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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족의 피어린 문화 운동

문화 운동의 양상

철저한 일제의 식민 정책은 문화의 각 분야에 미쳤으며, 내선 일체라는 구호와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격심한 차별 대우를 자행하였다. 민족성 말살 운동이 그 좋은 예이며, 이 운동은 학교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교화 활동에서도 감행되어, 언론, 문화, 예술, 체육 활동에 엄중한 통제와 검열을 가하여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억압하였다.

3⋅1 운동으로 민족의 역량을 과시한 우리 겨레는 대내적인 실력 양성에 힘을 기울여, 언론, 문화, 교육, 종교의 진흥과 이를 통한 저항 운동, 여성 및 소년 운동, 형평 운동을 통한 사회 인권 운동, 산업 자립 운동과 자립 경제 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여, 뒷날 조국 광복의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언론 문화 운동

문화 운동에 있어서 민족 항쟁의 선봉에 선 것은 언론 운동이었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 정치에 따라 1920년 동아 일보, 조선 일보 및 시사 신문의 세 민간지가 발행 허가를 얻었다. 이들 민간지는 악명 높은 일제의 검열 제도와 항쟁하면서 민족 사상의 고취, 민족 의사의 대변, 민족 문화의 발전이라는 투쟁 목표를 가지고 당시의 대표적 지성인을 동원하여 근대 민족주의의 선도자로, 총독 정치에 대한 항쟁자로서의 활동을 폈다. 이러한 언론 기관의 투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이들 신문이 1940년에 폐간당할 때까지, 동아 일보, 조선 일보는 각각 수백 회에 걸친 압수 처분을 받았고, 전자는 5회, 후자는 4회나 정간 처분을 받았음을 보아도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1920년에 발간 허가를 얻었던 월간 잡지 개벽도 폐간될 때까지 6년간에 32회의 행정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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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동아 일보
검열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동아 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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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연구의 발전

유구한 민족사를 깨우쳐 주고, 우리의 글을 사수하려는 노력은 국학 연구의 발전을 가져왔다. 국어학과 국사학은 국학의 근간이 되었으며, 국학은 민족 문화의 주체 의식과 민족 문화 전통의 자각적 긍지와 발양을 지향하였으며, 그 근간을 흐르는 정신은 이른바 조선주의였다. 국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일인 학자들이 우리 국사를 배타성, 종속성 및 정체성으로 묶으려는 데 대하여, 신채호, 장지연, 최남선, 정인보 등은 한국사와 한국 문화의 우수성, 독자성, 발전성을 밝히는 데 노력하였다. 1934년에는 국사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가 조직되었다.

국어학에 있어서는 한말의 유길준, 지석영, 주시경의 뒤를 이어,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직한 조선 어학 연구회를 중심으로 한글의 연구, 한글의 보급과 더불어 한글 문법의 연구, 한글 사전 편찬에 헌신하는 한편, 한글날을 제정하고 민족 문화를 선양하였다. 이에, 일제는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을 조작하여 한글 학자를 투옥, 옥사하게 하고, 진단 학회가 발행하던 진단 학보를 폐간시켜 국학 연구의 길을 막았다.

교육과 종교 운동

언론 활동과 국학의 연구가 적극적이고 표면적인 반항이라면 교육과 종교 운동은 점진적이고 이면적인 반항 운동이었다. 일제가 설치한 교육 기관은 극히 소수로서 겨우 일부 지망자들이 혜택을 입을 뿐이었다. 각 지방에는 독지가들에 의한 야학, 사숙, 강습회 등이 생겨났으며, 사립 중학교가 각 지방에 설립되었다. 당시의 교육 운동은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내세워 차별 교육의 철폐, 교수 용어로의 일본어 폐지, 한국 역사 교육의 자유를 투쟁 목표로 내세웠다.

1921년 식민지 관료 양성을 목적한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자, 이에 대항하여 한국인 자신의 손에 의한 한국적 대학 설립을 목적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나, 끝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3⋅1 운동 때 중추적 역할을 한 다수의 학생을 배출한 보성 전문, 연희 전문, 숭실 전문이나 이화 여전 등 사립 전문 학교도 대학 승격을 지향하였으나, 일제의 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는 크리스트 교, 불교, 유교가 모두 민족 운동의 각 방면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한국적 종교인 대종교와 천도교는 큰 역할을 하였다.

다양한 사회 운동

우리 나라 사회 운동은 사회적 해방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이 동시에 전개된 것으로 여성 운동, 아동 운동 및 자립 경제 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에 조직된 대한 민국 애국 부인회는 우리 나라 여성 운동의 효시를 이룬 단체로서, 여류 사회의 조직을 확대하였으며, 은연중에 독립 보조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 정부로 발송하여 광복 운동에 숨은 공로를 세웠다. 그 밖에도 다수의 여성 단체가 활동하였다.

우리 나라의 미래를 어깨에 메고 나갈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 운동도 활발하였다. 1921년, 아동 문제와 아동 예술에 흥미를 가진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의 조직이 1922년에 색동회로 발전하였으며, 또 소년 잡지인 어린이가 발간되고, 어린이날이 생겼다. 한편,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1922년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강화되는 반면에, 일본 자본의 배척, 경제 독립을 지향하는 자립 경제 운동을 목적하는 사회 단체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1922년경부터 자작회, 물산 장려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이, 자작 자급, 국산 장려, 소비 절약, 금주 단연을 내세운 사회 운동을 벌여 많은 공명을 일으켰다.

신문학의 성장

한말에 시작된 신문학 운동은 신시를 발표하고 소설의 새 경지를 개척한 이광수의 활동에 따라 새 기풍이 일어났다. 신문학의 계몽 시대를 탈피하게 된 우리 문단은 1919년 잡지 창조를 중심으로 한 창조파의 문인들이 자연주의 문학 사조를 도입하였으며, 이듬해에 폐허가 발간되자 이를 중심으로 한 폐허파의 문인들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현실 속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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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표지
‘폐허’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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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22년 백조가 창간된 후 젊은 문인들은 낭만주의 문학에 도취되었고, 많은 신시가 발표되어 신시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낭만주의에 반발하여 사회 하층 생활을 소재로 하는 신 경향 문학이 대두하여 개벽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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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표지
‘백조’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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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1931년을 전후로 순수 문학 운동이 일어났다. 신문학 작품에는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작품이 많았으나, 한국의 전통을 찾고, 민족의 반항 의식을 조장하며 계몽성을 띤 작품도 많아, 일제에 저항하는 문필 활동의 면모가 뚜렷하였다.

민족 예술의 성장

예술 활동에서도 한국적 정서를 살려 가며 민족 문화의 전통을 살리고, 민족 의식을 앙양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이른바 조선 미술 전람회를 개최해 왔으나, 민족 진영의 예술인들은 1921년부터 서화 협회전을 열어 선전에 대항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우리 화단의 화풍은 1930년을 전후하여 자연주의에서 추상주의로 넘어갔다.

시청각적 효과를 지녀 민중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연극에 있어서는 종래의 구극과 창극이 성행한 한편, 신극이 도입되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임성구, 윤백남 등에 의하여 1910년경부터 신극 운동이 시작되었고, 1922년 대에는 토월회가, 1931년 대에는 극예술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신극의 발달을 이루었다.

영화가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으나, 직접적으로 영화의 창작을 보게 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으며, 안종화, 이경손, 나운규 등이 그 개척자였다. 특히, 나운규는 민족의 반항 의식과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부각시켜 많은 관객을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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