리말로 발행되던 일간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끝내는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을 하게 하는 만행을 부렸다. 강압적인 민족성 말살 정책에 대한 우리 민족의 반발은 컸으나, 그들은 헌병과 고등계 형사를 동원하여 탄압하였으며, 심지어는 사상범 예방 금지령이라는 악법까지 제정하였다.

인적 자원의 수탈

일제의 착취는 경제적 착취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적 자원의 수탈에도 미쳤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어 침략의 무대가 확대되고, 또 장기간의 전쟁으로 일본 인구의 고갈을 염려하게 된 일제는 전선으로 우리 청년을 끌어내고, 산업 전선으로는 남녀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1938년 조선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징병제, 학병제를 시행하여 수다한 우리 청년과 학도들을 전선으로 끌어내었다 또,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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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 징발에 끌려 가는 우리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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