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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의 독립 투쟁

내외에서 전개된 독립 운동

경술 국치 후 많은 인사들의 순절 순국에 뒤이어 곧 조직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독립 운동은 국외로 망명한 인사들이 전개한 무력 항쟁 및 외교적 독립 운동과 국내에서의 비밀 결사 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외에서는 한말 의병 운동을 영도하던 분, 구한국의 고관을 지낸 뜻있는 분, 그리고 신식 교육을 받아 근대 국가 의식에 눈뜬 우국 지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들은 경술 국치를 전후하여 속속 해외로 망명하였다.

남⋅북 만주와 연해주로 간 분들은 주로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국 본토와 미국으로 간 분들은 외교 활동에 의한 조국 광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는 중국 상하이였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등이 자리잡았던 미국은 우리 독립 운동의 외교 전선이었고, 자금 조달 중심지였다.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이 근거를 둔 연해주는 무력 항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신민회, 독립 의군부, 광복단, 광복회 등의 비밀 결사가 활동하였으나, 악명 높은 헌병 경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탄압당하였다.

3⋅1 운동과 그 의의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일어난 민족 독립 운동, 자유 쟁취의 경향은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또 윌슨(Wilson)이 전후 세계 평화의 원칙으로 내세운 민족 자결의 원칙은 국내의 독립 운동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민족 자결에 호응하여 일어난 독립 선언은 먼저 토오쿄오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으로 나타났다.

한편, 국내에서도 때마침 돌연한 고종 승하로 민심이 들끓고 있는 때를 타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 불교, 크리스트 교 등 각계 각층의 민족 대표자 33인의 이름으로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모여든 군중은 독립 선포에 이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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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모습
3⋅1 운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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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방방 곡곡에서도 독립 만세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거국적 민족 운동은 중국, 만주, 연해주와 미국 등 해외 각지까지 번졌다.

민족 자주의 정권과 인류 평등의 대의를 선포한 평화적 독립 선포는 제암리 사건과 유관순의 순국에서 보듯 잔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은 실패에 돌아갔다.

3⋅1 운동이 비록 그 직접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사상의 의의는 매우 크다. 무력에도 굽히지 않는 민족의 독립 정신을 내외에 선포하여 민족의 역량을 과시하였고, 이에 놀란 일제는 통치 방침을 무력 중심에서 회유적인 문화 정치로 바꾸었다.

또, 이를 계기로 보다 강력하고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위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고, 연통제1)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실시한 교통 연락 방법. 1919년 내무 총장 안창호가 안을 만들어 임시 정부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한 제도로, 국내 각 도에 총판, 각 군에 군감, 면에 면감을 두고, 국외에는 민간 단체를 통하여 정부의 명령 전달과 연락 사무를 처리하게 하였다.를 조직하여 내외의 독립 운동을 조직화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의사들의 계속적인 독립 투쟁

3⋅1 운동으로 새로운 활소를 얻게 된 독립 운동은 각 부면에서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의사들에 의한 의거였다. 국내 혹은 국외에 잠입하여 일본 황제의 저격, 총독부 고관의 사살, 매국노, 친일분자의 암살이나 일본 행정 기관 및 착취 기관의 폭격 등을 감행하였다. 의거 가운데서도 신임 총독에 대한 강우규의 폭탄 투척 사건, 의열단계인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습격,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습격,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습격, 송학선의 총독 습격, 나석주의 동척 회사 폭탄 사건 등이 유명하다.

또, 일본 천황을 저격한 김지섭, 이봉창 등은 모두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겨레의 기개를 보였으며, 1932년 상하이의 홍코우 공원에서 윤봉길은 대륙 침략의 선두에 섰던 일본 군부 수뇌를 저격함으로써 4억 중국민을 감탄하게 했으며, 그 후 중국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독립 운동을 후원하게 되었다. 이 밖에, 서상한, 박열, 양근환, 최윤동 등의 의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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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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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군의 활동

경술 국치 이후 망명 나왔거나 가혹한 수탈에 삶의 터전을 잃고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동북 만주와 연해주였다. 이미 1919년경 만주 각지에 자리잡은 동포의 수가 200만이나 되었으며, 3⋅1 운동 이후 그 수는 더욱 늘어났고, 이들을 배경으로 무장 독립 단체들이 활동하였다.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운동은 병오⋅정미 의병 운동이 실패한 후 이 지방으로 옮겨간 유인석, 이강년, 홍범도 휘하의 의병 부대 정착에 연원한다. 그 후, 3⋅1 운동의 자극을 받아 무장 독립 운동은 활기를 띠었으며, 1931년 만주 사변 때까지 수많은 무장 독립 단체가 만주, 연해주, 심지어는 함경도 국경 지대에서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이청천의 서로군정서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독립단, 국민회 등의 활약이 컸고, 1930년경에는 정의부, 신민부, 임시 정부 계통인 참의부의 활동이 컸다. 이들 독립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는 1919년 홍범도 부대가 국경선 각지에서 얻은 성과였으며, 가장 빛나는 전과는 2500명의 소수 부대로 적군 5만을 무찌른 1920년의 청산리 승첩이었다. 패전한 일제는 그 분풀이로 만주 각지에서 우리 동포를 마구 학살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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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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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후 독립군은 반만 중국군과 협력하여 솽청보, 징뽀호, 쓰따오허쯔, 뚱징청, 따쒼쯔링 등지에서 왜군에 승전하였으나, 증강되는 왜군에 압도되어 그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겼으며, 일부는 장백 산맥에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강화된 국내의 항일 투쟁

3⋅1 운동 후 포악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표면상 국내의 투쟁이 한때 고개를 숙인 듯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인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는 격화 일로였다. 일제의 착취에 대한 쟁의와 수탈의 격화로 몰락한 농민들의 투쟁은 전국 각지에서 끈덕지게 전개되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6년 순종 승하를 기회로 또 다시 기미 독립 운동에 비할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미리 탄로되었으나, 6월 10일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이를 6⋅10 만세 운동이라 한다.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의 증가
  소작 쟁의 노동 쟁의
건수 관계 인원 건수 관계 인원
1917     8 건 1,148 명
1920 15 건 4,040 명 81 건 4,599 명
1923 176 건 3,973 명 72 건 6,041 명
1930 726 건 13,012 명    
한국 경제사 개설 : 최호진 저

1919년과 1926년 두 차례의 만세 운동에서 선봉에 나선 것은 애국 학생들이었다. 민족과 조국을 위한 투쟁에 있어 빛나는 전통을 쌓은 한국 학생 운동의 금자탑은 광주 학생 운동이었다. 1929년 광주에서의 한⋅일 통학생의 충돌이 발단이 되어 민족적 울분이 일시에 터져 광주 시내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곧 이어 전국의 각급 학교가 이에 호응하여 이듬해까지 계속되니,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 운동이었다. 이 때, 신간회는 서울에서 민중 대회를 개최하여 일제를 성토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총 검거로 실패하였다.

임시 정부와 광복군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해외 독립 운동의 중핵체였다. 임시 정부가 국제적 무대에 차차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였다. 전쟁이 폭발하자 임시 정부는 중국 각지에 망명 중이던 우리 동포들을 규합하여 광복군을 조직하여 중국군과 어깨를 같이하여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40년 중국 정부가 충칭으로 천도하자 임시 정부도 충칭으로 이동하여 광복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해 나오는 우리 청년들을 받아들여 전세를 드높였으며, 또한 정부 조직을 강화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자유 진영과의 결속을 위하여 워싱턴에 구미 외교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중국 정부로부터는 정식 승인을 받았다. 또, 꾸준한 항일 투쟁에 감명을 받은 쟝졔스 총통의 적극적인 후원에 의하여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영⋅중 3국이 한국의 독립을 가결하였다.

1941년에는 임시 정부가 한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광복군을 버어마 전선까지 출동시켰으며, 우리 본토 침투를 위한 특수 훈련을 실시하였다. 1944년에는 프랑스, 폴란드가 임시 정부를 승인하였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의 피어린 투쟁의 보람으로 한국의 독립도 눈앞의 일로 가까와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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